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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자본주의에 수정을 가하다…국가개입 통해 생산과 시장 통제 시도
실패한 뉴딜정책①…좌파적 계획경제 도입하다
2020. 05. 11 by 김현민 기자

 

미국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 정책으로 내놓은 뉴딜 프로젝트(New Deal Project)는 자본주의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제시된 정책이다. 어원은 미국 극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아서 왕궁의 코네티컷 양키’(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에 나오는 구절인데, 루스벨트의 경제고문인 스투어트 체이스(Stuart Chase)가 인용해 1932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슬로건으로 채택된 용어다.

루스벨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욕시에서 북쪽 120km 떨어진 허드슨강변 하이드파크라는 마을에서 개인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해 하버드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공부했다. 그는 부자집 엄친아로 자랐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지나치게 부를 형성하는데 대해 증오심을 가졌다. 그는 대공황 시절을 그린 영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주인공처럼 무절제하게 상류층을 지향하는 인간들을 경멸했다. 기업가들이 하류층을 위해 권력과 부를 양보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대공황으로 분출한 실직자들의 분노를 수용해 정치철학으로 가다듬어졌다.

루즈벨트는 선거전에서 추상적인 뉴딜의 구호를 외치며 표를 얻었지만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선 후에 그는 전문가들로 두뇌집단(Brain Trust)을 구성해 다양한 의견을 들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 가운데 하나기 프랜스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였다. 사회학자이자 노동인권가인 그녀는 노동시간 제한, 최저임금 보장, 실업보험 설립, 노령연금 신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강화, 작업장 사고 축소, 소년노동 금지 등을 주장했다. 그는 루스벨트가 3연임하는 12년 동안 노동장관을 맡았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정부 여성장관으로 기록되었다.

또다른 인물은 미 육군 준장 출신으로 1차 대전기간에 전시산업위원회 육군대표로 참여한 휴 존슨(Hugh S. Johnson)이다. 그는 전시에 기업의 과당 경쟁을 줄이고, 근로자의 임금과 가격을 올리는 대책을 수립했는데,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국가부흥국(NRA)을 맡아 산업부문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레이먼드 몰리(Raymond Moley), 기업의 소유와 지배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들포 벌(Adolf Berle) 등 컬럼비아대 출신을 중심으로 급진적인 교수들이 루스벨트의 경제자문으로 대거 포진했다.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본빌 댐(Bonneville Dam) 건설공사 /위키피디아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본빌 댐(Bonneville Dam) 건설공사 /위키피디아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대통령 본인의 신념에다 전문가그룹의 좌파적 이론을 뒷받침으로 해서 형성된 것으로, 자유방임의 시장경제에 메스를 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시장주의의 무질서함이 기업의 과당경쟁과 기업인의 탐욕을 유발하고, 이 제도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실업자와 극빈층으로 전락해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뉴딜 주창자들은 이 제도를 고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야 하며, 국가가 산업의 생산과 유통(공급)을 조절하고 노동자와 극빈층의 최소생계비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뉴딜 정책과 사회주의는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런점에서 공화당 우파는 뉴딜 정책을 공산주의나 나치의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자본주의 경제사학자들은 뉴딜 정책의 국가개입주의를 수정자본주의’(revised capitalism)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좌파 경제학자들은 독점자본주의가 위기를 맞게 되어 국가가 개입한 국가독점자본주의’(state monopolistic capitalism)라고 규정한다.

국가가 산업을 통제하고 빈민을 구제하는데 개입했다는 점에서 뉴딜 정책의 계획경제(planned economy)는 사회주의의 그것과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집단 또는 국가가 소유하는데 비해 뉴딜 정책의 계획경제에서는 사유재산이 인정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흔히 뉴딜 정책과 케인즈주의를 혼동하기도 한다. 뉴딜 정책은 자본주의 개조 정책이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케인즈주의와는 개념이 다른다. 초기 루스벨트는 케이즈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뉴딜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루스벨트가 케인즈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1939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였다. 엄청난 전쟁 수요가 대공황의 수렁에서 탈출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케인즈주의가 옳았음을 입증했다.

 

뉴딜 정책은 실업자와 가난한 자의 구제(relief), 경제를 정상화하는 회복(recovery), 경기후퇴의 악순환을 억제하는 금융시스템의 개혁(reform) ‘3R’로 요약된다.

