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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독일 군부의 협상 제의, 킬 군항의 반란, 황제 퇴위, 정전협상 체결
1차대전 그후⑥…7일만에 붕괴한 독일
2020. 07. 29 by 김현민 기자

 

1918년 하반기에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투르크의 동맹국들은 지쳐갔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하루에 1만명씩 신규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했고, 영국은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지의 식민지에서 병력을 끌어와 병력수가 450만명에 이르렀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독일에는 초기의 민족주의적 열정은 사라지고 전쟁을 끝내자는 염전(厭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전쟁을 지지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전쟁 반대론을 주장했고, 중앙당, 진보인민당 등도 휴전을 주장하게 되었다.

 

경제는 피폐했다. 독일은 초기에 속전속결로 조기에 승부를 낼 생각으로 전쟁 물자의 재고를 준비해 놓지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각 분야에서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해 독일 해상을 봉쇄하는 바람에 군수물자는 물론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해외 조달이 끊겼다. 그나마 프랑스와 벨기에 점령지에서 징발하는 물자로 군수용과 민수용을 일부 충당했다.

국민들은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다. 1915년에 독일은 빵 배급제를 실시했다. 수십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였고 발진티푸스와 같은 전염병과 질병에 시달렸다.

전쟁 말기에 들어가면서 경제상황은 악화되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이 군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농산물과 석탄 생산이 급감했다. 1916~1917년 사이의 겨울은 순무만 먹고 지내야 했다고 해써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 부를 정도로 처절했다. 육류 배급은 1916년말에 평화기의 31%, 1918년말엔 12%로 줄었고, 어류 배급은 1916년 평화기의 51%였으나 1917년말에 그나마 지급하지 않았다. 바다에서 어류 수확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군대에 끌려가서 빈 일자리는 여성들이 채웠다. 여성들은 자발적 봉사라는 명분으로 군수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191712월 화학, 금속, 기계 공장의 절반이 여성이었다.

국민들은 무기 생산에 필요한 철강재가 모자라 고철수집운동을 벌여야 했다.

 

1916년 독일의 고철수집 /위키피디아
1916년 독일의 고철수집 /위키피디아

 

19172월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에서도 3~4월에 군수공장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30만명의 노동자가 파업대열에 참가했다. 파업 주도자들은 혁명 전위대를 자임하며 사회민주당 좌파를 이끌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평범한 독일인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기층민중을 지지하는 사회민주당으로 기울게 되었다.

1918928일 동맹국 가운데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연합국에 항복했다. 오스만 투르크 지도부는 항복 방법을 논의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도 각 민족들이 독립을 위한 결사체를 형성했다.

 

빌헬름 2세 황제(가운데)와 힌덴부르크(왼쪽), 루덴도르프(오른쪽) /위키피디아
빌헬름 2세 황제(가운데)와 힌덴부르크(왼쪽), 루덴도르프(오른쪽) /위키피디아

 

928일 서부전선의 독일군 지휘본부에서 빌헬름 2세 황제와 헤르틀링(Georg von Hertling) 총리에게 숨 넘어가는 보고를 올렸다. 참모차장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전선의 상황에 희망이 없으며 24시간 버티는 것도 장담할수 없기 때문에 연합군에 정전을 제의하자고 건의했다. 그는 한발 더 나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국의 황실을 보존하고 보다 유리한 협상을 벌일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루덴도르프는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참모총장이 선택한 자로, 사실상 군부를 좌지우지하던 인물이다. 그가 돌아서자 독일 황실과 정부는 우왕좌왕했다. 헤르틀링은 총리직 사의를 밝히고 군부는 그의 후임으로 바덴 대공(Prince Maximilian of Baden)을 추천했다. 빌헬름은 바덴 대공을 총리에 임명했다.

바덴 대공은 리버럴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전론자들도 내각에 포함시켰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사회민주당의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었다. 104일 독일의 새 내각은 연합국에 정전을 제의했다. 이 소식은 다음날 독일 국민들에게도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다는 뉴스는 전선에도 알려졌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독일의 정전 회담의 선결 조건으로 점령지에서 독일군을 철수할 것, 잠수함 작전을 중단할 것, 빌헬름 황제가 퇴위할 것 등 세가지를 요구했다. 독일 군부의 입장에서 앞의 두가지는 받아들일수 있으나 세 번째 황제 퇴위는 받아들일수 없는 조건이었다. 세 번째 요구 사항에 루센도르프는 마음을 바꿔 연합국측의 조건을 거부하고 전쟁 재개를 주장했다.

루센도르프가 전쟁 재개를 주장하자 총리 바덴공이 그를 해임했다. 루센도르프는 짐을 챙겨 중립국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독일은 연합국측과 정전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1918년 독일 해군사령부의 공격작전도 /위키피디아
1918년 독일 해군사령부의 공격작전도 /위키피디아

 

1024일 독일 해군본부는 영국과 프랑스 해안을 공격하는 작전을 전 함대에 지시했다. 공격 예정일은 29일로 잡았다. 해군 병사들은 정전협상을 하면서 왜 공격을 하냐냐며 웅성거렸다. 작전명령은 해군본부의 히퍼 제독(Franz von Hipper)과 셰르(Reinhard Scheer) 제독의 결정에 의해 이뤄졌는데, 육군과의 조율도 되지 않고 내각과도 협의되지 않은채 이뤄졌다. 독일군의 지휘체계에 내부 균열이 생긴 것이다.

