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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카를 1세, 항복 후 스위스로 망명…헝가리 국왕 복귀에 실패후 유배
1차대전 그후④…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제
2020. 07. 27 by 김현민 기자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6112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86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는 18살에 제위에 올라 68년간 거대한 제국을 통치한 장수 황제였다. 그가 사망할 때엔 자녀가 없었다. 일찍이 11녀를 두었으나 둘 다 일찍이 죽고 조카 페르디난트를 황태자로 세웠다. 이 황태자가 19146월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되어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인물이었다.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후 황제는 동생의 손자인 카를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카를이 황제에 올라 카를 1(Karl I)라 칭했다. 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제다. 정확하게는 합스부르크-로렌가다. 합스부르크는 스페인 왕가에서 1700년 카를로스 2세를 끝으로 단절되었고, 오스트리아 왕가에서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대가 끊겼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가에서 카를 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렌가의 프란츠 1세와 결혼해 합스부르크-로렌가(House of (Habsburg-Lorraine)를 형성해 여성을 통해 합스부르크의 대를 이었다. 따라서 카를 1세는 합스부르크-로렌가의 마지막 황제다.

 

1911년 카를 부부의 결혼식 /위키피디아
1911년 카를 부부의 결혼식 /위키피디아

 

카를 1세의 공식 직함은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연합왕국의 형태를 취했다. 황제가 두 나라의 군주를 맡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각각 의회를 두고 자치권을 위임했다. 보헤미아와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의 직할령이었다.

제국의 영토는 1910년 기준으로 68으로 한반도의 3배가 넘고 인구는 인구 5,100만명 정도였다. 면적은 오스트리아 48%, 헝가리 52%로 비슷했고, 인구는 오스트리아 58%, 헝가리 42%였다. 제국은 독일인이 23.3%로 가장 많고 헝가리인(19.5%), 체코인(12.5%),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인(10.9%), 폴란드인, 루터리아인, 슬로바크인, 슬로베니아인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29세에 황제에 오른 카를은 댄디하고 유약한 청년이었다. 그는 큰할아버지와 달리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로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랑스와 휴전하는 것이었다. 1917년 그는 먼 친척뻘인 벨기에 식스투스(Sixtus) 왕자를 통해 프랑스와 비밀리에 평화협상을 벌일 것을 제의했다. 외무장관 그라프 체민(Graf Czernin)도 황제의 견해에 적극 동조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탈리아에게 영토를 내줄 것을 요구하자 카를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없던 일로 끝났다.

이 비밀협상이 이듬해 19184월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외무장관이 폭로하며서 들통이 났다. 카를의 배신에 놀란 독일이 분노를 표시했고, 체민 장관은 혼자서 모든 책임을 떠맡고 물러나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끝까지 독일 주도의 전쟁에 끌려 다녀야 했다.

 

1918년이 되면서 미군이 증파되고, 전황은 독일, 오스트리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8일 종전시 처리원칙으로 민족자결 14개 원칙을 발표했다. 핵심 내용은 패전국의 각 민족이 독립해 독자적 국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투르크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윌슨의 원칙이 발표되자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독립이 기회가 왔다며 반제국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이에 카를 1세는 제국의회를 소집해 각 민족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고, 이들을 결합하는 연방국가 창설을 제안했다. 민족 대표들은 황제의 제의를 거부했다. 제국의 지배를 받던 각 민족은 빈의 제국정부와 결별하고 독립국을 세우겠다고 주장했다.

카를은 발칸반도의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달마치아, 슬로베니아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해 헝가리와 동등한 국가로 대우할 계획을 추진했다. 하지만 헝가리 관료와 귀족들이 반대했다. 제국이 세 나라로 나눠지면 자신들의 몫이 줄어든다는 게 이유였다.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식 /위키피디아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식 /위키피디아

 

1918년 가을들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빈과 부다페스트에선 좌파와 자유주의자, 야당 정치인들이 분리주의를 부르짖었다. 좌파 또는 중도좌파 정치세력들은 군주제를 반대하고 제민족의 독립을 주장했다.

1014일 외무장관은 연합국에 휴전을 제의했다. 이틀후인 16일 카를 황제는 휴전 조건으로 제국의 북부 갈라치아(Galicia)를 폴란드에게 념겨주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연방국가로 독립시키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Trieste)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겠다고 발표했다.

