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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오스트리아, 독일에 전쟁 지지여부 확인…빌헬름 2세 “무조건 지지”
1차 세계대전②…독일 황제의 백지수표
2020. 07. 13 by 박차영 기자

 

19146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의해 피살되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엔 검거열풍이 불었다.

황태자 부부 암살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수류탄 투척자 네델리코 카브리노비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몬테네그로로 도망간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조직원 4명도 줄줄이 검거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테러범들을 수사한 결과 상부 총책이 세르비아 군부가 운영하는 지하조직 검은손(Black Hand)의 틴코시치(Vojislav Tankosić) 소령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오스트리아 수사당국은 그 위에 군부의 실질적 지도자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과의 관계를 조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사라예보의 오스트리아 당국자는 72일 세르비아 정부가 암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틴코시치 소령이 그들을 훈련하고 교사했다는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앞서 세르비아 정부는 프랑스와 러시아 주재 대사를 통해 황태자 암살 사건에 정부와 관련성이 없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 사건을 이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재국에 설명했다. 하지만 베오그라드 주재 프랑스 대사는 세르비아 군부가 황태자 암살에 관련이 있으며, 세르비아 정부가 잘못했다는 정보를 본국에 보고했다.

 

1904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키피디아
1904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키피디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민들은 슬라브족이면서도 보스니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중세 시절에 보스니아 왕국과 헤르체고비나 공국의 영지가 합쳐진 지역인데,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던 400여년(1463~1878) 동안에 보스니아인 대다수가 그리스 정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에 비해 세르비아인들은 그리스 정교를 유지했다.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은 같은 슬라브 계열이면서도 종교적 차이로 인종적 갈등을 빚어왔다.

황태자 부부 피살사건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자들이 배후에서 종족 갈등을 촉발시킨 것이다.

사건 다음날인 629, 보스티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시내에는 아침부터 보스니아인, 이슬람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 제국기를 흔들며 세르비아인 척결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세르비아인 상점을 약탈하고 불태웠고, 세르비아인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이날 시위로 세르비아인 2명이 사망했다.

시위대는 사라예보 외곽 도시로 번졌고, 인종 증오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을 휩쓸었다. 보스니아 이슬람들은 오스트리아의 보호 아래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인종청소를 집행했다. 이 증오의 열풍을 이용해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세르비아인 5,500명을 체포했다. 이중 700~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하고, 46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세르비아에서도 또다른 종족주의 열기가 불었다. 베오그라드 시내는 합스부르크가에 타격을 준 애국자를 환호하는 분위기로 들끓었다. 고위 관료까지 나서서 암살을 영웅적 행위라고 칭찬하고 오스트리아가 있지도 않은 검은손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다.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 총리는 814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애국주의적 열풍을 거스를수 없었다. 총리는 암살조직과 정부와의 관련성이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각료들의 반오스트리아 발언을 자제시키지 않았다.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의 반세르비아 시위 /위키피디아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의 반세르비아 시위 /위키피디아

 

황태자 피격사건 직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참모총장 콘라트(Conrad von Hötzendorf)는 세르비아를 격파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보았다. 그동안 유화노선을 채택해온 페르디난트 황태자마저 사라졌으니, 콘라트의 전쟁 불가피론은 좌중을 휘어잡았다. 사라예보에서 황태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포티오레크 총독도 강경파에 합류했다. 전쟁론자들은 이 기회에 합스부르크의 영광을 되찾고 세르비아의 싹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Leopold Berchtold)는 전쟁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순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에 앞서 세르비아에 반오스트리아 조직을 해체하고 피격사건의 책임자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헝가리 총리 티사(István Tisza)는 전쟁을 반대했다. 헝가리는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해 준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헝가리 총리의 발언권은 높았다. 티사 총리는 암살사건이 전쟁의 명분이 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 총리 카를(Karl von Stürgkh)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얘기를 종합해 수사 상황을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선언은 시간의 문제일 뿐 불가피해 보였다. 오스트리아가 가장 우려한 것은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이면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러시아의 개입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반응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계급과 독일의 종족은 같은 게르만족이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한때 대치했지만,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두 제국은 유일한 동맹국이었다.

 

1914년 세르비아를 비난하는 오스트리아의 선전물 /위키피디아
1914년 세르비아를 비난하는 오스트리아의 선전물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호요스 알렉산드르(Alexander von Hoyos) 백작을 베를린에 파견키로 했다. 호요스는 외교부가 작성하고 프란츠 요세프 황제가 서명한 서한을 들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 주제 오스트리아 대사는 75일 포츠담 궁을 찾아 빌헬름 2세와 오찬을 하면서 국서를 전달하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았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계획에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서 내각과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황제는 그날 재상 베트만(Theobald von Bethmann-Hollweg)과 전쟁상, 참모총장등을 불러 자신의 견해를 물어보았다. 재상과 군부는 황제의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베트만 재상은 황제의 대답을 백지 수표’(blank cheque)나 다름 없다고 보았다.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벌이면 독일은 무조건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역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독일 황제와 군부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황제는 전쟁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국지전으로 끝날 것으로 보았다. 러시아는 일본에게 패전한 이후 군사력을 보강하지 못해 전쟁을 벌일 기력이 없다는 황제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빌헬름 2세는 페르디난트 황태자에게 동정적이었고, 러시아는 물론 서유럽 열강들이 암살 행위를 지지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독일 군부는 오스트리아의 개전이 국제전이 될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독일 군부는 러시아가 개입하면 이 기회에 러시아를 초토화시킬 기회가 될 것으로 보고 황제의 뜻에 찬성했다는 것이다. 다만 독일 군부는 오스트리아가 황태자 시해에 대한 유럽의 애도분위기가 살아 있을 때 전격적으로 세르비아를 공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에 선물을 준 후에 요트를 타고 노르웨이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 황제가 궁을 비우자 재상, 참모총장, 해군장관 등도 여행을 떠나거나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1914년 7월 14일. 헝가리의 피사 총리. /위키피디아
1914년 7월 14일. 헝가리의 피사 총리. /위키피디아

 

빌핼름 황제로부터 백지 수표를 얻게 되자 오스트리아는 천군만마를 얻은양 전쟁 분위기로 휩쓸려 갔다. 요세프 황제도 전쟁을 지지했고, 베르히톨트 외교장관도 군부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 총리 티사는 신중했다.

7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선 내각과 군부가 참여한 합동회의가 열렸다. 강경파들은 세르비아를 기습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티사 총리는 전쟁에도 절차가 있으며, 개전 이전에 합법적 명분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ultimatum)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최후통첩을 보내고 답변을 기다리는 사이에 군부는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물자를 조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합의했다.

최후통첩은 전쟁으로 가는 선행단계에 불가했다. 세르비아가 수용할수 없는 강력한 요구가 들어가야 했다. 수차례 문구 수정을 거쳐 최종 문서가 719일에 마련되었다.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인종 분포도 /위키피디아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인종 분포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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