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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돈을 찍어 배상금 상환, 하이퍼인플레이션 유발…화폐개혁 통해 진정
바이마르 공화국⑤…불쏘시개가 된 마르크화
2020. 08. 06 by 김현민 기자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은 경제교과서에서 자주 소개되는 주제다. 단적으로 말해 1922년말에 160 마르크 하던 빵 한 덩어리가 1923년말에 2,000(200,000,000,000) 마르크로 뛰어 올랐다. 성실한 사람이 차곡차곡 쌓아둔 은행예금은 휴지조각이 된 반면에 술주정뱅이가 쌓아둔 빈 병 가격이 더 비쌌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전승국인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 정부가 전쟁배상금을 갚지 않기 위해 일부러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1919년에 낸 저서 평화의 경제적 결말’(The Economic Consequences)에서 연합국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머지 않아 베당금을 중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패전국에게 엄청난 규모의 배상금을 물리면 복수심에 불타 절치부심하다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연합국은 배상금으로 받았던 것 이상의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19215월 연합국이 배상금을 요구하기 이전부터 불거졌다. 1914년 전쟁 발발과 동시에 빌헬름 2세의 독일제국은 의회의 동의를 얻어 금본위제도를 포기하고 채권발행을 통해 전쟁비용을 조달했다. 중앙은행인 제국은행은 재무부가 발행한 전쟁채권을 사들이면서 지폐를 발행했다. 1914년말에 총통화량이 60억 마르크로 늘어났고, 전쟁이 끝난 1918년말엔 330억 마르크로 치솟았다. 전쟁을 치른 4년반 사이에 지폐유통량이 9배나 늘어 났다.

독일 제국이 개전 초기에 이처럼 채권 발행을 늘린 것은 단기전으로 전쟁에 이겨 패전국에게서 배상금을 받아 갚으면 된다는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고 독일은 애초 기대와 달리 패전했다. 오히려 배상금을 물어야 할 입장으로 바뀌었다. 독일 마르크와 미국 달러의 환율은 전쟁전인 19144.2에서 전쟁후 1918년에 7.9로 상승했다. 마르크화 지폐를 많이 발행한 탓이다.

종전 후 권력을 잡은 사회민주당은 국민들에게 각종 복지혜택을 약속하고, 이를 지폐 발행으로 메웠다. 좌파세력들은 인플레이션이 가난한 사람들의 부를 빼앗아간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마르크화의 달러 교환비율은 1921년 상반기에 90까지 치솟았다. 마르크화의 가치가 폭락한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바이마르 정부는 세수로 지출을 충당할수 있었다.

 

하이퍼인플레이션 시기의 독일 제국은행의 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하이퍼인플레이션 시기의 독일 제국은행의 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1921년 서방의 연합국이 독일의 전쟁배상금 액수를 1,320억 마르크로 결정하고 상환을 요구했다. 거리의 선동가들은 이 금액이 독일 전체자산의 절반에 해당한다며 상환 거부를 주장했다. 독일 정부는 처음엔 배상금 요구를 거부했지만 연합국들이 해상을 봉쇄해 식량공급을 중단시키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수용했다. 조건은 연간 20억 금마르크 지불에 수출액의 26%를 내주는 것이었다.

연합국은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속하게 하락했기 때문에 지폐 대신에 금 또는 금으로 교환(태환)되는 외국환으로 갚을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 중에 금본위제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당시 금본위제를 유지하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독일은 전비를 충당하느라 금을 다 썼다. 배상금을 만드는 방법은 한 가지, 마르크 지폐를 달러화로 교환하는 길이었다.

독일 정부는 19216월부터 전쟁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제국은행 조폐창의 인쇄기를 빠르게 가동시켰다. 1921년 하반기에 새로 찍어낸 지폐는 400억 마르크였다. 이 지폐를 달러로 바꿔 배상금을 갚았다. 이 때부터 마르크화의 환율은 급격하게 붕괴된다. 1921년말 마르크 환율은 1달러당 174로 치솟았다. 마르크화 환율은 전쟁전보다 43배 폭등하고, 가치는 그에 반비례해 폭락했다.

 

1치 대전 전후 독일 지폐 마르크화와 금 마르크화의 가치 추이 /위키피디아
1치 대전 전후 독일 지폐 마르크화와 금 마르크화의 가치 추이 /위키피디아

 

상황이 악화되자 19221월 칸에서 열린 배상금위원회에서 독일은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배상금 지불 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레몽 푸엥카레(Raymond Poincaré) 총리는 독일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매주 3,100만 마르크를 내라고 요구했다. 독일이 사정사정하고 미국이 거들어 매달 6,000 마르크에 12,000마르크 어치의 현물로 지불하는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19227월까지 배상금 지불이 계속되었다. 독일내 지출은 세수로 거의 충당되었지만 배상금은 갚아나갈 방법이 없었다. 지폐를 찍어 달러로 교환하는 방법을 계속했다. 그해 11,225억 마르크이던 지폐총량이 7월말에는 2,026억 마르크로 급증했다. 800만 마르크의 지폐가 외환시장에서 달러로 교환되었다. 마르크의 달러 환율은 174에서 770으로 치솟았다. 전쟁 전에 1마르크 가치는 미국 돈 기준으로 20센트였는데, 19227월에 35분의1센트로 하락했다. 1914년에 10 마르크를 주면 살수 있던 신발이 이제는 1,000 마르크로 올랐다.

