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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독립 선언, 1922년 영연방 내 자유국가, 1937년 영연방 탈퇴
아일랜드 역사⑥…對英 전쟁. 내전, 그리고 독립
2020. 06. 08 by 김현민 기자

 

1914년 여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문제를 접어두고 아일랜드인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전략을 취했다. 영국 의회은 아일랜드 자치법을 보류했다가 19149월에 통과시키고 시행시기를 전쟁이 끝난후로 무기한 연기했다. 영국은 아일랜드인에게 영국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면 자치를 허용한다는 조건으로 당근과 채찍의 정책을 병행했다.

존 레이먼드(John Redmond)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회당(IPP: Irish Parliamentary Party)은 연합군에 참전하기로 결의하고 아일랜드인으로 연대를 편성해 영국군 휘하에서 전쟁에 참가했다. 참여자들은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전쟁이 2년째 되면서 영국이 언제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부여할지 불투명한 상황이 되어갔다.

아일랜드 의회당의 급진파들은 레이먼드의 타협적 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패트릭 피어스(Patrick Pearse)는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IRB: Irish Republican Brotherhood)를 조직해 당의 군사조직인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을 장악했다. 거사에는 제임스 코놀리(James Connolly)가 지휘하는 또다른 무장조직 아일랜드 시민군(Irish Citizen Army)이 가담했다. 또 커마나만(Cumann na mBan)이라는 여성운동가 200여명이 참가했다.

거사 일자는 부활절 주간 월요일인 1916424일이었다. 그들은 독일 해군으로부터 2만정의 소총과 1백만발의 실탄과 폭약을 공급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 함정은 아일랜드 해안에 닿기 전에 발각되어 무기를 빼앗겼다. 대원들은 무장도 하지 못한채 거사 날에 거리 행진을 하며 중앙우체국 본부를 장악해 거점으로 삼고,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의 지도자 어온 맥네일(Eoin MacNeill)는 독일 잠수정이 나포되고 무기가 탈취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를 중단하라는 성명을 냈다. 그럼에도 반란자들의 기습적인 점거는 지속되었다.

영국은 당황했다. 전쟁 중에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난데다 적에게서 무기를 공급받는 상황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영국군은 17천명의 병력과 장갑차, 함정을 더블린으로 파견했다. 아일랜드 급진파들의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는 영국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닷새만에 진압되었다.

 

아일랜드 정부군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정부군 /위키피디아

 

아일랜드인들은 처음에 부활절 봉기 주모자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의회를 통한 자치운동이 상당한 결실을 얻은데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이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봉기 주모자들이 교도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더블린 시민들은 야유와 돌팔매질을 했고, 그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영국이 봉기 주모자들에게 가혹하게 대처하는 바람에 아일랜드인들이 돌아섰다. 영국은 아일랜드인 35백명을 무더기로 체포하고 이중 18백명을 수용소에 가뒀다. 77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이중 15명이 재판도 받지 않고 총살당했다. 전시 계엄법 규정이 적용된 것이다.

영국의 무자비한 탄압에 아일랜드인들은 분노했다. 아일랜드 노조와 카톨릭은 영국군의 징집을 반대했고, 아일랜드인들은 영국군 복무를 거부했다.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을 추구하는 신페인당(Sinn Féin)을 지지했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1812월에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인들은 중도 좌파연합인 신페인당에 압도적 승리를 몰아주었다. 2년전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지도부들이 대거 신페인당에 입당해 당선되었다.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의 정파별 분포도 /위키피디아
1918년 영국 총선에서 아일랜드의 정파별 분포도 /위키피디아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의석 105석중 73석을 얻어 아일란드 다수당이 된 직후 1919121일 아일랜드 의회(Dáil Éireann)를 구성하고 북부 얼스터(Ulster)를 포함해 32개 주로 구성된 아이리시 공화국(Irish Republic)의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의회가 장악한 지역은 북부 얼스터와 더블린, 코크(Cork)를 제외한 21개 주에 불과했다. 나머지 지역은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의회는 아이리시 공화군(IRA: Irish Republican Army)을 조직하고 아일랜드 섬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투에 돌입했다. IRA 병력은 15, 영국군은 2만이었다. 전투는 영국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영국군은 여기에다 왕립 아이리시 보안대(Royal Irish Constabulary)라는 경찰병력 1만명, 블랙 앤드 탠스(Black and Tans)라는 민병대, 보조 부대(Auxiliary Division)도 운영했다. 영국군은 북부 얼스터를 장악하고 남아일랜드의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아일랜드군은 농촌으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아일랜드군은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지휘했다. 그는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지도부의 일원으로 게릴라전을 효율적으로 지휘했다. 무기와 병력수에서 수세였지만 IRA2년반에 걸친 독립전쟁에서 550명이 죽은데 비해 영국군은 1천명 이상 사망했다.

