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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서부전선에선 개전 초부터 교착상태…4년 내내 지리한 참호전 전개
1차 세계대전⑨…참호전 “서부전선 이상없다”
2020. 07. 20 by 김현민 기자

 

미국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0)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 선임병 : “전쟁이 어떻게 시작된 거야?”

- 알버트 :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공격한 거죠.”

- 선임병 : “그럼 내가 여기 왜 온 거야? 난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데?”

- 다른 군인 : “황제는 전쟁을 원했을 거예요. 유명해지려면 전쟁이 필요해요. 그게 역사죠. 장군도, 황제도 전쟁이 필요해요.”

 

이 영화(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는 약간의 픽션적 요소를 제외하면 1차 대전 기간중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과 군인들의 정체성 혼란을 적나라하게 전달하고 있다.

전쟁은 애국 열기로 시작되었다. 독일의 어느 학교에 학도병 지원을 위해 학생들은 너도나도 손을 든다. 하지만 실제의 전투는 화려하기 않았다. 끊임 없는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실존을 깨닫는다.

전쟁은 참호에서 이뤄진다. 포탄이 날아오고 옆의 전우가 죽는다. 화염방사기를 쏘아 참호에 숨어 있던 프랑스 병사를 불태우고, 독가스가 등장한다. 부족한 식량, 불결한 위생, 철조망 제거작업의 중노동이 그려진다.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에 구축한 서부전선은 죽음의 장소였다.

영화는 191810월 어느날, 주인공은 전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독일 사령부에선 서부 전선에 새 소식이 없다고 기록을 남긴다.

 

1차 대전중인 1915~1916년의 서부전선 /위키피디아
1차 대전중인 1915~1916년의 서부전선 /위키피디아

 

독일군은 191496~12일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으로 후퇴했다. 곧이어 양측은 북해 쪽으로 달려갔다. 서로 상대방의 우회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벨기에 영내의 이프르(Ypres)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 영화에서처럼 독일 학도병들이 참가했다. 16살 내외의 어린 학생들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예비부대의 75%가 학도의용병이었다. 하지만 독일 소년들은 영국군이 무자비하게 쏘는 기관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한 달 동안 벌어진 격전에서 독일군은 13만명을 잃었고 영국군은 58천명, 프랑스군 5만명 이상, 벨기에군 2만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 전투는 개전 이래 최대이자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독일군은 전력이 앞섰는데, 참호전에서 승기를 잡지 못했다. 연합군은 참호를 파고 전선을 지켰고, 독일군은 긴 참호의 전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 전투 이후 벨기에는 국토의 2%를 지키며 독일에 저항한다.

 

이프르 전투는 참호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양측은 스위스에서 북해에 이르기까지 760km나 되는 긴 참호를 파고 대치했다.

참호전은 적의 기관총 사격과 포격을 방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참호전은 방어전술이다. 기관총과 대포가 1차 대전의 주력 화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공격은 엄청난 희생을 당해야 했다. 오히려 땅속 깊게 참호를 파서 방어에 주력하는 것이 적을 희생시키는 전술이 유리했다. 연합군이 참호를 파니, 독일군도 참호를 팠고, 서부전선은 물론 동부전선, 터키 전선에서도 참호전에 전개되었다.

교전이 없는 날엔 병사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땅을 팠다. 요즘처럼 불도저가 없던 시절이라 모두 군인들의 노동력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참호는 적진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구축되었고, 후방 쪽으로 미로를 형성했다. 전방참호, 후방참호, 대피호, 방공호가 파여졌고, 참호 안에는 침대와 양탄자도 깔았다. 야전 주거시설이나 다름 없었다. 참호 앞에는 철조망이 누더기처럼 펼쳐졌다. 1914년말에 시작된 참호전은 독일이 항복하는 191811월까지 4년 내내 계속되었다.

참호의 위생환경은 열악했다. 쥐와 개구리, 달팽이, 이가 득실했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 땀냄새, 오물 썩는 냄새가 뒤섞여 악취가 진동했다. 전염병도 수시로 발생했다. 병사들은 오한과 고열에 시달리고, 세균성 참호 족염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참호 생활은 평안하지는 않았다. 참호 밖을 나가면 적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수시로 포탄이 날아왔다. 병사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포격이었다. 교착상태에서 양측은 상대방에게 수시로 포격을 가했다. 포탄이 참호 주변에 터지면 파편이 날아왔고, 참호 내에 터지면 참호내 병사들은 집단으로 사망했다. 척후병을 보내 적 참호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화염방사기를 쏘고 도망치기도 했다.

