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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서 생긴 이미지…EU 가입 앞두고 새로운 인식 필요
세르비아에 대한 역사적 오해와 진실
2020. 07. 15 by 박차영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유럽 국가인 세르비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많다. 조상연 케어프리 대표가 코트라에 세르비아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인식을 가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몇가지를 정리했다.

 

세르비아는 아직도 위험한 국가인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 인터넷에 세르비아에 대해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표현이 발칸의 화약고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혹은 벌어질 가능성이 많은 아주 위험한 국가라는 표현이다. 이렇게 알려진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 1990년대 연방국가던 구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북마케도니아, 코소보로 분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들 뿐이고 그 중심에 세르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스레브레니차 지역에서 무슬림과 다른 민족 8,000여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과 1999년에 있었던 코소보 사태이다. 코소보 사태에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별였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서방의 언론들은 세르비아를 인류의 적으로 몰아갔으며, 당시의 기억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세르비아를 유럽 내에서 가장 위험하고 문제 국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의 세르비아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치안이 좋은 안전한 국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르비아는 EU 가입을 희망해 있으며, 2025EU 가입을 1순위 국정 과제로 여기고 EU와 가입 협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인센티브 제공으로 외국인 투자유치에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유럽의 주요국가(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진출해 있는 곳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룩한 하이테크 글로벌 기업을 가진 국가로 상당히 좋은 편이다. 코소보와의 분쟁이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물리적인 충돌보다는 무역분쟁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서로 견제를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도 전으로 인해 충분히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코소보는 원래부터 무슬림의 땅이었나?

코소보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세르비아인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발칸 지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코소보는 로마의 주요 영토였다. 현재 발칸으로 슬라브인들이 이동을 한 것은 6세기 이후이며, 9~10세기 슬라브족의 한 부류인 불가리아가 제국을 건설했고, 이후 12세기 들어 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세르비아계가 왕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중반에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며 주변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했다.

그러나 오스만 트루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세르비아 왕국에 위험이 찾아 왔다. 1389628일 세르비아 연합군(라자르왕, 1329~1389)12,000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술탄 무라드1, 1326~1389)27,000의 군대가 코소보 벌판에서 전쟁을 치렀다.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연합군이 오스만 제국군과의 코소보 전투의 결과는 세르비아연합군의 전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전장을 순찰하던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 전사자 속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군인 밀로쉬 오빌리치에게 암살되면서 전쟁은 무승부가 되었다.

이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군대가 전멸했지만 적장이 숨졌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시작이 되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은 1459년 스메데레보 지역이 최종 함락될 때까지 저항을 한다. 이렇듯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단순히 영토만을 의미하는 곳이 아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가 개설된 장소이며, 가장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들이 있는 곳이다. , 코소보는 세르비아 인들에게 외침에 대한 항전의 성지이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지니는 의미와 같은 민족 종교의 근원지로 인식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현재 세르비아 북부인 보이보디나 지역과 크로아티아, 헝가리 등지로 이주를 하게 되고 코소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장려로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는 거주인의 90% 이상이 알바니아계 무슬림이 되면서 코소보 사태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르비아 위치 /위키피디아
세르비아 위치 /위키피디아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는 왜 갈라졌나

발칸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슬라브족이다. 사실 구 유고의 6개 공화국은 1918년 이전까지 한번도 통일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다. 또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살고 있던 지역이나 과거 왕국의 명칭으로부터 서로 다른 민족, 즉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슬라브족이라는 동질감이나 역사적 유대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볼 때 남쪽에 사는 슬라브족들이고 언어적으로 유사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지만 카톨릭, 정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가 혼재해 있고 지역마다 상황에 따라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에 동질감이 부족했다.

1918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일명 베오그라드 왕국,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처음 형성되고, 2차 대전 이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까지 포함된 유고슬라비아(남쪽의 슬라브 국가라는 뜻)가 만들어 졌다. 하지만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해 분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동질성이 부족한 구성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되면서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이끄는 파르티잔 군대(게릴라군)는 승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고 이 결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의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해 발칸의 슬라브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티토 대통령은 과거 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인종 청소 갈등 등을 경찰력으로 누르고, 6개 공화국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과거의 갈등을 봉합하면서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제3 세계의 리더 중 한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연방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각 공화국 정치인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 무슬림세력들의 자치권 강화 요청과 이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코소보 내에서 세르비안 경찰력에 의해 탄압받던 알바니아 무슬림세력들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공격이 잦아지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다.

이때 등장한 정치인이 슬로보단 밀로쉐비치(1941~2006). 1989(코소보 전투 500주년)에 코소보 벌판에서 밀로쉐비치는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연설을 하게 되고, 이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타연방의 정치인들에게 각자의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독립,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 북마케도니아 독립,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2008년 코소보 독립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체 및 갈등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악연

세르비아는 발칸지역의 문제아처럼 취급되어 왔고 계속된 유고내전으로 인해 발칸의 가해자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일방적인 가해자라고는 볼 수는 없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갈등과 악연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이 가능하다.

발칸지역의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내재되기 시작했습니다. 현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점으로 북쪽지역은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반복이 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을 위한 봉기를 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위해 서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도 16839월 비엔나 침공에 실패하고 1697년 센타(Zenta, Senta)에서 패배한 뒤, 1699년 합스부르크와 평화 조약을 체결 통해 헝가리와 아드리아해의 여러 지역(현 크로아티아 해안 지대)을 합스부르크에 할양하면서 발칸에서의 영향력이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힘의 약화는 현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북부지역의 힘의 공백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왕조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영토와 세금 혜택은 물론 병역, 종교의 자유(세르비아 정교회)를 보장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게 된다.

세르비아의 민초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카를로바츠, 플리트비체, 자다르, 스플리트 등지와 보스니아 모스타르 등지로 이주를 하여 정착하게 된다. 역사의 비극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세르비아인들은 종교적으로 다른 크로아티아(로마 카톨릭)인들 속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세계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혹독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과 나치의 묵인 아래 급조된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우스타샤 괴뢰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이들이 독일 나치의 이민족 박해 정책을 이행하며 유대인, 집시 및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추방과 학살을 자행하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준다.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괴뢰 정권은 19455월 독일의 패망이 있을 때까지 70만 명이 넘는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분리 과정의 분열

이렇게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악연이 구유고 해체 시기에 크로아티아의 독립 과정에서 다시 발생한다. 크로아티아는 1991625일 독립선언하고 19921UN이 국가로 인정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 인들은 2차대전 동안 세르비아인들이 겪은 공포를 상기하며 자신들의 보호하고자 크로아티아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당시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크로아티아가 서방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양측에서 군인과 민간인 포함 총 2만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집을 잃은 난민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했으나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이 전쟁이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 있으며 크로아티아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큰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시각의 전환

우리는 서방 언론의 시각으로 보도된 발칸 지역의 전쟁을 통해 세르비아를 발칸의 문제아로 인식하고 있지만, 어쩌면 보는 시각에 따라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세르비아의 근-현대사를 지켜보면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는데, 한반도에도 유의미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거의 없는 슬라브족이 하나의 국가로 강제 통합된 상황에서 이후 전개된 분열의 과정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2.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벌어진 학살에 대한 단죄가 없었던 상황에서 1990년대 민족주의를 악용한 정치인들을 선택한 세르비아인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3. 민족의 근원지라고 믿는 코소보를 다른 세력에 넘겨줘야 한다는 국제 세력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을 과연 잘못된 행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분쟁이 내재된 지역에 살면서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응 할 수 밖에 없는 세르비아인들도 어쩌면 역사의 비극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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