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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들 불러 공동 구제금융 조성…US스틸 통해 철강회사 인수해 사익 논란
JP모건⑧…1907 금융패닉, 중앙은행 구실하다
2020. 07. 06 by 김현민 기자

 

19071019일 토요일, 존 피어몬트 모건은 버지니아 리치먼드에 열린 성공회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총회가 한창 진행중일 때 월스트리트 23번지 J.P.모건에서 전달된 쪽지가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는 주교에게 뉴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라며 자리를 떴다.

뉴욕에서 생긴 문제는 당시 미국 3위의 신탁회사였던 니커보커신탁(Knickerbocker Trust Co.)이 파산 위기에 몰린 것이다. 니커보커신탁과 J.P.모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피어폰트는 이 신탁회사의 파산이 연쇄작용을 하며 월스트리트의 패닉을 불러일으킬 것을 직감했다.

니커보커신탁은 당시 굴지의 구리회사인 유나이티드 코퍼(United Copper Company)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가 주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투자자들의 자금회수 요구로 뱅크런(bank run)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사태의 발단은 탐욕에서 시작되었다. 당대 3대 구리왕의 한 사람인 오거스트 하인스(Augustus Heinze)는 큰 돈을 벌어 뉴욕에 6개의 은행을 차리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는데, 증권브로커였던 그의 동생 오토(Otto)가 형의 주식을 가지고 작전을 벌였다. 오토는 190710월 공매도(short sale) 세력들이 유나이티드 코퍼 주식에 뎜벼들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그는 공매도 세력들이 주식을 빌리는 틈을 타서 매수작전을 펼쳐 주가를 올리고 공매도꾼들을 실패하게 하는 숏스퀴즈(short squeeze) 작전을 도모했다. 오토는 이 작전을 펼치기 위해 뉴욕의 금융가 찰스 모스와 찰스 바니를 끌어들였다. 찰스 바니(Charles T. Barney)는 니커보커신탁의 회장이었다.

찰스 바니는 신탁회사의 자금을 거의 몰빵하다시피 하면서 유나이트디 코퍼 주식을 사들였다. 오토의 형 오거스트가 유나이티드 코퍼의 대주주였기 때문에 공매도세력에게 주식을 빌려주지 않았고, 주식 품귀현상이 빚어져 오토와 찰스 바니의 작전은 첫날 성공했다. 월요일인 1014일 주가는 39달러에서 52달러로 올랐고, 다음날 15일엔 장중에 60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시장에는 오거스트 이외에도 유나이트드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매도 세력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주식을 빌려 공매도에 성공했다. 오토와 찰스가 시장을 잘못 읽은 것이다. 15일 주가는 30달러로 곤두박질친 채로 마감했고, 다음날인 16일엔 10달러로 주저 앉았다.

주가가 폭락하자 뉴욕증권래소는 17일 유나이티드 코퍼의 거래를 중지시켰다. 유나이티드 코퍼에 몰빵 투자한 니커보커신탁에는 투자자들이 몰려 들어 투자자금을 회수했고, 이 신탁회사는 이틀만에 파산위기에 몰렸다.

 

1907년 10월 뉴욕증시 패닉 때의 모습 /위키피디아
1907년 10월 뉴욕증시 패닉 때의 모습 /위키피디아

 

리치몬드 종교행사에 가 있던 피어몬트는 이 정보를 받고 급히 열차를 타고 1020일 뉴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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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증시가 개장과 동시에 폭락했다. 피어폰트는 뱅커스신탁의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Jr.)을 월스트리트 23번지 더 코너로 불러들여 니커보커신탁을 실사하라고 지시했다. 스트롱은 후에 뉴욕연준(Fed) 총재로 발탁되는 인물이다. 스트롱은 실사결과를 통해 아무리 돈을 넣어도 니커보커는 회생할 기미가 없다고 보고했다. 피어폰트는 니커보커의 구제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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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커보커신탁이 파산했다. 그 소식을 들은 피어폰트는 나는 효과가 없는 회사를 살리고 싶지 않다. 한계를 정해 놓고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찰스 바니는 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번엔 아메리카신탁이 파산위기에 몰려 피어폰트에게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피어폰트는 스트롱에게 아메리카신탁의 재무구조를 실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날 저녁 미국 재무장관 조지 코텔유(George B. Cortelyou)가 뉴욕의 한 호텔에서 피어폰트 등 금융자본가들을 불러 사태 해결을 위해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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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텔유 재무장관은 피어폰트에게 2,500만 달러를 내놓으며 당신이 재량권을 갖고 이 돈으로 금융회사들을 구제하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엔 중앙은행이 없었고, 재무부도 금융 패닉을 대처할 자금 여력이 없었다. 재무장관은 연방정부가 얼마간 지원할 터이니 금융자본가들이 패닉 수습에 역할을 해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피어폰트는 신탁회사 사장을 불러 모아 신탁업계가 공동기금을 조성해 개별회사의 파산을 막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신탁회사 경영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아메리카신탁을 실사한 스토롱이 이 회사는 비교적 건실하다고 보고했다. 피어폰트는 여기서 혼란을 멈추게 해야 한다면서 아메리카 신탁에 대한 구제금융을 결정했다. 그는 퍼스트내셔널은행의 조지 베이커(George F. Baker), 내셔널시티은행의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사장을 불러 세 은행이 300만 달러를 조성해 아메리카신탁 구제가금으로 제공했다. 아메리카신탁은 살아났다.

