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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디플레이션 가속화, 생산 위축, 실업자 양산…그릇된 금본위 신앙에 기초
대공황의 수렁④…美 연준의 대오류, 금리인상
2020. 05. 08 by 김현민 기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Federal Reserve Board)1914년 설립된 이래 행한 최대 오류는 대공황이 한창 진행되던 1931년 가을의 금리인상이었다. 그 배경을 살펴보자.

1931921일 국제공동통화의 두 기둥 중 하나인 영국 파운드화가 금 본위제에서 이탈하자 미국 달러만이 금과 함께 교환되는 유일한 국제통화로 남게 되었다. 파운드를 보유하던 프랑스와 유럽 중소국가들은 영국에 속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국이 금본위제에서 이탈하면서 파운드가 폭락하고 금으로 교환되지도 못하게 되자, 프랑스와 유럽 소국들의 우려는 미국 달러도 결국엔 그렇게 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중부유럽 국가들, 특히 패전국들은 1930~31년 통화위기의 해결책으로 외국환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국제적인 금본위 질서에서 벗어났다. 이제 금본위를 유지하는 나라는 미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만 남았다.

프랑스는 정치·외교적으로는 유럽 질서에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목소리를 냈지만, 국제경제적 문제에서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도 프랑스의 등 뒤에 붙어 경제대국인 미국과 영국이 버텨주기만 기대했다. 운전은 너희들이 하라, 우리는 뒷좌석에 타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의 중앙은행은 미국도 금본위제에서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상하고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 나갔다. 유럽의 중앙은행은 1차 대전때 국토가 유린될 것에 대비해 보유금을 뉴욕 연준 지하창고에 옮겨 놓았는데, 그것도 돌려달라고 했다. 유럽의 투자자들도 중앙은행의 흐름에 동조해 달러를 금으로 태환했다. 허버트 후버 행정부와 미국 연준(Fed)은 금본위제를 유지할 것이며, 바꿔 달라는 금을 모두 태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등 4국은 미국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금 태환과 선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이 확보하고 있는 금이 빠져 나가자 Fed는 당황했다. 193110월 한달에 미국에서 유츌된 금은 72,500만 달러로, 이는 2년간 유입된 금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당시 연준은 금본위제도를 이탈할 권한이 없었다. 통화제도 변경 여부는 행정부와 의회의 권한이었다. 결국 연준이 금 유출을 저지하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방책은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었다.

미국 연준은 1931109일 이자율을 1.5%에서 2.5%로 전격 인상했다. 그래도 금이 빠져나가자 1주일 후에 이자율을 3.5%로 올렸다. 그런데 당시 디플레이션 상황이어서 물가는 9월과 10월에 각각 1%씩 하락했다. 금리를 내리지 않아도 실질금리가 오르는 상황에서 금리를 인상하니, 금리인상 효과는 두 배로 증폭되었다.

 

대공황기의 통화 공급량 추이 /위키피디아
대공황기의 통화 공급량 추이 /위키피디아

 

물가가 하락하고 경기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금리를 내려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금 유출을 막는다는 유일한 명분으로 4% 포인트 안팎으로 올렸으니 미국 경제는 더욱더 수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화폐경제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미국도 금리를 인상하지 않고 금본위를 포기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미국 재무부와 연준의 리더들은 금본위 신앙자(gold-standard mentality)들이었다. 그들은 금본위를 살려야 고용이 증가하고 생산도 회복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체제에서 이탈하면 통화량이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했다. 10년전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목격한 그들은 디플레이션보다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그러나 당대 경제 리더들의 판단은 후대 경제학자들의 호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31년 시카고 무료급식소 앞에 늘어선 실업자들의 긴 줄. /위키피디아
1931년 시카고 무료급식소 앞에 늘어선 실업자들의 긴 줄. /위키피디아

 

현실의 세계에서 금본위를 지키기 위해 취한 긴축정책은 생산을 위축시켰다. 생산 위축은 임금하락, 실업 증가를 불러일으키고 디플레이션을 가속화했다. 미국 연준의 결정은 금새 오류였음이 입증되었다.