이 제안에는 헝가리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카를 황제는 헝가리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다른 지역은 모두 독립시키거나 연합국에 넘겨주더라도 헝가리를 제국 내에 두어 이중 왕국을 유지하려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뿌리는 신성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2세는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요구로 해체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자 오스트리아 대공의 지위를 황제로 격상시킨 후 신성로마제국 해체와 동시에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도 영지로 두고 있었다. 1848년 헝가리에 혁명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추구하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에 타협책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바꾸고 헝가리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헝가리를 잃지 않으려는 카를 1세의 구상에 대해 미국이 반대했다. 1018일 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 국무장관은 이중 정부를 인정할수 없으며, 헝가리를 포함헤 각 민족을 독립시킬 것을 요구했다.

랜싱의 요구는 헝가리만이라도 붙들려 했던 카를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제국내 각 민족은 독립을 요구했고, 헝가리에선 1031일 헝가리에선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 백작 주도로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며 스스로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다. 체코와 슬로바크의 지도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로 합치기로 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카를은 발칸반도를 하나의 왕국으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각 민족에 의해 부정되어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나라는 곧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된다.

 

1차 대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위키피디아
1차 대전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위키피디아

 

이제 독일민족이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만 남았다. 1031일 오스트리아 총리 하인리히 람바시(Heinrich Lammasch)마저 황제를 버렸다. 그는 황제에게 항복 조건의 최선은 잠시만이라도 황제의 지배권 행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113일 북해 연안 킬(Kiel) 항구에 대기중이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독일도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같은날 껍데기만 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연합국이 작성한 협상조건을 수용하게 된다.

항복 조건의 골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하고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헝가리 민주공화국으로 분리한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독립시킨다 갈라치아를 폴란드에 이양한다 남부 티롤과 트리에스테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준다 보스티아-헤르체고비나, 달마치아, 크로아티아를 유고슬라비에 넘겨준다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이때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Republic of German-Austria)이란 국명이 처음 등장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내에 독일민족 거주지만 의미하는 잠정적 국호다. 이 국호는 이듬해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변경된다.

 

연합국은 광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 주둔시킬 병력이 부족했다. 다만 각 민족을 독립시켜 합스부르크 가문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는 애당초 없었다. 독일어권에서 하나의 지역 명칭이었고,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하나의 영지에 불과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는 알프스 산악지역에 홀로서기를 하기보다 독일과 합병할 것을 독일에 제의했다. 동시에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고, 윌슨도 독일민족의 합병을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하면 신성로마제국이 다시 탄생하게 되고 역사의 악몽이 되살아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독일민족 통일문제는 연합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병합은 20년후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이뤄지게 된다.

 

1차 대전후 헝가리 왕국의 분할 /위키피디아
1차 대전후 헝가리 왕국의 분할 /위키피디아

 

한편 휴전협정이 체결된 1111, 카를 황제는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국가의 형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은 국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황제 양위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는 빈의 쇤브룬 궁전에 머물며 새로 수립된 공화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해를 넘겨 1919324, 카를은 국경근처에서 휴전 협정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가 자신과 합스부르크가에 행한 모든 조치가 무효이며, 오스트리아의 황제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하고 스위스로 건너갔다. 이에 오스트리아 의회는 53일 황제가 폐위되었고 합스부르크 법률이 효력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카를의 귀국을 금지시켰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황제파들이 들썩 거릴 것을 우려해 모든 귀족의 지위를 박탈하는 법령도 제정했다.

 

카를은 스위스에 머물던 중 헝가리 왕당파들의 쿠데타 소식을 듣게 된다. 헝가리에선 전후 수립된 미하이 카로이 공화국 정부가 19193월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연합세력에 의해 붕괴되고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섰다. 러시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 공산주의 정부로 기록된다. 러시아에서 포로로 잡힌 군인들이 세뇌를 받아 공산주의자가 되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러시아의 도움으로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공산 정권은 과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루마니아를 침공했다가 루마니아군이 반격을 가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는 바람에 그해 8월에 붕괴되었다.

잠시 루마니아가 세운 괴뢰정부가 들어섰으나 19203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해군제독을 역임한 미클로시 호르티(Miklós Horthy)가 왕당파와 반공주의자들을 결집해 헝가리 왕국(Kingdom of Hungary)을 다시 수립했다.

