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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금문교·후버댐·록펠러센터…공공사업 일환으로 유명한 토목·건축물 건설
대공황기에 탄생한 미국 랜드마크들
2020. 05. 17 by 김현민 기자

 

20세기 최대의 경제사건이었던 대공황(1929~1939)은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기업과 은행이 도산하고 노동자는 해고되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료급식소에 긴 줄을 기다리며 빵을 배급받아야 했다. 담보로 돈을 빌린 농부는 농지에서 쫓겨나 가족들과 함께 도시의 천막촌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대공황은 미국에 또다른 것을 낳았다. 거대한 조형물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Golden Gate Bridge)와 뉴욕의 조지워싱턴브리지(George Washington Bridge), 후버댐(Hoover Dam),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 등 미국의 랜드마크가 대공황 전후에 생겼다.

 

미국의 경제학자 마크 솜튼(Mark Thornton)이 주장한 마천루의 저주’(skyscraper curse) 이론은 대공황을 근거로 했다. 통화 완화의 시기에 풀려난 대규모의 유동성이 초고층 빌딩 프로젝트로 몰렸다가 경기 위축과 함게 불황을 맞는다는 것이다.

대공황 직전에 착공해 대공황기에 완공된 건물이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Chrysler Building)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다.

 

1932년 크라이슬러 빌딩 /위키피디아
1932년 크라이슬러 빌딩 /위키피디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던 1920년대 중반, 자동차 산업은 미국 제조업을 리드하고 있었다. 당시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의 창립자였던 월터 크라이슬러(Walter Chrysler)는 뉴욕 한복판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지어야겠다는 야심을 품고, 건축가 윌리엄 반 알렌을 불렀다.

처음에 구상한 높이는 54층이었다. 그런데 맨해튼 은행이 더 높은 빌딩을 짓는다는 계획을 듣고 크라이슬러는 63층으로 계획을 바꾸었고, 얼마후 다시 2개층을 더 올려 짓겠다고 설계를 변경했다. 설계도면은 자꾸 바뀌어 69층까지 올라갔다.

그러다가 파리의 에펠탑보다 더 높게 지어야 한다면서 상층부에 첨탑을 더 높이 올렸다. 최종적으로 지어진 빌딩은 77층이다. 천정 높이까지 282m, 안테나 높이까지 치면 318.9m. 이로써 꼭대기 높이 276m, 안테나까지 합치면 300m인 에펠탑보다 높은 세계 최고(最高)의 빌딩이 되었다.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된 것은 1930527, 미국은 대공황의 초입에 들어섰다.

크라이슬러 빌딩은 예술적으로 건축하는 아르 데코(Art Deco). 상층부 첨탑은 스테인레스로 건설되었다. 영화 맨인블랙’ 3, 스파이더맨,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의 배경이 된 뉴욕의 상징적 건물이다. 이 건물은 크라이슬러의 회사 소유가 아니라 창업자 개인 소유였다. 창업자 월터 크라이슬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가문이 소유했고, 1953년에 윌리엄 제켄도프(William Zeckendorf)라는 부동산개발업자에게 매각했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키피디아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키피디아

 

크라이슬러 빌딩은 1년도 못되어 193151일 준공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381m)에게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미국 2위 철강회사 베들레헴의 사주가 25층 건물 건립을 추진하다가 돈이 모자라 화학회사 듀퐁 창업주 피에르 듀퐁(Pierre S. du Pont)을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던 알프레드 스미스 뉴욕주지사로부터 뉴욕주의 별명인 엠파이어스테이트라는 이름을 얻어 사업이 추진되었다. 처음에는 50층을 계획했다가 60, 80층으로 변경되었고, 이웃에 크라이슬러 빌딩이 놓게 올라가자 그보다 더 높게 하늘로 올라가는(sky scrapping)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크라이슬러 준공 1년 후에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준공후 대공황의 여파로 공실문제가 심각했고, 1930년대에는 Empty State Building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지어진후, 미국 경제는 10년간 지속된 대공황에 빠져들었다.

 

후버댐 /위키피디아
후버댐 /위키피디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대공황 타개책으로 노동진흥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과 공공노동국(Public Works Administration)을 설치해 대대적인 토목건설사업을 벌였다. 수많은 실업자들을 토목사업에 끌어 들여 일자리를 만들고 급여를 주자는 생각이었다. 뉴딜 정책 수행기관들이 만들어 낸 건축물이 금문교, 후버댐, 테네시유역개발(TVA), 각종 공공건물, 예술관 등이다.

 

후버댐은 애리조나주와 네바다주의 경계에 있는 협곡에 위치한 댐으로 허버트 후버 대통령 때 건설되어 루스벨트 때에 완공되었다.

콜로라도강은 홍수와 가뭄이 끊임 없이 반복됐는데, 후버댐은 수자원의 안정적 공급과 콜로라도강 하류의 홍수 방지를 위해 설립이 추진되었다. 대공황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사막 한가운데 몰려들어 5년 공사기간에 21천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후버댐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콘크리트 댐으로,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 공사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최단 시간 내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종 안전 장비와 장치의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는 112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후버댐이 저장한 물은 미국 서부 지역의 관개, 식수 및 산업 용수 등으로 사용되는데, 캘리포니아 농업은 이 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키피디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위키피디아

 

금문교는 샌프란시스코의 교통 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루스벨트의 지시로 건설되었다. 1937년 완공되었고,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총 길이 2,789m에 기둥간 거리 1,280m에 형하공간 67m의 기술적인 성취도 놀랍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도 유명하다.

 

라과다이 공항 /위키피디아
라과다이 공항 /위키피디아

 

대공황기에 루스벨트의 공공노동정책의 일환으로 지어진 뉴욕시의 사회간접자본 시설은 링컨 터널, 트라이보러 브리지, 라과디아 공항이 있다. 맨해튼 동부 이스트강변에 루스벨트의 이름을 딴 FDR 도로(FDR Drive)도 이때 만들어졌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링컨 터널 /위키피디아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링컨 터널 /위키피디아
뉴욕 트라이보러 브리지 /위키피디아
뉴욕 트라이보러 브리지 /위키피디아
뉴욕 맨해튼의 FDR도로 /위키피디아
뉴욕 맨해튼의 FDR도로 /위키피디아

 

뉴욕의 록펠러센터는 대공황기간을 관통한 1930~1939에 건축되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회사가 새로운 오페라 하우스를 짓기 위해 건축을 추진하다가 돈이 모자라 당대 최대부호인 존 록펠러의 아들(John D. Rockefeller Jr)의 자금 지원을 얻어 건축되었다. 아버지는 간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록펠러 센터 /위키피디아
록펠러 센터 /위키피디아

 

뉴욕과 뉴저지를 있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는 공황 전에 계획되어 착공되었으며, 공황기에 완공되었다. 원래 명칭은 허드슨리버브리지(Hudson River Bridge)였으나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조지워싱턴브리지로 바뀌었다. 총길이 1,450m, 넓이 36m, 개통 당시에는 세계 최대 교량이었다. 주경간 길이가 1,067m로 이전까지 최대 길이였던 564m의 앰배서더브리지(Ambassador Bridge)2배에 가까운 길이였다. 애초 콘크리트와 화강암으로 외장을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비용 문제로 강구조로 바뀌었다. 1927년에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공동 투자로 착공되어 1931년에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뉴욕과 뉴저지 포트리 사이의 조지 워싱턴 브리지 /위키피디아
뉴욕과 뉴저지 포트리 사이의 조지 워싱턴 브리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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