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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기독교 성당 건립, 오스만 점령후 모스크, 1935년 박물관 전환, 다시 모스크로
아야소피아, 모스크 환원…성상 모자이크 어쩌나
2020. 07. 11 by 박차영 기자

 

우리가 20199월 터키 이스탄불의 웅장한 세계문화유산을 볼 때 명칭은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이었다. 가이더 설명에 따르면, 터키 공화국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1935년 이슬람 모스크를 박물관으로 변경했다. 이후 터키의 국부는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모스크로 사용하던 카펫이 걷어지고, 대리석 바닥이 드러났다.

1931년 모스크로 사용될 당시 회벽으로 가려졌던 기독교 모자이크가 미국인 조사단에 의해 벗겨지게 되었다. 그후 터키 정부는 회벽 제거작업을 진행해 1964년까지 모자이크 복원작업을 완료했다.

하기야 소피아에 다섯군데의 기독교 모자이크들을 볼수 있다.

1층 본당의 돔 아래 반원형 아치 위에는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좌우에 가브리엘과 미카엘 천사의 모습이 그려진 설교단 모자이크(Apse Mosaic)가 있다.

2층 회랑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가면 대리석으로 된 천국의 문이 나오는데, 이 문으로 들어가면 예수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세례 요한과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이 그려진 데이시스(Deësis), 즉 심판의 날 모자이크가 있다.

2층 회랑 끝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동로마황제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와 황후 이레네, 아들 알렉시우스의 모자이크가 나온다. 2층 남쪽 회랑에 예수를 중심으로 조에 황후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가 새겨진 모자이크도 있다. 1층 본당 출구 쪽에는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 좌우에 황제들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아무리 이슬람인들이 덕지덕지 회칠을 했어도 그 안에 기독교의 성상들이 드러났고, 이 곳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차 지점임을 알수 있었다.

 

아야소피아 전경 /위키피디아
아야소피아 전경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제 하기야 박물관은 다시 모스크로 돌아갔다. 터키 최고행정법원은 10일 하기야 소피아의 지위를 박물관으로 지정한 1934년 내각회의 결정을 취소했다. 이슬람주의를 앞세워 박물관을 다시 모스크로 되돌리겠다고 주장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대통령이 승리한 것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고행정법원의 결정이 나온 직후 성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조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에르도안 정부의 대변인은 종교 행사로 인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하기야 소피아를 방문하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국제문화재 전문가들과 서양 기독교 국가에서는 터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있다. 언젠가 방침이 바뀔지 모르며, 종교행사로 인해 방문을 중단시킬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는 성명을 내고 터키 당국의 조치에 깊이 실망했다면서 터키의 이번 조치가 문화유산의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 소피아는 보스포러스 해협 서안에 위치한 건물로, 연간 370만 명이 찾는 터키 최대의 관광 명소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아야소피아 남서문쪽 모자이크 /김현민
아야소피아 남서문쪽 모자이크 /김현민

 

아야소피아는 1,600년의 세월을 버틴 인류역사의 공동 산물이다. 석조건물과 모자이크 하나하나에 역사의 스토리가 드리워진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따라서 터키가 정치적 목적으로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한 것은 인류역사에 대한 몰염치한 발상이다.

 

아야소피아는 동로마제국 시절에 기독교 성당으로 출발했다. 앞서 두 번에 걸쳐 건설된 성당은 대지진과 화재로 파괴되거나 소실되었고, 현재의 건축물은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반란으로 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성당을 웅대하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다는 당시의 사고에 맞추어 지붕은 돔으로 만들고 4각 기둥을 세우라고 했다. 황제는 또 내부에 기둥을 없애라고도 했다.

이 까다로운 조건의 건축을 담당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밀레투스의 이시도르(Isidore)와 수학자였던 트랄리에스의 안테오미우스(Anthemius)였다.

대성당 건설은 510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55m의 높이 위에 지름 31m의 돔을 올리는 것은 당시 건축기술로는 난제였다. 건축가들은 돔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다양한 공법을 도입했다. 그것은 펜덴티브(pendentive)라고 하는 구조다. 돔의 무게를 네 개의 아치로 받치고, 또 네 개의 기둥으로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돔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로도스 섬에서 진흙 벽돌을 가져왔는데, 그 벽돌은 기공이 많아 당시 일반 벽돌 무게의 12분의1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지었는데도 응력으로 인해 벽에 금이 가 그곳에 창문을 설치했다.

황제의 독촉이 심해 날림공사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53712월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완공된 대성당을 방문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완공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말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성당의 이름은 성스러운 지혜(Holy Wisdom)라는 뜻의 그리스어 하기야 소피아(Hagia Sophia)로 지어졌다. 한국인들에게 성 소피아 사원으로 알려진 이 건축물은 그리스정교의 주교회로 활용되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기독교 모자이크 미술품들은 두차례에 걸쳐 파괴되었다. 첫 번째는 89세기의 성상 파괴운동 때에 지워졌고, 그 후에 제작된 모자이크도 15세기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점령한후 이슬람교도들이 그 위에 회칠을 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모스크로 활용될 때 만들어진 마흐라브 /위키피디아
모스크로 활용될 때 만들어진 마흐라브 /위키피디아

 

성당이 세워진지 900년이 지난 14535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오스만의 술탄 메흐메트 2(Mehmet II)는 함락직후 자신의 부하들에게 3일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에 약탈을 허용했다. 소피아 성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시민들은 소피아 성당으로 도피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승자의 처분에 맡겨졌고, 성소의 많은 유물들이 약탈되었다.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성당의 웅장함과 수려함에 반했다. 메흐메트 2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고 외치고, 승리를 기념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렸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부터 성당을 몰수하고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성당과 대주교 자택을 연결하는 통로가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에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mihrab)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minaret, 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이름도 아야소피아 자미(Ayasofya Cami)로 불리게 되었다. 이 모스크는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때 성당이었던 이 건축물은 1452년부터 1935년까지 약 500년간 모스크로 활용된다. 신은 하나인데 다른 종교가 들어선 것이다.

1923년 오스만 술탄제가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케말 아타튀르크가 탈(脫) 종교를 주장하며 1935년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이번에 85년만에 다시 모스크로 되돌아 간 것이다.

 

아야소피아의 샹들리에 /김현민
아야소피아의 샹들리에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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