 

미로와 같은 참호(1917). 오른쪽이 독일군 참호, 왼쪽이 영국군 참호. /위키피디아
미로와 같은 참호(1917). 오른쪽이 독일군 참호, 왼쪽이 영국군 참호. /위키피디아

 

191412월 크리스마스를 맞아 서부전선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군은 일부 전선에서 하루 동안만이라도 전투를 하지 말자고 했다. 정부 차원의 휴전이 아니고 전선 사령관들이 약속한 비공식 휴전이었다. 상대방을 행해 총구를 겨누었던 그들은 모두 크리스챤이었다.

양측의 병사들은 서로의 참호를 방문하고 가져온 술과 음식을 나느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서부전선 어느 곳에선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축구경기도 열렸다. 독일군이 32로 이겼다. 동부전선에서도 오스트리아군과 러시아군은 하루동안 과자와 초콜릿을 나누며 친교활동을 했다. 병사들은 그저 국가의 부름에 끌려 나왔을 뿐이었다.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 기간에 독일군과 영국군의 친교(그림) /위키피디아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 기간에 독일군과 영국군의 친교(그림) /위키피디아

 

곧이어 지루하고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1915년에는 독가스가 등장했다. 독일의 유대인 과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발명한 것이다. 독가스는 참호 속에 갇혀 있던 병사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1915422일 서부전선 프랑스군 참호에 처음으로 독가스가 덥쳤다. 병사들은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살갗을 내우고 눈을 멀게 하는 가스로 병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독가스전에 대처하기 위해 양측은 방독면이라는 대응수단을 개발해 전군에 보급했다.

 

서부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데 비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은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1915년말까지 러시아군은 400만명의 병력을 잃고 폴란드에서 후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동부전선 승리에 힘입어 독일은 서부전선에 집중했다.

 

 

1916221일 독일군은 프랑스 국경근처 베르뎅(Verdun)을 공격했다. 독일은 우수한 화력을 활용해 베르뎅의 두오몽 요새(Fort Douaumont)를 점령했다. 하지만 프랑스도 만만치 않았다.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 장군은 프랑스 병사들을 독려해 전선을 사수했다. 요새 하나가 한달새에 주인이 13번이나 바뀔 정도로 양측은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장기화되었다.

프랑스는 전군의 4분의3에 해당하는 125개 사단을 투입했다. 독일도 50개 사단을 배치했다. 프랑스는 압도적은 병력을 2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전투에 투입했고, 독일은 전 병력이 전선을 지켰다. 2월에 시작된 전투는 12월까지 10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양측은 엄청난 손실을 냈다. 독일군은 33~35만명을 잃었고, 이중 14만명이 사망했다. 프랑스도 38만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중 사망자는 16만명이었다. 베르뎅 전투는 그야말로 살육전이었다. 포탄이 2천만개나 쏟아졌다. 막대한 희생을 내고 독일군은 물러났고, 프랑스는 지켜냈다.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 참호 /위키피디아
1916년 솜 전투에서 영국군 참호 /위키피디아

 

이번에는 연합군이 공격에 나섰다. 191671일 영국이 주력군이되고 프랑스가 보조군이 되어 프랑스 국경도시 솜(Somme)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전형적인 참호 전투였다. 연합군은 대포를 쏘고 보병이 진격하는 형식으로 독일군 참호를 공격했다. 140일에 걸친 전투에서 영국군 42만명, 프랑스군 20만명, 독일군 43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하지만 연합군은 얻은 게 없었다. 독일군의 방어를 뚫지 못한 것이다.

 

베르뎅과 솜 전투를 치르면서 양측은 지루한 소모전을 이어갔다. 인류는 미친 전쟁을 계속했다. 수십만명의 목숨을 잃으면서도 전선은 불과 몇km만 이동되었다.

이런 가운데 각국은 대량살상용 무기 개발에 나섰다. 탱크가 나왔고, 비행기가 동원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측도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전투는 살육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1차 대전 기간에 등장한 영국군 탱크 /위키피디아
1차 대전 기간에 등장한 영국군 탱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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