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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패권 형성되며 피렌체 역할 축소…대공 후계자들의 도덕적 해이
메디치가⑦…문란한 투스카니 대공 후계자들
2020. 03. 15 by 김현민 기자

 

1569년 코지모 1세가 대공작이 된 이래 메디치 가문은 1737년까지 7대에 걸쳐 168년간 투스카니 대공작(grand dukes of Tuscany)을 이어간다.

이 시기는 세계 해양의 패권이 전환되는 때였다. 지중해의 역할이 축소되고 본격적으로 대서양의 시대가 열린다. 지중해 상권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들이 위축되고, 그 중심의 하나였던 투스카니와 그 중심부인 피렌체도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코지모 1세가 부흥시킨 메디치가도 서서히 무너져 간다. 경제기반이 약해지면서 세수가 부족해지고, 그런 가운데 귀족의 후계자들은 사치와 방탕에 빠져 가문은 몰락의 길로 자초한다. 코지모 1세의 후계자들을 약술하면서 메디치가 붕괴의 과정을 살펴본다.

 

< 메디치 가문의 투스카니 대공작 계보 >

 

재임 기간

관계

코지모1

1569~1574

로도비코 데 메디치의 아들

프란체스코1

1574~1587

코지모 1세의 장남

페르디난도 1

1587~1609

코지모 1세의 차남

코지모 2

1609~1621

페르디난도 1세의 아들

페르디난도 2

1621~1670

코지모 2세의 아들

코지모 3

1670~1723

페르디난도 2세의 아들

지안 가스토네

1723~1737

코지모 3세의 아들

 

 

투스카니 공작령 /위키피디아
투스카니 공작령 /위키피디아

 

<< 프란체스코 1, 재위:1574~1587 >>

 

1574년 코지모 1세가 죽고 장남인 프란체스코 1(Francesco I de' Medici)가 투스카니 대공작을 계승한다. 그는 대공에 오르기 10년전인 1564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공작령을 대리통치한 경험이 있다.

그의 부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Ferdinand I)의 공주 조안나(Joanna)였는데, 아들 하나를 낳은후 시름시름 앓다가 15783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도 곧바로 죽었다.

프란체스코는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비안카 카펠로(Bianca Cappello)라는 귀족출신의 여성을 애인으로 두고 있었다. 비안카는 이미 결혼한 여성인데, 프렌체스코는 비안카의 남편을 적당히 돈을 주고 처리하고 전처가 사망하자 곧바로 재혼했다. 피렌체인들은 비안카가 조안나를 조안나를 독살한 사악한 마녀라고 미워했다.

 

이탈리아에 큰 전쟁이 사라지고 귀족 체제가 안정되자 메디치 공작 집안은 문란해 지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의 막내 동생 피에트로(Pietro)가 그 대표적인 예다.

피에트로는 피렌체 귀족가문의 딸 엘레오노라(Eleonora)와 결혼했는데, 부인을 경멸하고 다른 여자들과 사귀었다. 그러자 엘레오노라도 맞바람을 피면서 여러 남자와 놀아났다. 그에게 자신의 연애는 로맨스요, 부인의 연에는 그에게 불륜이었다. 그는 부인을 죽여 버렸다. 가문의 수장이자 대공인 프란체스코는 동생의 비행과 살인행위를 눈감아 주었다.

 

프란체스코의 여동생 이사벨라(Isabella)의 애정행각은 가히 삼류소설 감이다. 전기작가 크리스토퍼 히버트(Christopher Hibbert)에 따르면, 이사벨라는 교황가의 귀족 파올로 지오르다노 오르시나(Paolo Giordano I Orsini)와 결혼했다. 이사벨라는 남편에 정을 부치지 못하고 그의 사촌동생인 트로일로 오르시니(Troilo Orsini)를 정부로 두었다.

남편 파올로는 부인에 대한 복수심에 차 있었다. 그도 맞바람을 피워 비토리아(Vittoria)라는 여인과 교제했다. 그런데 비토리아도 이미 결혼한 여인이고, 프란체스코 아코람보니(Francesco Accoramboni)라는 남편이 버젓이 있었다.

어느날 파올로와 비토리아가 각자의 아내와 남편을 살해하고 결혼하자고 약속했다. 비토리아가 먼저 살인자를 고용해 남편 아코람보니를 죽였다. 그 다음에 파올로가 또다른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사촌 트로일로와 아내를 살해했다. 그리고 둘은 결혼했다.

