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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보내지 않으려 결혼시키거나 방해하려다 아버지가 옥에 갇히기도
조선의 공녀①…임금과 중국사신이 심사해 간택
2020. 04. 16 by 김현민 기자

 

공녀(貢女)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여자를 말한다. 삼국시대에 신라는 진평왕 53(631)에 미녀 2명을 당나라에 바쳤고, 통일후 원성왕 8(792)에 미녀 김정란(金井蘭)을 당나라에 바쳤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김정란이 나라의 제일 미녀로 몸에 향기가 났다고 썼다.

고려 시대에도 몽골()이 공녀를 요구해 44170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중 황후에 오른 이(기황후)도 있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국의 속국을 인정했기 때문에 여러차례 공녀를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보면, 명나라에는 태종 8(1408)에서 세종 15(1433)까지 7차례에 걸쳐 모두 16명의 공녀를 상납했고, 청나라에는 인조 16(1638)과 효종 원년(1650) 두 번에 32명의 공녀를 보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딸을 부모와 형제들은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것을 극히 꺼려 했다. 어떤 아버지는 딸을 서둘러 결혼시키거나 딸을 내놓지 않으려 하다가 옥살이를 해야 했다. 공녀로 끌려간 여인들도 불행했다. 모시던 황제가 죽었을 때 순장(殉葬)당하거나 궁중암투에 걸려들어 죽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상국 황제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공녀를 뽑기 위해 임시관청으로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했다.

 

이방원(태종)이 임금에 오른지 8(1408)째 되던 해 명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사신 대표 황엄(黃儼)은 영접의전이 끝나자 곧바로 황제(영락제)가 조선국왕에게 미녀 몇 명을 뽑아달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전했다. 황엄은 문서가 아닌 구두로 황제의 명을 전했다.

태종은 곧바로 금혼령을 선포하고 각 도에 관리들을 파견해 미인들을 뽑아 올리게 했다. 조건은 양가집 규수 가운데 13~25세 처녀 가운데 미색이 있는 여자였다. 천민이나 노비의 딸들은 대싱에서 제외되었고, 가난한 양반의 규수도 대상에 들지 못했다.

지방으로 내겨간 경차관(敬差官)은 고을에 내려가 원님들을 진두지휘하며 여자들을 뽑았다. 딸을 결혼시키거나 숨길 경우 수령까지 문책한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서울에서 73명의 처녀들이 선발되었고, 지방에서 30명이 간택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관리중 가장 높은 영의정 하륜(河崙)과 좌의정 성석린(成石璘)이 간택에 나섰다. 나이 60~70대에 이른 영감들이 미녀를 고른 후에 임금이 친히 나가서 황제에게 보낼 여인을 골랐다. 부왕(父王) 이성계가 승하해 국장이 치러지는 가운데도 공녀 선발작업이 진행되었다. 형제가 없는 외동딸과 부모의 3년상이 끝나지 않은 처녀들은 돌려보냈다.

 

이렇게 해서 7명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명나라 사신 황엄에게 보였더니, 그는 다짜고짜 퇴짜를 놓았다. 자기 눈에 드는 미녀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경상도에 경차관으로 내려간 박유를 결박하고선 경상도에선 왜 미색이 없겠느냐고 다그쳤다.

태종 임금이 그 얘기를 듣고 황희(黃喜)를 보내 명나라 사신의 분노를 다독거렸다. 황희는 처녀들이 부모 곁을 떠나는 바람에 수척해 졌다면서 중국식으로 화장을 하면 미색이 드러날 것이라고 둘러댔다.

 

이번엔 최종 선발된 7명의 처녀들에게 중국식으로 화장을 시켜서 황엄등 중국 사신들 앞에 세웠다. 세 처녀가 연기를 했다. 조씨 처녀는 중풍 환자처럼 입을 뒤틀었고, 김씨 처녀도 중풍 환자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이씨 처녀는 장애인처럼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었다.

중국 사신은 기가 찼다. 그들은 화를 버럭 냈다. “어찌 감히 이런 처자들을 황제에게 보낸다고 뽑았단 말인가.” ··이씨 처녀들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태종은 사신의 분을 풀기 위해 조씨의 아버지 조견은 경북 김천으로, 이씨의 아버지 이운로는 경기도 이천으로 귀양을 보냈다. 김씨의 아버지 김천석은 이조참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딸들의 반란에 아버지들은 곤욕을 치렀지만 세 처녀는 덕분에 공녀로 가지 않게 되었다. 세 처녀는 일시적으로 아버지를 곤욕스럽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한 셈이 되었다.

