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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질소 비료 개발의 선구자이자 전쟁용 대량살상무기 독가스 개발자
아내를 자살하게 만든 노벨화학상 수상자 하버
2020. 07. 26 by 박차영 기자

 

프리츠 하버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유명한 화학자였다. 그는 질소와 수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연구에 성공했다. 그의 연구결과는 질소비료를 만드는 원리를 제공해 인류의 한계였던 농업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데 기여했다. 그는 그 공로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총애를 받아 과학연구소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18년에 노벨 화학상까지 받게 된다.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은 유대인이었지만 독일에 대한 강한 애국심을 가졌다. 1914년 독일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후 전쟁은 곧바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영국이 해상을 봉쇄하고 화약원료를 칠레에서 수입하는 것을 차단했기 때문에 독일은 화약 부족의 상황에 처했다. 독일 총참모본부는 그를 불러 해결책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화학 천재인 그는 질산 혼합물을 솜에 담가서 만든 솜화약(cotton powder) 제조공법을 제시했다.

전쟁이 터지자 그는 하사관으로 지원했지만, 독일 정부는 그에게 대위의 계급을 주었다. 감지덕지한 그는 전쟁부 화학부장으로 참여했다.

1915년 참호전이 장기화하자 군수뇌부는 하버에게 적 병사를 참호 밖으로 끌어내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했다. 그의 애국심이 만들어 낸 것은 염소 가스(clorine gaas)였다. 염소가스는 인간의 호흡기를 심하게 자극해 적병을 참호 밖으로 나오게 할 수는 있었지만 치명적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마스크나 헝겊으로 코와 입을 가리면 충분히 방어가 되었다.

독일 수뇌부는 더 강한 가스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다. 하버는 이번에 사악한 무기인 독가스를 개발했다. 이 독가스는 프랑스군과 싸우는 서부전선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수천명의 병사들이 즉사했고, 다른 수천명은 공포에 질려 전선을 이탈했다.

 

프리츠 하버와 첫 번째 부인 클라라 /위키피디아
프리츠 하버와 첫 번째 부인 클라라 /위키피디아

 

하버의 절친한 친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하버가 과학적 재능을 인간 학살에 사용하는 것을 매우 꾸짖었다고 한다. 하지만 하버는 과학이 독일의 총력전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버는 동료들에게 과학자는 전방에서 총을 쥐고 있는 군인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하버의 생각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그의 부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유대인이자 독일의 유명한 화학자 클라라(Clara Immerwahr)였다. 대학 시절에 댄스 교육장에서 만난 둘은 사랑에 빠졌고 10년후인 1901년에 결혼했다. 클라라는 여성운동가였고, 평화주의자였다. 아내는 남편이 전쟁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데 실망했다.

19154월 하버는 벨기에 전선으로 가서 독가스 실험을 지휘했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그의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이어 귀가해 다시 러시아 전선으로 가려고 채비를 했다. 그때 그와 아내는 심각하게 다퉜다고 한다. 클라라는 남편에게 수많은 죽음을 부르는 그런 일을 중단하라고 애원했다. 하버는 사랑하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러시아 전선으로 떠나버렸다.

52일 총소리가 나고 아들 헤르만이 달려가 보았더니 어머니 클라라가 권총으로 자살한 모습을 발견했다.

아내를 잃어버린 후에도 독일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충성을 바친 독일은 패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은 하버를 군사재판에 넘겼다. 그러나 전승국의 과학자들이 하버를 옹호하고 나섰다. 영국의 생물학자 홀데인(J.B.S. Haldane)인간은 본성적으로 사악하며 독가스가 없어도 포탄, 탱크, 잠수함 등의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었다면서 과학자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런 호소 덕분에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할수 있었다.

전후에 그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두 번째 부인과 이혼했고, 로열티 수입도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기업인 호시 하지메(星一)가 거액의 후원금을 제공하는 댓가로 일본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하버와 칼라라가 함게 붙힌 스위스 바젤의 묘지 /위키피디아
하버와 칼라라가 함게 붙힌 스위스 바젤의 묘지 /위키피디아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태인 탄압을 본격화했다. 그는 독일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유태인이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것이 싫었다. 그해 하버는 영국에 체류하던 중 시오니스트 지도자 하임 바이츠만을 만났다. 바이츠만은 이스라엘의 한 과학연구소에서 책임자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스라엘로 가던 도중에 1934119,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65세였다.

그는 죽기 직전에 첫부안 클라라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부인의 유해는 그와 함께 스위스 바젤의 한 묘지에 함께 매장되었다.

그가 죽고 그의 친척들은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갇혔다. 그들은 하버가 만든 독가스인 치클론 B(Zyklon B)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는 과학자의 전쟁 도덕성 논란에 항상 등장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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