 

1922년 하반기부터 마르크는 자유낙하했다. 사람들은 돈을 보유하려 하지 않았다. 은행에 있는 돈을 모두 인출해 물건 사재기에 나섰다. 가격이 올라가지 전에 사두려는 건 인간 본연의 심리다. 화폐의 유통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재화의 가격은 일제히 가파른 상승세를 그렸다. 투기꾼도 몰리고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1922년말 7,400 마르크가 1달러와 교환되었다.

극심한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1922년말에 중도우파의 쿠노(Wilhelm Cuno)가 총리에 올라 더 이상 배상금을 지불할수 없다며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선언했다. 이에 1923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강제로 받기 위해 군대를 투입해 독일 최대공업지대이자 탄전지대인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쿠노 정부는 루르 지역의 주민들에게 소극적 저항을 지시했고, 이에 루르 노동자들이 프랑스와 벨기에군에 저항해 장기 파업에 돌입했다. 쿠노 정부는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돈을 찍어 냈다.

 

1923년 독일의 인플레이션은 세계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해 10월에 마르크화의 환율은 1달러당 120억 마르크에 도달했다. 전차표 한 장을 구입하기 위해 지폐 다발을 유모차에 싣고 가야 했다.

제국은행 조폐창의 인쇄기에 한계가 드러나자 정부는 민간 인쇄업자에게 인쇄를 맡겼다. 200개의 인쇄공장이 풀가동해서 돈을 찍어 냈다. 화폐를 찍기 위해 종이와 잉크를 사는 비용이 화폐의 액면 가격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독일 마르크화는 휴지 조각의 가치도 없었다. 사람들은 지폐를 난로에 불을 지피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왜냐, 지폐로 살수 있는 석탄보다 열량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폐는 다발로 묶여 어린이들의 집짓기 장난감이 되었다. 액면 가격이 수백억 또는 1조 마르크인 지폐가 유통되었다.

 

1923년 10월 100만 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1923년 10월 100만 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와중에도 돈을 버는 사람이 있었다. 기업가 후고 스티네스(Hugo Stinnes)는 은행에서 엄청난 돈을 빌려 쓰러져 가는 공장과 광산을 사들여 큰 부자가 되었다.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그가 빌린 돈은 잠깐의 사이에 제로에 가깝게 줄어들었고 인건비와 제조비용도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은 봉급생활자, 연금생활자를 가난하게 하지만 차입을 통해 기업을 확장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1923년 스티네스의 기업 가치는 독일 전체경제와 맞먹었다고 한다.

미국의 여류소설가 펄 벅(Pearl S. Buck)은 논픽션작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나’(How It Happens: Talk about the German People)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 시기 독일인의 진술을 정리해 두었다.

우리는 속았다. 우리는 독일인 모두가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지는 경기는 세상에 없다. 인플레이션 기간의 승자는 대기업가나 융커 당원이었다. 패자는 노동자계급, 그리고 가장 많이 잃은 중산층이다. 위대한 승리자는 대기업이다. 인플레가 끝났을 때 대기업은 공장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크게 현대화시켰다. 부르주아 신문들은 그것을 독일 산업의 기적이라 불렀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독일 기업은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일어선 것이 아니라, 인플레 때문에 다시 부흥하게 된 것이다.”

 

1923년 화폐개혁으로 나온 2렌텐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1923년 화폐개혁으로 나온 2렌텐마르크 지폐 /위키피디아

 

프랑스가 원하던 대로 독일 경제는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 바이마르는 돈 찍기를 중단하느냐, 계속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인플레이션을 중단하면 대규모 파산과 실업 발생, 파업, 폭력, 반란이 일어난다. 돈을 계속 찍어내면 대외 채무에 파산을 선언해야 한다.

19238월에 우파 독일인민당 대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이 총리에 취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전략은 연합국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바짝 기는 것이었다. 두 번째 항복을 하면서 프랑스 이외의 연합국의 동정을 얻어 낸다는 전략이었다.

그는 우선 연합국에 대한 저항을 중지시켰다. 그때 마르크화는 1달러당 24,000 마르크였다.

그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도입했다. 연금은행(Rentenbank)의 이름을 딴 이 화폐는 제한적 통화정책과 긴축재정에 힘입어 국내외 신용을 얻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이 서서히 극복되었다.

이어 미국과 영국이 나서 프랑스를 설득해 19244월에 배상금 상환을 대폭 완화하는 도스 안(Dawes Plan)이 합의되었다. 배상금 지불에 숨통이 트이면서 전후 5년간 독일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서서히 걷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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