29일 빌헬름스하펜(Wilhelmshaven) 군항에 정박해 있던 세척의 전함 수병들이 출동명령을 거부했다. 곧 휴전할 것을 기대하던 병사들이 다시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되라는 것을 참지 못한 것이다. 지휘부의 명령을 받은 쾌속선들이 다가와 총격을 가하자 명령을 거부한 수병들이 마지못해 닻을 올렸지만 해군본부는 작전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하면 패배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작전명령을 거부한 전함들은 운하를 타고 해군사령부가 있는 킬(Kiel) 군항으로 입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함들이 킬 항구 입구에 들어오자 저항한 군인들이 체포되었다.

113일 킬 군항의 수병들과 항만 노무자들이 구속 병사 헉방과 방과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진압군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7명이 사망하고 29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에 격분해 1144만명의 시위대는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구성해 시와 항만을 접수했다. 킬 수병의 반란은 다른 지역의 대중봉기를 촉발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1918년 11월 4일 킬 군항의 반란 /위키피디아
1918년 11월 4일 킬 군항의 반란 /위키피디아

 

시위가 격화되면서 사회민주당 소속 장관 샤이데만은 황제 퇴위를 주장했고, 바덴 총리도 빌헬름 2세에게 퇴위를 건의했다.

독일 제국은 황제 아래에 4명의 왕(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6명의 대공, 5명의 공작, 7명의 영주(prince) 22명의 군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빌헬름은 독일연방제국의 황제이자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다.

퇴위 압력을 받고 있던 빌헬름은 황제를 내놓더라도 프로이센 국왕만은 유지하고 싶었다. 파로이센의 면적은 독일 제국의 3분의2를 차지했다. 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써 다른 지방 군주들의 복종을 받으며 사실상 황제로 군림하는 방식을 고려했다.

하지만 상황이 그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119일 수도 베를린의 거리는 평화와 자유와 빵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병사들은 동요했다. 그날 정오 바덴 재상은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황제와 황태자의 퇴위를 발표했다. 빌헬름은 벨기에 스파(Spa)에 있는 육군 사령부로 날아가 퇴위를 발표했다.

빌헬름은 다음날 열차를 타고 중립국인 네덜란드 아메롱겐(Amerongen)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에서 출발해 프로이센, 독일제국에 이르기까지 500년을 지속해온 호엔쫄레른 가문(Hause of Hohenzollern)은 역사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바덴은 시위가 주도하는 사회민주당에 총리 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제 퇴위를 발표한후 바덴은 사회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에게 총리를 맡으라고 요구했다. 에베르트는 잠시 망설였으나, 자신이 정전을 이끌어야겠다고 판단해 총리직을 수락했다.

황제의 퇴위가 발표된 9일 오후에 신임총리 에베르트는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향후 정국과 휴전협정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순간 샤이데만이 혼자서 의사당 창문을 내려다 보며 군중들에게 공화국을 선포했다. "독일 국민들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낡은 군주제가 무너졌습니다. 군국주의를 처단했습니다. 호엔쫄레른이 물러났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가 달성한 독일 공화국이 그 어떠한 것에도 위협받지 않도록 힘써 주십시오! 독일 공화국 만세!"

샤이데만의 즉석 연설은 독일의 역사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의 단독 행위에 대해 그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공화국 선포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에베르트는 1110일에 1차 임시 공화국 정부를 구성하고, 바로 정전협상 대표를 파리로 보냈다. 연합국의 요구는 휴전이 아닌 조항이 아닌 항복이었다. 파리 교외의 콩피에뉴에 설치된 특별 열차 안에서 독일 대표단은 연합국이 내민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연합국의 요구에 의해 독일은 서부 전선 점령지에서 15일 이내에 철수하고, 알사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양도하고, 러시아와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폐기해야 했다.

독일 대표단은 11일 콩피에뉴에 정차된 열차(Compiègne Wagon) 안에서 휴전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1,568, 4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콩피에뉴 열차와 각국 대표들 /위키피디아
1918년 11월 11일 독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콩피에뉴 열차와 각국 대표들 /위키피디아

 

하지만 종전후 독일 민족주의자들,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는 사회주의자들의 폭동과 군부 반란을 등 뒤에서 칼을 찌르는 행위였다는 소문(stab-in-the-back legend)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주장은 독일민족주의를 자극해 2차 대전을 일으키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일조한다. 그들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독일이 1차 대전 막바지에 킬 군항의 반란에서 항복선언까지 1주일 사이에 내부의 소용돌이에 의해 급격히 붕괴된 것은 분명하다.

 

빌헬름 2세는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전쟁후 독일에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은 전쟁전 황족과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했다. 1차 대전후 연합국이 그를 국제재판에 회부하려고 범죄인 송환을 요청했지만 네덜란드 여왕이 거부했다. 4촌간인 영국 조지 5세도 빌헬름의 역사적 죄과는 인정하면서도 그의 사형을 반대했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빌헬름 처형이 국제평화를 해칠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는 네덜란드에 체류하면서 나치 정권의 수립을 지켜보았다. 빌헬름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자신의 복귀를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무시했다. 1940년 히틀러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영국으로 망명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빌헬름은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하자 축하의 뜻을 보냈다.

그는 194164일 사망했다. 8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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