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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군의 용맹으로 당대 최강 군대 제압…독립 성취와 용병 파견
신성로마제국⑥…스위스, 합스부르크에 승리하다
2020. 06. 19 by 김현민 기자

 

어느 나라나 건국신화는 아름답게 미화되고 윤색된다. 영웅이 나타나 용맹스럽게 적을 무찌르고 시민들을 굴종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스위스의 건국신화의 주인공 빌헬름 텔(Wilhelm Tell)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스위스 건국 신화는 추디(Aegidius Tschudi, 1505~1572)라는 스위스 역사가가 1570년에 쓴 창작물이다.

이에 따르면, 13071118일 합스부르크의 현지 총독 헤르만 게슬러(Hermann Gessler)가 빌헬름 텔에게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려 놓고 그것을 활로 쏘라고 명령했다.

합스부르크가는 스위스 우리(Uri) 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면서 주민들을 억압했다. 합스부르크의 대리인 게슬러는 광장 보리수 밑에 창을 꽂아놓고, 자신의 모자를 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자에 절을 하도록 강요했다. 활쏘기의 명수였던 빌헬름 텔은 모자에 절을 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게슬러의 노여움을 산 것이다.

가슴이 벌벌 떨리는 장면이다. 화살을 잘못 쏘면 아들의 목숨이 날아갈 위험이 있다. 다행스럽게 빌헬름 텔은 아들의 머리에 놓여진 사과를 명중했다.

그러나 그는 만일 화살이 명중하지 않을 경우 게슬러의 심장을 쏘기 위해 화살을 준비해 두었다. 그 화살이 발각되면서 그는 체포된다. 성으로 끌려간 윌리엄 텔은 탈출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도중에 폭풍을 만났지만 배에 능숙한 그는 육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후 빌헬름 텔은 게슬러를 화살로 사살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부상한다.

 

빌헬름 텔의 스토리 /위키피디아
빌헬름 텔의 스토리 /위키피디아

 

독일의 문학가 볼프강 폰 괴테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이 전설을 듣게 된다. 괴테는 역사가 추디가 쓴 연대기를 가져와 희곡을 쓸 것을 계획하고, 그 아이디어를 친구인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주었다. 실러는 괴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희곡 빌헬름 텔을 쓰고, 1804년 바이마르에서 공연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실러의 희곡에 기반으로 해서 1829년에 오페라 빌헬름 텔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에 쓰인 서곡은 로시니의 대표작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빌헬름 텔을 실제 인물로 알고, 그로 인해 스위스가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신화는 그냥 신화일 뿐이다. 빌헬름 텔이 실존인물인지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신화가 탄생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3세기에 상업 발달로 부르조아지(bourgeoisie) 계급이 신흥계급으로 등장하면서 농지를 기반으로 하는 중세 봉건질서에 도전했다. 신흥계급은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상업의 자유를 요구했다. 12세기에 이미 독일 북부 지역에선 도시들이 형성되면서 발트해를 중심으로 무역활동에 나섰고, 스위스에서도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을 연결하는 이동로를 중심으로 상업도시들이 형성되었다. 취리히, 베른 등의 도시는 슈바벤(Schwaben)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아 알프스 루트의 거점 상업도시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에 슈타우펜 왕조가 지배했을 때 우리(Uri), 슈비츠(Schwyz), 운터발덴(Unterwalden)3개 지역은 황제의 직할령이 되어 자치권을 획득했다. 황제는 알프스 루트의 길목에 있는 지역을 직할령으로 두어 직접 조세를 걷을 필요가 있었고, 이들 도시는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어 상대적으로 자율권을 행사할수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Aargau)에 영지를 둔 합스부르크 가문이 서서히 남쪽으로 영지를 넓혀가면서 3개 지역을 위협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Rudolf von Habsburg) 백작은 대공위시대의 권력 공백기를 활용해 루체른 호수를 차지하고 우리, 슈비츠, 운터발텐을 넘보았다.

1273년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회의는 뜻밖에 루돌프를 독일왕(로마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로마 교황에 잘 보여 황제가 되려 하기보다는 왕의 지위에 만족하며 자신의 영지를 늘리는데 주력했다. 허세보다는 내실을 챙긴 것이다. 우선 슈타우펜 왕가의 직할 영지를 자신의 영지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우리, 슈비츠, 운터발텐가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루돌프는 자신의 독일왕 취임에 반대하는 보헤미아왕 오토카르 2세와 전쟁을 벌여 오스트리아를 차지하고 본거지를 오스트리아로 이동했다. 대신에 스위스는 대리인(총독)을 통해 지배했다.

