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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야기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이후 미국, 캐나다에서 새로운 영토 확보
미국의 승리로 끝난 캐나다와의 알래스카 영토분쟁
2019. 04. 19 by 아틀라스

 

알래스카 지도를 보면, 두툼한 꼬리부분이 남쪽으로 800km쯤 내려온다. 이 부분이 캐나다를 태평양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쪽에서 3분의1 지점에서 안쪽으로 쑥 들어간다. 해안선이 안으로 파고들어가 그 해안선을 따라 일정 거리로 국경이 그어졌기 때문이다.

이 땅을 놓고 미국과 캐나다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다. 우리나라 국토의 17배에 해당하고, 미국의 5분의1이 되는 1718,000의 알래스카의 매입가격은 720만 달러였다. 15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한 목적은 아시아 무역을 위해 선박 연료보급기지를 위한 것이었다. 선박이 주요 운송수단이던 시절에 대양제국은 세계 해양 곳곳에 석탄창고를 만들어 두고 선박들이 중간에 연료를 보급하고 쉬어가던 시설(저탄기지)을 만들었다.

매입 초기에 알래스카의 꼬리부분에 대한 국경이 명확치 않았다. 1871년 브리티시 컬럼비아가 캐나다 연방에 합류하면서 알래스카, 즉 미국과 국경을 명확하게 하자는 시도가 있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의 유콘 상황 /위키피디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의 유콘 상황 /위키피디아

 

알래스카가 미국 땅이 된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1896년에 캐나다 유콘 준주(Yukon territory)의 클론다이크(Klondike)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 금에 눈이 먼 10만명의 채굴자들이 이 얼음과 눈 덩어리 땅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세가지 루트로 금광에 도착했다. 그 첫째가 알래스카의 꼬리부분 해로를 이용하는 벙법이고, 둘째는 뱃길로 알래스카로 가서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 셋째는 캐나다의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이중 가장 많은 사람이 알래스카 꼬리부분으로 가서 클론다이크 강을 따라가는 길을 선택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의 금광 진입로 /위키피디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의 금광 진입로 /위키피디아

 

금을 노린 거대한 군중이 몰려 오자 미국과 캐나다는 알래스카 꼬리부분의 국경을 명확히 할 필요성이 생겼다.

금광은 캐나다에 있었지만, 클론다이크강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는 미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캐나다엔 도로망이 미비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클론다이크 강을 이용했다.

미국은 해안선에서 30마일(49km)를 국경선으로 하자고 했지만, 캐나다는 바다에 떨어져 있는 섬에서 30마일로 하자고 했다. 이 지역에는 섬들이 많았다. 캐나다 주장대로 하면, 캐나다는 금광에서 곧장 바다로 나갈수 있고, 주노(Juneau), 스캐그웨이(Skagway), 린운하(Lynn Canal), 글레이셔만(Glacier Bay)을 소유하게 된다. 미국 주장대로 하면 캐나다는 태평양 연안의 절반이 알래스카에 막혀버리게 된다.

캐나다는 당시 영국령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영토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미국과 영국·캐나다의 알래스카 국경분쟁 /위키피디아
미국과 영국·캐나다의 알래스카 국경분쟁 /위키피디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대외문제에 강경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Jr)였다. 루스벨트는 캐나다 주장에 의심을 품었다. 그는 캐나다는 지금 낸터킷섬((매사추세츠 남쪽의 섬)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필요하다면 캐나다(영국)에 대해 과감한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영국 대사를 불러 캐나다나 영국이 방해한다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 금광으로 짐을 옮기는 인부들의 행렬 /위키피디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당시 금광으로 짐을 옮기는 인부들의 행렬 /위키피디아

 

하지만 전쟁으로 가지는 않았다. 국방장관 루트(Elihu Root)는 전쟁을 하지 말고 국제재판소로 가져가자고 했다. 루스벨트도 이에 동의했다.

재판관 구성을 6명으로 하기로 했다. 미국측에서 3, 캐나다측에서 3명이었다. 중립적 인사로 재판관을 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는 미국의 뜻에 따를 사람 3명을 선택했다. 이에 비해 캐나다 측에선 3명 가운데 2명은 캐나다 입장을 지지했지만, 나머지 1명인 영국인 앨버스톤 대법관(Baron Alverstone)은 부동표였다.

190310월에 열린 국제재판소에서 미국은 42로 이겼다. 앨버스톤 경이 미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캐나다의 두 위원은 최종 판결문에 서명을 거부했지만, 재판 결과를 번복할수 없었다.

캐나다 역사가 노먼 펜링턴은 이 판결에 대해 캐나다 역사상 가장 쓰디쓴 분노의 감정을 폭발시켰다고 언급했다. 캐나다 언론은 캐나다가 희생향이 되었다, 강도질 당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앨버스톤 경에 대해 캐나다를 팔아먹었다며 조롱했다.

이 판결로, 미국은 미국은 64,800의 해안과 섬을 얻게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 통가스(Tongass) 원시림을 얻게 되었다. 넓이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인 로드아일랜드보다 넓다.

캐나다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참전하고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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