내셔널시티은행은 현재 시티은행의 전신으로, 석유재벌 존 록펠러(John D. Rockefeller)가 피어폰트와의 경쟁심에서 스탠더드오일에서 번 돈을 예금하는 바람에 급성장한 은행이다. 록펠러는 뉴욕 금융가에 패닉이 닥치자 1,000만 달러를 내셔널시티은행에 넣어주었고, “자신의 재산 절반을 미국의 신용회복에 쓰겠다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투자한 신탁회사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신탁회사로 들려가 돈을 인출했다. 사람들은 밤새 거리에서 기다렸다가 은행 문이 열리면 곧바로 창구로 달려갔다. 질서를 정리하기 위해 뉴욕 경찰이 동원되어 번호표를 나눠줬고, 신탁회사 직원들은 돈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느릿느릿 돈을 세어 건네 주는 진풍경이 빚어졌다. 신탁회사들은 급전을 빌리기 위해 단기채 시장에도 손을 벌렸는데 콜 금리가 150%까지 뛰었다. 신탁회사 사장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J.P.모건 본사로 몰려들어 더 코너는 북새통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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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위기가 닥쳤다. 주가가 폭락하면서 거래소의 자금이 바닥났다. 오후 130분 뉴욕증권거래소의 랜섬 토머스(Ransom Thomas) 회장이 길 건너 더 코너를 찾았다. 토머스 회장은 피어폰트에게 거래자금이 고갈되어 거래소 문을 일찍 닫으려 한다고 말했다. 당시 거래소 폐장시간은 오후 3시였다. 피어폰트는 거래소 문을 일찍 닫으면 패닉이 심해집니다. 얼마면 됩니까.“라고 물었다. 거래소가 파산하면 뉴욕 월스트리트의 증권사 50여개가 파산하게 된다. 토머스는 2,50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피어폰트는 즉석에서 뉴욕 은행장들을 소집했다. 14곳의 은행 총수들이 오후 2시에 더 코너에 모였다. 오후 216, 피어폰트와 은행장들은 콜금리 10%의 조건으로 2,500만 달러를 조달하기로 합의했다. 이 소식을 전한 피어폰트의 전령은 기뻐 날뛰는 NYSE의 증권브로커들에 의해 옷이 찢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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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자금 투여에도 불구하고 개장과 동시에 콜 금리가 치솟고 은행과 신탁회사 8곳이 파산했다. 막대한 금액의 어음이 뉴욕청산결제소로 몰렸다. 이 어음을 막지 못하면 미국 금융사들이 집단도산을 하게 된다.

피어폰트는 뉴욕청산결제소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현금결제를 요구하는 어음에 대해 자신이 지급보증했다. 그가 지급보증한 금액은 1,000만 달러였다.

이날 밤, 그는 뉴욕시 종교지도자들을 불러 주말예배에서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을 안정시키는 설교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언론을 기피하는 피어폰트였지만, 이번에는 기자들을 불러 모든 지불요구를 소화하겠다고 밝혔다. 투자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멀리 영국 로스차일드의 너세니얼 로스차일드(Nathan Rothschild) 백작이 피어폰트 모건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인사말을 전해왔다. 이런 내용이 투자자들에게 전해졌다.

일주일간의 사투 과정에서 나이 70세의 노뱅커는 독감에 걸렸다. 그는 감기약을 입에 물고도 하루 19시간씩 업무를 처리했다.

 

1904~1810년의 다우존스 지수 추이 /위키피디아
1904~1810년의 다우존스 지수 추이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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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뉴욕시의 재정이 바닥났다. 뉴욕시장 조지 머클레런(George McClellan)이 모건 도서관으로 찾아와 피어폰트에게 급한 불을 꺼달라고 요청했다. 뉴욕시는 111일까지 2,000만 달러가 필요하고 이를 막지 못하면 시 재정에 부도가 발생한다고 했다. 뉴욕시는 채권을 발행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으나 시장에 유동성 부족현상으로 실패했다. 외국 투자자들도 회수를 요청하는 바람에 필요 자금은 3,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피어폰트는 베이커, 스틸먼을 불러 대책을 논의해 3,000만 달러를 만들어 시 재정을 메웠다. 20세기 들어 뉴욕시는 J.P.모건으로부터 4회의 구제금융을 받는데., 이때가 첫 번째다. 피어몬트는 즉석에서 계약서를 작성해 뉴욕시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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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등장한 문제는 덩치가 컸다. 테네시 석탄·철강·철도 회사(TC&I: Tennessee Coal, Iron and Railroad Co.)가 휘청거렸다. 이 회사는 무어 앤 슐레이(Moore & Schley)라는 대형 증권회사에게서 증권을 담보로 엄청난 자금을 빌렸는데, 주가가 하락하면서 증권사로부터 자금회수 압력을 받았다. TC&I가 자금 상환 여력이 없게 되자 무어 앤 슐레이는 TC&I의 주식을 팔아 치웠다. 주가는 추가로 하락하고 증권사와 TC&I 모두 파산 위기에 빠졌다. 은행들이 일제히 어 앤 슐레이에게 준 대출을 월요일인 114일에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이날 이 돈을 막지 못하면 뉴욕금융시장도 다시 붕괴할 가능성이 불을 보듯 뻔했다.

