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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지역
주범 카부가, 25년만에 프랑스서 체포…살인용 칼 수입해 투치족 80만 살해
그 선동방송에 대학살 시작되었다…1994 르완다
2020. 05. 18 by 김현민 기자

 

동부 아프리카의 조그마한 나라 르완다(Rwanda)의 한 라디오 방송은 199446일 이후 선동적인 구호를 연일 내보냈다.

바퀴벌레 같은 투치 놈들은 한명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우리는 최후의 전쟁을 선언한다”, “유엔과 벨기에 모조리 놈들을 죽여라

르완다에서 인기 있는 디스크 자키는 인종적 적대감을 자극하는 인기가수 시몬 비킨디(Simon Bikindi)의 노래를 계속 틀면서 살인을 선동했다. 이 방송의 선동과 자극적 노래를 들은 후투(Hutu)족들은 투치(Tutsi)족 공격에 나섰다.

이날부터 100일간 후투족이 투치족을 살해한 수는 80만명을 넘어서고, 일부에서는 사망자가 100만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이 대학살을 선동한 방송은 펠리시앙 카부가(Félicien Kabuga)가 소유한 RTLM(Radio Télévision Libre des Mille Collines)이란 라디오 방송이었다.

 

르완다 위치 /위키피디아
르완다 위치 /위키피디아

 

르완다 인구구성은 후투족이 85%, 투치족이 14%, 트와(Twa)족이 1%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다수 종족인 후투족이 르완다를 통치하고 있었다.

르완다 대학살은 후투족 출신인 쥐베날 하비아리마나(Juvénal Habyarimana) 대통령이 199446일 탑승한 항공기가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촉발되었다. 아직도 누가 그 항공기를 격추했는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후투족 강경파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투치족 반군세력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집권 후투족 정권은 바고소라(Théoneste Bagosora) 대령을 중심으로 수습위원회를 조직해 투치족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었다. 대령은 권력서열을 무시한 채 군부를 동원해 정권을 장악하고 투치족 소탕을 지시했다.

 

미국 국무부 현상수배범으로 공개된 카부가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국무부 현상수배범으로 공개된 카부가 /위키피디아

 

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던 펠리시앙 카부가가 투치족 살해에 앞장섰다. 카부가는 후투족 출신으로 해외 무역을 통해 돈을 많이 벌어 르완다 최고의 갑부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는 차(tea) 산업에서 시작해 방송국은 물론 물론 잡지, 은행, 무역업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딸 둘을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의 두 아들에게 시집보내 후투족 집권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카부가는 자신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후투족 대통령이 투치의 소행으로 죽었다는 선동을 내보냈다. RTLM 방송의 선동은 위력적이었다. 같은 르완다인인데 종족이 다른 이유로 살인이 허용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양순했던 후투족은 동물로 변해 투치족이면 모조리 죽였다. 아내가 투치족인 후투족 남편은 아내도 죽였다.

후투족 폭도는 별반 무기 없었다. 곤봉, , 낫이 고작이었다. 카부가는 중국에서 마쉐트(Machette)라는 벌채용 칼 50만개를 자신의 배로 수입해 후투족에게 나눠줬다. 흥분한 후투족은 카부가가 나눠준 마쉐트로 투치족과 벨기에인, 기타 소수인종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하나의 칼이 평균 3명의 후투족을 죽였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다.

성 폭력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행해졌다. 투치족 여인 25~50만명이 후투족 남성에 의해 강간되었다고 한다.

 

르완다 대학살 추모관에 걸린 피살자들 /위키피디아
르완다 대학살 추모관에 걸린 피살자들 /위키피디아

 

28년이 지난후 르완다 대학살의 주범인 펠이시앙 카부가(84)516일 프랑스에서 체포되었다. 도피 25년만이다. 그는 위조된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투족 잔당들과 연락을 취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수사당국이 벨기에와 영국의 협조를 얻어 그의 도피장소를 알아내 체포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르완다의 종족 갈등은 오랜 역사적 뿌리를 형성하고 있다.

르완다는 원래 후투족이 살고 있던 곳인데, 15세기 경에 북쪽의 투치족이 내려와 후투족을 지배하며 르완다 왕국을 건설했다. 1884년 베를린에서 열린 아프리카 회의에서 유럽 열강은 르완다를 포함해 아프리카 동부일대를 독일의 관할지역으로 분할했다. 독일은 직접적인 통치를 하지 않고, 지배족인 투치족 왕국을 인정한 채 간접 통치를 했다.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이후 이웃 콩고를 지배하던 벨기에가 1916년에 르완다와 브룬디를 통합해 루안다-우룬디(Ruanda-Urundi)라는 이름으로 통치했다. 벨기에도 현지 왕국들의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에 르완다에는 투치족의 지배가 유지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난후 벨기에는 르완다와 부룬디를 유엔 신탁통치를 위임받아 통치를 지속하면서 언젠가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벨기에의 위임통치기간인 1959년 후투족 독립운동세력은 무장 폭동을 일으켜 후치족 10만명 가량을 살해했다.

벨기에는 마지막에 투치족을 배신했다. 벨기에 당국은 후치족 정권이 들어설수 있도록 약속하고 196271일 르완다를 독립시켰다.

 

독립과 동시에 정권을 잡은 후투족은 투치족의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왕족과 투치족은 북쪽 우간다로 이주해 망명정부를 세우고 르완다 애국전선(RPF: Rwandan Patriotic Front)이라는 반군단체를 조직헀다.

1973년 후투족 출신의 하비아리마나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카이반다(Kayibanda)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비아리마나 정권은 후투족 위주의 통치를 하며 투치족을 내몰았다. 소수인종인 트와족은 산속으로 도망가거나 거지가 되었다.

1990101일 우간다에 망명해 있던 투치족의 애국전선(RPF)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프랑스군과 벨기에군, 자이레군이 파견되어 저지했다. 이때 하비아리마나의 정부군은 투치족을 수천명 살해했다.

하비아리마나는 투치족 애국전선과 타협해 1993년 평화협상을 체결하고 양측은 르완다 정부군과 RPF의 통합에 합의하고, RPF는 르완다에 상주하게 되었다.

이듬해 하비아리마라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건으로 사망하자, 후투족 강경파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투치족 집단살해에 나선 것이다.

후투족의 집단살해는 투치족의 르완다애국전선의 진격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투치족이 정권을 잡고 후투족에 대해 보복 살해를 하면서 후투족 2백만명이 이웃나라로 피난을 갔다.

 

자이레의 후투족 난민촌(1994)/ 위키피디아
자이레의 후투족 난민촌(1994)/ 위키피디아

 

대학살 이듬해인 1996년 카부가는 스위스로 망명을 추진했으나 스위스 당국이 거절하는 바람에 콩고로 갔다가 케냐로 도피했다. 국제수사당국은 케냐 정부에 압력을 넣어 그의 체포를 요구했으나, 케냐 정부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5백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국제수사당국이 포위망을 좁혀 케냐의 그의 소재지를 덥치려 하기 직전에 그는 도주했다. 이후 그는 어떻게 프랑스로 건너갔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 호수 주변의 국가들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호수 주변의 국가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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