알프스의 시골뜨기가 독일왕이 되다보니 경비가 많이 들었다. 새로운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고, 이를 위해 막대한 군자금을 자신의 영지에서 염출했다. 세금이 올라가면서 영지의 귀족들은 반발했고, 황제의 대리인은 거만하게 반항자를 억압했다.

12917월 루돌프는 장남 알브레히트에게 왕위를 넘겨주는데 실패한 채 사망했다. 새 국왕의 자리는 나사우(Nassau) 가문의 아돌프(Adolf)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우리, 슈비츠, 운터발텐의 3개 주(canton)의 귀족들이 그해 8월에 모여 합스부르크와 대항하기 위해 연방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3개 주의 연방 구성이 스위스의 시초가 된다.

 

1291년 스위스연방 협약서 /위키피디아
1291년 스위스연방 협약서 /위키피디아

 

3개 주는 반합스부르크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신임 국왕 아돌프에게 독일왕의 직할령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루돌프의 아들 알브레히트 1(Albrecht I)는 아돌프와의 권력 투쟁에 승리해 1298년 독일왕에 올랐다. 따라서 스위스 3개주는 다시 합스부르크의 영지가 되었다. 알브레히트가 쉴러의 희극에서 나오는 합스부르크의 악독한 왕이다.

하지만 알브레히트도 오래 독일왕에 재위하지 못했다. 그는 재위 10년째 되던 해 조카 요한에 의해 암살되었다.

알브레히트가 죽고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룩셈부르크 집안에의 하인리히 7세가 독일왕에 올랐다. 스위스의 3개주는 다시 하인리히 7세에게 직할령 요청을 보냈다. 1307년 하인리히는 합스부르크를 약화시키기 위해 스위스 3개 주를 자신의 직할령으로 만들었다.

 

스위스 연방의 확대(1291~16세기) /위키피디아
스위스 연방의 확대(1291~16세기) /위키피디아

 

당시 스위스가 직할령이 되었다고 해서 신성로마제국에서 탈퇴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일왕 또는 독일황제의 직할령이 되는 것이었다. 직할령이 된 후에도 귀족의 지배는 마찬가지였다. 3개 주는 여전히 봉건질서 아래 놓여 있었고, 지배 귀족들이 자신의 상전을 합스부르크 공작에서 독일왕으로 바꾼데 불과한 것이다.

어쨌든 3개 주가 합스부르크의 멍에에서 벗어나자 합스부르크가 가만 있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징발해 동생 레오폴트 1세에게 스위스 정벌을 지시했다. 스위스 모르가튼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Morgarten)에서 3개주 연합군이 막강한 합스부르크 군대를 무찔렀다. 합스부르크군은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주력으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했으나, 스위스군은 게릴라전으로 기습작전을 감행해 승리로 이끌었다.

 

1339년 라우펜 전투도 /위키피디아
1339년 라우펜 전투도 /위키피디아

 

1339년에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국과 합스부르크가 연합해 베른을 공격했다. 라우펜 전투(Battle of Laupen)에서 스위스연방 소속 3개 주는 베른의 편에서 싸웠다. 스위스군은 이번에도 기습작전으로 합스부르크와 부르고뉴 연합군의 기사단을 제압했다.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스위스의 여러 지역이 하나로 뭉칠 필요성을 강하게 느껐다. 루체른, 취리히, 글라루스, 추크, 베른 등 5개 주가 기존의 3개주 연방에 합류하면서 1353년에 스위스 연방은 8개 주로 늘어났다.

1499년에는 스위스는 슈바벤 전쟁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둔다. 이 전쟁 이후 스위스는 사실상 신성로마제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스위스 연방은 151313개 주로 늘어났다.

 

스위스군이 여러 차례 합스부르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스위스 병사들의 용맹성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교황청이 1505년에 근위대로 스위스 용병을 차출했고, 프랑스도 왕실 근위병으로 스위스 병사를 사용했다. 스위스 용병은 중세와 근대로 넘어가는 유럽사 주요 대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스위스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정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는다.

 

알프스산을 오르는 스위스 용병 /위키피디아
알프스산을 오르는 스위스 용병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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