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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무솔리니에 자극받아 폭동 주도…냉담한 시민 빈응에 실패
히틀러의 부상①…뮌헨 비어홀 폭동
2020. 08. 07 by 김현민 기자

 

독일에서 나치당이 조직된 것은 종전 직후인 191915, 바이에른주 뮌헨에서였다.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독립성이 강한 영국(領國)이었고, 독일제국 시기엔 프로이센가 함께 5대 왕국의 하나로 대우받았다. 1차 대전 직후에 독일 최초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가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던 곳이다. 카톨릭 지역으로 보수성향이 강하고, 전후 혼란기에 독일 극우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지역에선 연방정부에서 독립해 오스트리아와 합쳐 남독일을 만들자는 주장도 나왔다.

안톤 드렉슬러 /위키피디아
안톤 드렉슬러 /위키피디아

 

이런 반골 지역에서 나치당이 조직되었다. 창당 주도자이자 초대 당수는 열쇠수리공 출신의 안톤 드렉슬러(Anton Drexler)였다. 그는 우파정당인 조국당(Fatherland Party)에도 가입한 전력이 있으며, 바이마르 정부와 베르사이유 조약을 반대하고 아리아족 우선주의, 반유대주의, 반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다. 초기에 당의 명칭을 독일노동자당(German Workers' Party)이라 했는데, 중산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창당 당시 당원은 60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노동자당과 접촉한 것은 우연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1차 대전이 터지자 바이에른에서 사병으로 지원해 4년간 서부전선에서 복무하다가 종전후 바이에른 주도인 뮌헨의 한 부대에 배치받았다. 그곳에서 히틀러는 교육선전부에 근무했고 뮌헨의 여러 정당의 정보를 정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9197월 히틀러는 상관의 지시로 독일노동자당을 정탐하다가 드렉슬러의 민족주의, 반자본주의, 반마르크스주의, 반유대주의 이념에 매료되었다.

191912월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했다. 당시 군인은 정당에 가입할수 없었지만 그의 상관들은 이를 허용했다. 이듬해 초 그는 당원번호 555번을 받았다. 그때 당원은 101명이었다.

히틀러는 뛰어난 웅변가였다. 그의 연설은 청중들을 끌어 모았다. 19202월 그의 연설에 2,000명의 군중이 모였고, 그는 25개 당강령을 제시하고 당의 이름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당명의 약칭인 나치(Nazi)가 여기서 등장한다. 히틀러는 나치의 상징인 오른꺽쇠 십자표시인 도형을 고안한다.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1920331일 그는 군에서 전역해 나치당에 전념했다. 전역할 때 그의 계급은 육군 하사였다.

그는 대중집회를 조직하고 연설을 통해 반정부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대중조작술이 뛰어났다. 19212월 집회에는 6,000명을 모았다. 그는 청중들의 동경과 희망을 한곳에 모아 매혹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구호를 외쳤다. 그는 적을 설정해 가혹하게 비판했다. 바이마르 정부는 그의 적이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는 전후 경제난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을 매혹시켰다. 노동자 농민에게 빵을 주겠다는 점에선 사회주의 구호와 일치했지만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배격했다. 소비에트혁명을 좌절된 바이에른에선 공산주의자들이 잠시나마 보여줬던 독재와 살인, 테러를 경험한 사람들은 국가사회주의에 공감했다. 히틀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사회주의를 내건 것은 노동대중의 머릿속에 잠재한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성적인 논리보다는 감성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당, 공산당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그의 논리는 대중 설득력이 있었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을수 있었다.

 

1921년 나치당 지도부가 또다른 민족정당인 독일사회주의당(German Socialist Party)과 합당을 시도했다. 이 당은 민족주의에서는 나치당과 이념을 같이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에 차이점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강하게 반발하며 탈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고의 웅변가가 빠지려 하자 소수 정당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당 지도부의 설득으로 히틀러는 나치당에 잔류했지만 합당은 무산되었다. 727일 실시된 당대표 선거에서 히틀러는 5331의 표결로 드렉슬러를 물리치고 나치당의 당수가 되었다.

히틀러는 자신에게 지도자(Führer)라는 호칭을 붙이게 하고, 당을 장악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사회주의와 유대인들은 191411월 독일군 패전의 원인이 된 등뒤에 칼을 꽃은범죄자였다.

 

나치 당의 배지 엔블렘 /위키피디아
나치 당의 배지 엔블렘 /위키피디아

 

1921년과 1922년에 나치당은 히틀러의 웅변에 힘입어 바이에른 주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했다. 나치당은 맥주집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다. 그곳에서는 돈 없는 사람도 맥주를 공짜로 얻어먹을수 있는 곳이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열변을 토하는 히틀러에 빠져들었다. 히틀러는 소년소녀들을 중심으로 청년조직을 만들어 전위부대로 삼았으며, 신문을 출간했다.

19231월 프랑스는 전쟁배상금을 현물로 받기 위해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분노에 찬 독일 국민들이 길거리로 뛰쳐 나왔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시민들을 옥죄었다.