시기별로는 1933~34년의 1차 뉴딜, 1935~1936년의 2차 뉴딜로 분류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위키피디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위키피디아

 

루스벨트는 취임과 동시에 의회에 100일간의 특별회기를 요청했다. 실업률이 20%를 넘어서고 전국의 은행이 문을 닫고 공장이 가동을 중단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임 후버 행정부의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관세 인상 정책은 농업을 보호하기는커녕 제조업의 위축을 초래했다. 과도한 세금인상은 하위층은 물론 상위층에게도 불만을 샀다. 루스벨트는 취임후 첫 백일에 모든 법안을 밀어붙이고 위기를 통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의회는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하원은 민주 313, 공화 117, 상원은 민주 58, 공화 37석이었다. 특히 2년마다 교체되는 하원에선 민주당이 3분의2를 넘어 70% 이상 의석을 차지했다. 법안 통과는 민주당 마음대로였다. 공화당은 20%를 약간 상회하는 의석(하원)으로 아무말도 하지 못헸고, 게다가 경제를 망친 정당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같은 날 임기를 시작한 민주당 의원들은 의욕에 넘쳤다. 루스벨트와 민주당 의원들은 취임후 첫 백일(The First 100 Days) 동안에 엄청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가장 먼저 처리한 법안은 긴급은행법(Emergency Banking Act)이었다. 이 법안은 후버 시절에 초안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약간의 수정만 거쳐 39일 통과되었다. 이 법안을 통해 신 정부는 휴업중인 은행들의 옥석을 선별하고 신규 자본을 투입하고 합병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 중앙은행(연준)은 모든 외국과의 거래를 감시하고 단속하게 되었다.

320일에는 경제법(Economy Act)이 통과되었다. 이 법도 후버 행정부가 만든 것인데, 연방 공무원의 임금삭감, 퇴역병사의 연금 축소 등을 통해 재정적자를 긴급 처방했다.

 

테네시강 유역 /위키피디아
테네시강 유역 /위키피디아

 

긴급처방이 끝난후 백일 의회는 금융산업 개혁(reform)에 나섰다. 의회의 뉴딜론자들은 은행의 탐욕을 규제하는 법안들을 추진했다.

우선 투자은행(investment bank)와 상업은행(commercial bank)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시중은행이 유가증권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했다. 은행들이 중권에 손을 대 손실을 보고 최종적으로 예금자의 돈을 부도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이론적 뒷받침이 없이 감정적으로 추진되어 실제 효과는 없었다.

또 은행이 파산하더라도 예금자가 최소한의 돈을 보상하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설립했다. 이 제도는 은행의 손실을 국가가 일부 떠안아 뱅크런(bank run)을 방지한다는 취지였다.

100일 동안 의회는 18개의 뉴딜 법안을 처리했다. 공산품 생산을 제한해 가격의 안정을 유도하는 산업부흥법(NIRA), 주요 농산물의 경작을 제한해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농업조정법(AAA)이 통과되었다. 공공사업국(PWA) 연방긴급구제국(PERA) 상품금융공사(CCC) 등을 설치해 광범위한 실업구제 사업을 벌이는 법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공공사업으로는 테네시강 유역개발공사(TVA: Tennessee Valley Authority)가 설립되었는데, 이 사업도 후버 시절에 만들져 실행으로 옮겨진 것이다.

장기실업으로 곤경에 빠진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연방긴급구제법(FERA)이 제정되고, 민간토목사업정책, 긴급교육정책, 여성사업정책이 시행되었다. 시민자원보호단(CCC)이 조직되어 젊은이들을 삼림과 국립공원에서 힘든 일을 시켜 자원도 보존하고 임금도 주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빠르게 지급할수 있는 사업이라면 무잇이든지 빨리 시행하라고 독촉했다. 그 결과 생산성이 없은 불필요한 사업이 남발되었다.

1933년부터 미국 경제는 더 이상 추락을 멈추고 반등하는 조짐을 보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의 결과로 보고 자신의 정책을 힘차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 회복은 금융시장 안정과 행정력에 의한 강제적 금모으기, 금본위 이탈에 따른 달러 절하의 반사효과였지 뉴딜 정책의 결과는 아니었다. 다라서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뉴딜 정책의 주요 법안 약자들을 패러디한 만평(1935) /위키피디아
뉴딜 정책의 주요 법안 약자들을 패러디한 만평(1935)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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