교황 식스투스 5(Sixtus V)가 그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식스투스는 살해된 프란체스코 아코람보니의 삼촌이었다. 교황이 병사를 보내 파울로를 체포하려 하자, 파울로는 베네치아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파울로는 죽기 직전에 많은 재산을 비토리아에게 넘겼는데, 그 재산을 노린 파울로의 동생이 비토리아를 살해했다.

 

이런 가문의 추문 속에 프란체스코 1세 대공은 속세를 벗어나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는 별장에 눌러 앉아 금붕어를 키우고 스위스 순록에 먹이를 주고 우주론과 화학, 자연의 신비에 대해 토론했다. 그는 연금술에 심취해 악취가 나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화학 실험을 했다. 그는 15871019일 죽고, 부인 비안카는 그 다음날 사망했다. 사인은 말라리아 감염이었는데, 그가 마녀 비안카에게 만들어준 독약으로 함께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왼쪽부터 프란체스코 1세, 페르디난도 1세, 코지모 2세 초상화 /위키피디아
왼쪽부터 프란체스코 1세, 페르디난도 1세, 코지모 2세 초상화 /위키피디아

 

<< 페르디난도 1, 재위:1587~1609 >>

 

프란체스코 1세에겐 정실부인 조안나와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고, 딸 마리아(Maria de' Medici)는 후에 프랑스 국왕 앙리 9(Henry IV)와 결혼해 왕비가 된다.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두 번째 프랑스 왕비다.

프란체스코 1세가 아들 없이 죽자 동생인 페르디난도 1(Ferdinando I de' Medici)38세의 나이에 투스카니 대공작에 올랐다. 그는 형의 죽음에 얽힌 온갖 소문을 부인하고 자연사라고 강조하며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다.

페르디난도 1세는 메디치 가문과 투스카니 공국의 마지막 부흥기를 장식한 군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15세에 추기경이 되어 종교에 심취했다. 그는 대공 지위를 물려받은 후 2년간 추기경 직을 보유하다가 공작으로서 후손을 낳기 위해 추기경직을 버리고 결혼했다. 부인은 프랑스 앙리 2세의 손녀이자 로렌 가문의 크리스티나(Christina of Lorraine)였다.

 

그는 형과 기질이 달랐다. 형 프란체스코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가신처럼 행동했지만 그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피렌체와 투스카니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페르디난도는 우수한 행정가를 영입해 내정을 맡기고 정부의 부패를 척결하고 재정을 안정시켰다. 무역과 농업도 번성했다. 피렌체에 병원이 세워지고 피사에 대학을 설립했다. 리보르노( Livorno)에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몰려왔다.

그는 종교적 편견도 불식시켜 유태인들에게도는 자유를 주었다. 리보르노는 스페인에서 박해받은 유태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가난한 처녀들에게 지참금을 나눠줬고, 수재민들을 구호했다.

예술과 학문 발전에도 후원했다. 우피치 미술관을 확장하고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고서적을 사들여 메디치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는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진 자코포 페리(Jacopo Peri)의 다프네(Dafne)를 지원했다.

그는 60살이 되던 1609년에 사망했다.

 

오페라의 시효로 추정되는 ‘다프네;의 장면 /위키피디아
오페라의 시효로 추정되는 ‘다프네;의 장면 /위키피디아

 

<< 코지모 2, 재위:1609~1621 >>

 

페르디난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코지모 2(Cosimo II de' Medici)19세의 나이에 투스카니 대공작을 물려 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 2세의 딸이자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인 마리아 마달레나(Maria Maddalena)와 결혼했다.

코지모 2세는 병약하고 정치에 관심이 없어 국사는 어머니 크리스티나와 아내 마달레나에게 맡기고, 행정은 장관들에게 위임했다.

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코지모 2세는 파도바 대학에서 공부할 때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에게 배웠는데, 대공이 된 이듬해 갈릴레이를 궁정 수학자로 지명하고 연구자금을 지원했다. 갈렐레이는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천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목성의 위성들을 연구했는데, 그 위성들을 메디치의 별’(Medicean Stars_이라고 명명했다.

갈릴레이는 피렌체에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연구 업적을 발전시키고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에 관한 보고서 별들의 소식’(Sidereus Nuncius, 1610)를 저술했다.

코지모 2세는 1621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투스카니 대공은 10살이었던 그의 장남 페르디난도 2(Ferdinando II de' Medici)가 이어받는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천문학 논문 ‘Sidereus Nuncius'  /위키피디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천문학 논문 ‘Sidereus Nuncius'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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