영국은 1차 대전 이후 국내에서 전쟁을 싫어하는 염전(厭戰) 사고가 퍼진데다 대량의 희생자를 내며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이끌어갈수 없었다.

 

1919년 아이리시 공화국이 선포한 영토와 1921년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의 영토 /위키피디아
1919년 아이리시 공화국이 선포한 영토와 1921년 앵글로-아이리시 조약의 영토 /위키피디아

 

영국의회는 195012월 아일랜드 자치법(Government of Ireland Act)을 개정해 북부 6개주로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를 구성하고, 남부 16개 주로 남아일랜드(Southern Ireland)로 분리해 자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내전 중인 아일랜드에 적용되지 못했다. 19217월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은 일단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영토문제에 대해 협상에 들어갔다. 아일랜드 대표로는 마이클 콜린스와 아더 그리피스(Arthur Griffith)가 참석했다. 런던에서 열린 협상에서 영국측에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총리가 참석했다.

1921126일 체결된 앵글로-아이리시 조약(Anglo-Irish Treaty)의 골자는 영국 국왕이 아일랜드의 국가수반을 유지하되, 남부 26개주를 자유국(Free State)으로 하며, 얼스터 6개주는 아일랜드로부터 탈퇴할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다.

콜린스는 현실적 타협을 선택했다. 아일랜드가 북부 신교도 지역을 영토로 고집하면 영국군을 몰아내야 하고, 신교도들과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아일랜드는 그럴 군사력이 없었다. 영국 국왕을 형식인 국가수반으로 삼는 것은 캐나다와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자치의 조건을 인정받았다. 자치의회와 군대, 외교권을 보유하는 조건의 자유국은 사실상 독립국과 다름 없었다.

영국 하원은 1921121640158로 조약을 비준했고, 같은날 상원도 16647로 비준했다. 북아일랜드 6개주는 곧바로 아일랜드 의회를 탈퇴해 북아일랜드 의회를 개설했다.

하지만 콜린스와 그리피스의 타협안은 국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북아일랜드를 내줄수 없고, 영국 국왕을 상전으로 받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를 넘겨 9일간의 격렬한 토론을 거쳐 1922년 영국 하원선거에 당선된 아일랜드 의원들의 표결에 붙여 6457의 근소한 표차로 비준안을 가격했다.

비준안 반대파들은 신페인당을 탈당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부활절 봉기에 가담해 미국 국적 소지자란 이유로 석방된 에어먼 데 벌레라(Éamon de Valera)였다. 반대파들은 아일랜드 의회를 거부하고 협상파 정부와 대결했다.

벌레라와 콜린스는 아일랜드 독립을 향한 무장투쟁의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앵글로-아이리시 조약 체결 과정에서 두 사람과 그의 파벌은 원수가 되어 싸웠고, 그 여파는 아직도 아일랜드 정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해리 볼랜드(왼쪽)과 마이클 콜린스(가운데), 에어먼 데 벌레라(오른쪽) /위키피디아
해리 볼랜드(왼쪽)과 마이클 콜린스(가운데), 에어먼 데 벌레라(오른쪽)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정치인들은 반으로 갈라졌고, 군대도 나눠져 서로 싸웠다. 콜린스는 1922년 코크주에서 암살되었고, 그리피스는 불안과 피로로 숨졌다. 아일랜드는 내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19226월부터 19235월까지 1년간 내전에서 정부군 800~900, 조약 반대파 400명이 죽고 12천여명이 투옥되었다. 반대파의 수장인 벌레라도 한때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아일랜드 내전 과정에서 반조약파들와 정부군이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법원이 불타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내전 과정에서 반조약파들와 정부군이 교전을 벌이는 가운데 법원이 불타고 있다. /위키피디아

 

아일랜드 자유국가 의회를 거부하던 데 벌레라는 마침내 의회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그는 세력을 규합해 피어나 포일(Fianna Fail)이란 정당을 만들어 1927년 선거에서 제1야당이 되었다. 피어나 포일당은 1932년 선거에서 집권에 성공했고, 데 벌레라가 총리가 되었다.

데 벌레라는 16년간 총리직을 이어갔고, 1937년에 영연방내 자유국의 지위를 폐지하고 북아일랜드 6개주를 미수복 영토로 인정하는 내용의 헌법을 개정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한다.

데 벌레라는 또 영국인 지주들에 대한 토지차관 상환을 거부했고, 이에 영국은 아일랜드산 농산물에 높은 관세를 물려 무역전쟁이 일어났다. 이 무역 전쟁은 1948년에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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