 

··이씨 세처녀는 퇴짜를 받고 네명이 남았다. 태종은 각 도에 다시 공문과 내관을 보내 처녀들을 뽑아 올리게 했다. 이번엔 태종이 강하게 경고했다. “지난번 선발에 빠진 처녀들이 많았다. 이번에 여자를 숨기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고 꾀하는 자는 직접 처단하거나 관직을 회수하고 가산을 몰수하겠다.” (태종실록 887)

중국 사신들은 조선의 관리들을 믿지 못했다. 그들이 직접 지방에 내려가 미녀를 선발하겠다면서 임금에게 인사를 왔다. 태종이 조근조근 알아듣게 설득하며 만류하자 사신 대표인 황엄이 화를 내며 그냥 명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심통을 보냈다. 태종은 또다시 황희를 보내 간신히 뜯어 말렸다.

 

이때 황해도 평주의 권문의는 자신의 딸을 보내지 않으려다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황해도 순찰사 여칭(呂稱)이란 자가 명나라 사신에게 아양을 부리며 권문의 딸의 자색이 뛰어나다고 일러주었다. 황엄이 권씨 딸을 보자고 했다. 아버지는 딸이 병이 났다며 시간을 끌었다. 의정부에서 권문의에게 딸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권문의는 딸을 보내려는 척하다가 붙잡아 두었다. 아버지로선 목숨을 건 일이다.

명나라 사신은 조선의 국왕이 저런 하급관리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니, 부모들이 딸을 내놓겠는가라고 힐난했다. 태종이 그 얘기를 듣고 권문의를 감옥에 가뒀다. 임금은 홧김에 중국 사신에게 알짱거린 여칭도 잡아 넣었다. 결국, 권씨 처녀는 아버지의 덕분에 공녀로 뽑히지 않게 되었다.

 

앞서 뽑힌 4명에다 새로 선발되어 올라온 처녀를 합쳐 80명이 후보로 선정되었다. 명나라 사신들은 40일동안 6차례의 심사를 걸쳐 7명을 뽑았다. 이 중에 50명이 1차로 간택되고, 다시 44명으로 압축되었다. 이 중에서 임금과 중국사신이 참석한 가운데 5명의 처녀가 최종적으로 뽑혔다.

최종 선발된 5명은 모두 현직 관리의 딸들이었다. 나이는 18, 17(2), 16, 14세이었다. 요즘 세대로 치면 중학생, 고등학생 쯤 되는 어린 처녀들을 영락제에게 데려간다고 뽑은 것이다.

다섯명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권씨, 이씨, 여씨, 임씨, 최씨라고만 전해진다. 이들에겐 중국 여성복이 지급되었다. 태종은 다섯 처녀의 집에 혼수비용으로 쌀과 콩 30, 상포 1백필을 내려주었다.

이들을 데려갈 사신단은 진헌사(進獻使)라 했다. 진헌사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절단인데, 이 진헌사가 바칠 공물은 사람, 즉 어린 처녀들이었다. 진헌사 단장은 공녀 5명중 하나인 이씨의 큰아버지 이문화(李文和)가 임명되었다. 당시 예문관 대제학이었다. 권씨 처녀의 오빠 권영균(權永均), 여씨의 아버지 여귀진(呂貴眞), 최씨의 아버지 최득비(崔得霏)도 사절단에 포함되었고, 임씨 처녀는 아버지 임첨년(任添年)이 병석에 있었기 때문에 보호자 없이 혼자서 떠났다.

한양을 떠나기 전에 다섯 공녀는 왕비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왕비는 그들을 위로했다.

 

MBC 드라마 기황후의 장면 /mbc 캡쳐
MBC 드라마 기황후의 장면 /mbc 캡쳐

 

임금은 조선의 딸들이 중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기 싫었다. 명의 영락제가 요청한 종이 21천장 중 두처운 종이(厚紙)로 처녀들이 탄 가마 주변을 덕지덕지 포장해 여성들이 보이지 않게 했다. 다섯 처녀들을 보좌할 사람으로 하녀 16명과 어린 환관(火者) 12명도 함께 따라갔다.

처녀들이 출발하던 날, 그들의 부모와 형제, 친척들은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고 태종실록은 전한다. 그 울음소리가 길에도 들렸다. 권근(權近)은 그 기막힌 광경을 시로 남겼다. (태종실록 111112)

 

"구중(九重) 궁궐에서 요조 숙녀(窈宨淑女)를 생각하여 /만리 밖에서 미인(美人)을 뽑는다.

적불(翟茀)은 멀리 행하고 /제잠(鯷岑)은 점점 아득하여진다.

부모(父母)를 하직하니 말이 끝나기 어렵고, /눈물을 참자니 씻으면 도로 떨어진다.

슬프고 섭섭하게 서로 떠나는 곳에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르도다."

(九重思窈窕, 萬里選娉婷翟茀行迢遞, 鯷岑漸杳冥辭親語難決, 忍淚拭還零惆悵相離處, 群山入夢靑)

 

권근은 또 항간에 떠도는 동요도 전했다.

보리가 익으면 보리를 구하여야 하고, /해가 저물면 계집아이를 구한다.

나비도 오히려 눈이 있어 /아직 꽃피지 않은 가지를 와서 택한다."

(麥熟當求麥, 日曛求女兒蝶猶能有眼, 來擇未開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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