정국도 혼란스러웠다. 라인 주의 배신자들은 프랑스 점령군의 후원을 받아 독일 연방에서 탈퇴할 움직임을 보였고, 작센과 튀링겐에서는 인민전선이 정권을 장악해 자체 군대를 모집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연방총리는 군대를 토입해 지방정부의 반란을 진입했다.

 

바이에른주에도 연방정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39월 바이에른주 총리 오이겐 폰 크닐링(Eugen von Knilling)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구스타프 폰 카르(Gustav von Kahr)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바이에른에 주둔하던 연방군이 베를린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주정부에 충성을 맹세했다. 카르는 바이에른의 질서를 회복한 다음 베를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르는 바이에른의 정무위원장(Staatskomissar)이 되어 주 경찰청장, 연방군의 사령관과 함께 삼두체제를 구성했다. 카르는 또 바이에른의 모든 우익정당들과 제휴를 모색했다. 여기에 나치당도 포함되었다.

 

이 무렵, 터키에서는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Ataturk)이 외국 점령군을 물리치고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히틀러는 터키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말을 존경했다. 그는 케말이 나의 스승이다, 케말의 첫 번째 제자가 무솔리니이고, 두 번째 제자가 나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특히 한해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로마 진군에 고무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9221022일 나폴리에서 검은셔츠 단원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퇴역장군, 정치 폭력배로 구성된 검은셔츠의 시위대가 로마로 접근해 오자 이탈리아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무솔리니는 총리직을 받아 파시스트 내각을 구성한다.

무솔리니의 집권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히틀러는 나치당을 동원해 바이에른주를 베를린으로 진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23년 11월 9일 비어홀 폭동 이후 뮌헨 점령을 시도하는 나치당원들 /위키피디아
1923년 11월 9일 비어홀 폭동 이후 뮌헨 점령을 시도하는 나치당원들 /위키피디아

 

히틀러의 나치당은 우선 우파가 집권하고 있는 바이에른주에서 쿠데타를 벌이기로 작당했다. 나치당은 그 무렵 1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SA와 같은 친위단체를 확보하고 있었다.

1923927일 히틀러는 바이에른주의 실권 삼인방에게 베를린 진군을 함께 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카르는 히틀러를 이용하려 했을뿐, 그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자적인 거사를 꾸몄다. 히틀러 진영엔 1차 대전 중에 독일군을 지휘한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 참모차장이 가담했다. 거사 장소로 맥주집으로 정했다. 당시 독일에는 비어가르텐이라는 대형맥주집이 성행했는데, 그곳에서 정치집회와 토론이 벌어졌다.

118일에는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라는 비어홀에서 공화국 혁명 5주년 기념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116일 참모들과 쿠데타를 결의하고 다음날 구체적인 계획을 짰다.

당일 오후 8, 비어홀에 3,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주지사 카르와 바이에른주 실력자들이 입장했다. 곧이어 815분 주지사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830분 군중을 헤치며 히틀러가 등장하고, SA 돌격대 600여명이 기관총으로 무장한채 비어홀을 점거했다. 히틀러는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며 국민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홀에는 우리 요원 600명이 포위했다. 아무도 나갈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베를린과 바이에른 정부는 지위를 잃었고 새 정부가 형성되었음을 선언했다.

히틀러는 나치 지도부를 동원해 주지사 카르 등 바이에른주 지도부를 옆방으로 끌고가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반란 지원을 요구했다. 루덴도르프 장군의 중재로 카르의 협력을 약속받아냈다. 이때가지만 해도 쿠데타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카르를 비롯해 주정부 요인들은 그날밤 주방을 통해 도망쳤다. 날짜가 바뀌어 9일 새벽 3, 카르는 반란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나치는 9일 비어홀에 모인 2,000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뮌헨 시내로 진출했다. 그들은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도망친 바이에른 주정부 요인들이 경찰력을 동원에 진압에 나섰다. 쿠데타 주모자들은 대부분 탈주했다. 시위대는 14명이 죽고, 해산되었다. 히틀러는 숨었으나 이틀후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이에른의 군대는 연방정부의 명령을 따를 것을 맹세하고, 바이에른의 분리주의 움직임은 고비를 넘게 된다.

 

1924년 4월 1일 뮌헨 폭동 이후 재판을 기다리는 주동자들. (오른쪽 네 번째가 히틀러) /위키피디아
1924년 4월 1일 뮌헨 폭동 이후 재판을 기다리는 주동자들. (오른쪽 네 번째가 히틀러) /위키피디아

 

히틀러는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법정도 정치선전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쳤다. 독일 언론들은 그의 변론을 소개했다.

히틀러는 5년 금고형을 받았지만, 9개월 징역을 살다가 석방되었다. 그가 감옥에서 구술한 책이 나의 투쟁(Mein Kampf)이다. 뮌헨 비어홀 폭동(Beer Hall Putsch)은 실패했지만, 무명의 히틀러를 전국 무대로 도약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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