이자율 상승으로 미국 유가증권 가격은 내려가고 달러 가치는 올라갔다. 유가증권을 보유하고 있던 외국인이 달러를 사면서 금 유출은 중지되고 소액이나마 연준 창고에 금이 쌓였다. 그러나 금리인상은 물가하락을 가속화시키고 담보가치를 떨어뜨려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어렵게 했다. 은행들은 가뜩이나 유가증권 가격이 하락한데다 대출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파산 위기에 처했다.

경제활동은 금리인상 직후인 1931년말과 1932년에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실업률은 1931615%에서 1016.7%, 1220% 가까이 올라갔다. 이에 비해 금본위에서 탈퇴한 영국은 1931년 가을 이후 파운드화 절하와 유동성 공급 덕분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공황기 뉴욕의 아메리칸 유니언 은행 앞에 예금인출자들의 모습 /위키피디아
대공황기 뉴욕의 아메리칸 유니언 은행 앞에 예금인출자들의 모습 /위키피디아

 

19314분기에 미국 은행들은 급속하게 지급불능 사태에 빠졌다. 이듬해인 1932년 경기 위축은 더 심각해 실업률은 5월에 23.7%, 9월에 27.9%까지 치솟았다. 유럽 국가들이 1931년을 기점으로 회복하는데 비해 미국만이 깊은 수렁에 다시 빠져들었다. 이 모든 현상이 금본위제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 경제리더들의 오판 때문이었다.

후버 행정부는 연방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세금을 올렸다. 소득 75만 달러 이상의 부유층에 대해 소득세율을 25%에서 63%로 인상하고, 소비세를 부활했다. 각종 세금을 신설해 휘발유, 타이어, 자동차, 전기, 엿기름, 화장품, 모피, 보석 등에도 판매세를 부과했다.

 

미국의 기업도산은 대공황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93011남부의 J.P. 모건이라 불린 콜드웰 앤 컴퍼니(Caldwell and Company)라는 금융회사가 파산하면서 테네시주를 비롯해 남부 농촌지역에서 100개 가까운 은행들이 연쇄 도산했다. 살아남은 은행들은 파산을 막기 위해 지불준비금을 늘리는 바람에 대출을 줄이게 되었고, 통화공급량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금리가 인상된 19314분기와 1932년에 도산 기업은 급격하게 증가했다.

후버 행정부는 은행들의 연쇄도산을 막기 위해 민주당의 협조를 얻어 1932년초 재건금융공사(RFC: 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를 설립했다. 당시 연준은 최종대부자로서의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중앙은행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 재건금융공사였다.

1932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 은행에 대한 불신에 가득차 있는 정치인들은 재건금융공사가 정치적으로 판단해 지원할 은행을 선정한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일부 은행들에게선 공적자금을 이용해 배를 불리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다.

그러자 19327월 미 의회는 재건금융공사에서 돈을 빌린 모든 은행의 명단을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민주당 출신 하원의장 존 낸스 가너(John Nance Garner)RFC에서 매주 돈을 빌리는 은행의 명단을 발표했다.

의회의 명단 공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은행들은 자신의 부실을 감추기 위해 RFC에 손을 내밀지 않게 되고, 예금자은 RFC에서 돈을 차입하는 은행들에서 예금을 인출했다. 1932년말 지급불능 상태의 은행들이 점차 증가하기 시작했다. 예금자들은 은행에 몰려 긴 줄을 이루었다.

선거 직전인 10월 네바다주의 은행들이 파산 직전에 몰렸다. 1031일 네바다주 당국은 전격적으로 은행 휴일(bank holiday)을 선포했다. 하루동안 은행 업무를 중단시켜 예금자들이 예금인출을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는 뱅크런(bank run)을 막자는 조치였다.

그해 11월 선거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민주당이 의회를 석권했다. 이제 관심은 후버가 아니라 당선인 루즈벨트였다.

시중에는 루즈벨트가 경기회복을 위해 달러 가치를 절하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루즈벨트 당선 이후 취임까지(1932.11~1933.3.) 석달간 미국은 최악의 금융공황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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