피어폰트는 무어 앤 슐레이 증권사 구제작전에 나섰다. 그는 토요일 오전에 뉴욕의 금융인들을 자신의 도서관으로 불렀다. 한쪽 방에는 신탁회사 대표들을 모으고, 다른 방에는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자율적으로 토론을 하게 했다. 피어폰트와 파트너들은 사서의 방에서 지켜보았다.

피어폰트는 증권사 무어 앤드 슐레이에 업계가 공동으로 조성한 구제자금을 투입해 살리고, 자신이 콘트롤하는 US스틸로 하여금 TC&I를 인수토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신탁회사 대표들은 서로 적대적이었고 이기적이었다. 업종의 공동노력을 해본 적이 없었다. 피어폰트는 신탁회사 사장들이 모여 있는 방을 걸어 잠그고 열쇠를 자신이 가져갔다고 한다. 12시까지 양쪽 방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1907년 패닉 해결사들. 좌측에서 피어폰트 모건, 조지 베이커, 제임스 스틸먼,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1907년 패닉 해결사들. 좌측에서 피어폰트 모건, 조지 베이커, 제임스 스틸먼,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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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폰트는 자정이 지나 신탁회사 대표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가서 협박을 했다. 그는 무어 앤 슐레이를 비롯해 파산 위기에 빠진 증권사를 구제하려면 2,50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만약 이 돈을 공동으로 조성하지 않으면 자신은 빠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만일 J.P.모건이 손을 털고 나오면 금융시장은 붕괴한다. 그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금융인들의 회사들도 모두 파산할 가능성이 높았다.

일요일 새벽 445, 120명의 금융인들은 2,500만 달러의 공동구제자금 마련에 합의했다. 피어폰트는 금융인들의 귀가를 허락했다.

곧이어 피어폰트는 퍼스트내셔널은행의 베이커, 내셔널시티은행의 스틸먼, US스틸 사장과 만나 US스틸의 인수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내일() 시장이 열리기 전에 발표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US스틸이 TC&I을 인수하면 독과점법에 걸리게 된다. 가뜩이나 시어도오 루스벨트 대통령은 반트러스트 셔먼법을 들이대고 피어폰트를 조이고 있었다.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날 밤 피어폰트는 베이커, 스틸먼, 앨버트 개리 US스틸 회장을 대동하고 워싱턴행 열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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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폰트 일행은 백악관에 들어가 아침식사 중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은 피어폰트의 설명을 들은 뒤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US스틸의 TC&I 인수를 허용한 것이다.

엘버트 개리는 백악관 전화를 빌려 뉴욕의 더 코너에 대통령의 동의 사실을 알렸다. 증권시장 개장 5분 전이었다.

증권시장이 열리면서 주가는 폭등했다. 이후 3주에 걸친 패닉은 사라지고 수습되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뉴욕 금융가를 공격하는 것을 풍자한 만평 /위키피디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뉴욕 금융가를 공격하는 것을 풍자한 만평 /위키피디아

 

피어폰트는 금융시장 패닉을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후 그는 좋은 얘기를 듣지 못했다. 대통령을 겁박해 무어 앤 슐레이가 보유한 TC&I의 주식을 탈취했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어느 상원의원은 금융자본가가 위기를 조장해 사적인 이익을 챙겼다고 비난했다. 후에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를 창업하는 애널리스트 존 무디(John Moody)US스틸이 무어 앤 슐레이가 보유한 TC&I의 주식을 4,500만 달러에 산 것은 절도나 다름 없다면서 TC&I의 자산가치가 무려 10억 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1907년 금융시장의 패닉은 진정되었지만 미국 사회에 많은 과제를 남겼다. 금융재벌이 위기를 수습하도록 방치하지 않으려면 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중앙은행이 있었다면 적어도 J.P.모건처럼 위기를 수습한 후 공전을 챙기는 일이 없을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피어폰트와 앙숙관계에 있는 존 록펠러의 사돈이자 록펠러 2세의 장인인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 상원의원이 총대를 멨다. 올드리치 의원이 제의한 법안에 의해 1913년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가 만들어진다.

 

J.P.모건이 은행들을 쥐고 흔드는 상황을 풍자한 만평 /위키피디아
J.P.모건이 은행들을 쥐고 흔드는 상황을 풍자한 만평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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