호르티는 카를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스스로 섭정이 되었다. 하지만 연합국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귀를 반대했다. 호르티도 국왕의 부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왕당파는 호르티를 반역자라고 규탄했지만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스위스에 머물던 카를은 연합국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수염을 자르고 위조한 여권으로 솜버트헤이(Szombathely)라는 헝가리 도시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27일 카를은 왕궁에 도착했다.

카를과 호르티는 두시간에 걸쳐 담판을 벌였다. 카를은 당장에 권력을 내게로 넘겨라고 했다. 이에 호르티는 군주에게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전하가 부임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늦기 전에 여기를 떠나 스위스로 돌아가십시오. 강대국들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를은 호르티가 과거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서한 사실을 들먹이며 설득했지만 호르티는 요지부동이었다. 호르티는 예전에는 군주에 충성했지만 지금은 헝가리 국민에게 충성을 다한다면서 국왕의 요구를 완곡하게 부정했다. 카를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생각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호르티는 전하가 계시면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카를이 부다페스트에 입성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는 카를의 부다페스트 입성 자체가 개전이유가 된다고 통보했고, 헝가리 의회는 호르티의 견해를 만장일치로 지지하며 카를에 대한 체포를 가결했다. 호르티는 카를을 체포하지 않았다. 45일 카를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스위스로 돌아갔다.

 

1921년 10월 21일 헝가리 쇼프론에 도착한 카를 국왕 부부 /위키피디아
1921년 10월 21일 헝가리 쇼프론에 도착한 카를 국왕 부부 /위키피디아

 

호르티는 국왕에게 죄송스러웠다. 왕당파들과 호르티 사이에 협상이 이뤄져 192110월에 일시 방문이라는 조건으로 카를의 귀국이 허용되었다. 이 때 왕당파들은 호르티에 배신을 했다. 그들은 쿠데타군을 조직했다.

1021일 카를 부부는 헝가리 국경도시 쇼프론(Sopron)에 도착해 왕당파들의 영접을 받고 곧바로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호르티 정권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왕당파 군대는 2,000명이었다.

왕당파 쿠데타군은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르티는 깜짝 놀라 정부군을 배치했다. 호르티는 국왕에게 제발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카를은 편지 봉투를 뜯지도 않고 내던져 버렸다.

쿠데타군은 부다페스트 외곽 30km까지 진출했을 때 정부군이 저지했다. 약간의 총격전이 벌여졌다. 정부군은 6,00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쿠데타군측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양측은 동족끼리의 전투를 자제하기로 하고 협상을 벌였다. 루마니아는 카를의 쿠데타가 전쟁 사유라며 군대를 투입할 태세였고,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도 군사개입을 경고했다.

왕당파도 더 이상 버틸수 없다고 설득하고 호르티는 애원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강하게 경고했다. 사면초가가 된 카를 부부는 113일 영국군의 호송을 받으며 다뉴브강을 따라 헝가리를 떠났다. 영국 호송선은 흑해로 빠져나와 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island of Madeira)에 그를 내려 놓았다 그의 자녀들도 마데이라로 함께 붙들려 왔다. 연합국들이 합스부르크가의 재개를 우려해 일족을 외딴 섬에 유배시킨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후 헝가리 의회는 카를 국왕의 퇴위를 의결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승권을 폐기했다. 의회는 새로운 국왕을 선출한다고 의결했으나, 그후 아무도 새 국왕으로 영입하지 않았다. 1946년까지 헝가리는 국왕이 없는 왕국을 유지했고, 호르티는 1944년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그후 카를은 얼마 살지 못했다. 192239일 감기에 걸린후 낫지 안혹 폐렴으로 확대되었다. 41일 부인과 황태자 오토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뒀다. 34세였다. 이로써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끊어졌다.

 

카를 1세 /위키피디아
카를 1세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wikipedia: Hungary between the World Wars

wikipedia: Revolutions and interventions in Hungary (19181920)

wikipedia: Aftermath of World War I

wikipedia: Austria-Hungary

wikipedia: Austro-Hungarian Compromise of 1867

wikipedia: Franz Joseph I of Austria

wikipedia: Charles I of Austria

wikipedia: Charles IV of Hungary's attempts to retake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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