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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평화기에는 지지율 하락…젊은 층에게 민족주의 설파하며 지지 획득
히틀러의 부상②…바이마르 황금기의 나치
2020. 08. 10 by 김현민 기자

 

뮌헨 비어홀 폭동이 일어나자 바이에른 주는 나치당을 금지시켰다. 아돌프 히틀러와 폭동의 주모자들은 반역죄로 란츠베르크 감옥(Landsberg Prison)에 갇혔다. 히틀러는 5년형을 언도받았다. 간수들은 그를 잘 대우했다고 한다. 그의 감방은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했으며, 그는 감옥 안에서도 넥타이를 매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견했고, 지지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거나 개인비서를 두도록 허용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정견을 담은 나의 투쟁’(Mein Kampf)을 저술했다. 그가 구술하고 그의 부하 루돌프 헤스(Rudolf Hess)가 받아쓴 이 책은 나치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히틀러가 9개월간 갇혀 있던 란츠베르크 감옥 /위키피디아
히틀러가 9개월간 갇혀 있던 란츠베르크 감옥 /위키피디아

 

히틀러가 감옥살이를 하던 19246월에 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 나치 세력들은 국가사회주의자유운동(National Socialist Freedom Movement)이라는 위장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해 6.6%의 지지율을 획득하고 32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신생정당으로는 국민들에게서 비교적 높은 지지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7개월 뒤인 1924127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나치당은 3%밖에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의석도 18석을 잃은 14석으로 쪼그라 들었다. 이 무렵 독일에선 좌익과 우익의 폭동들이 대부분 진압되어 평화기에 접어들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도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모처럼 1차 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면서 독일인들 사이에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에 대한 관심이 떨어졌던 것이다.

 

집권 직전의 나치당 지지율과 의석 추이 /그래픽=김현민
집권 직전의 나치당 지지율과 의석 추이 /그래픽=김현민

 

히틀러는 19241220일 바이에른 주 대법원의 특별사면령으로 수감 9개월만에 석방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엔 바이마르 공화국이 안정을 찾아가고, 폭력적 형태의 정치운동이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갔다. 히틀러는 폭력이 아닌,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권을 차지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514, 히틀러는 바이에른주 총리 하인리히 헬트(Heinrich Held)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히틀러는 주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치 권력을 획득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만남을 계기로 바이에른 주는 나치당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를 해제했고, 나치당은 그해 226일 재창당된다. 하지만 다음날, 히틀러는 집회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했고, 이에 격분한 주 당국은 바이에른에서 그의 연설을 금지시켰다. 바이에른에서 그의 연설은 1927년까지 금지된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위키피디아
파울 폰 힌덴부르크 /위키피디아

 

19252월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죽었다. 그는 전쟁 동안에 군수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한 행위로 우파 민족주의 법관들에 의해 국가배반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법정을 들락거리다가 맹장염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사망했다. 이어 3(1)4(2)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전쟁 때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무소속으로 나와 2차 투표에서 1% 차로 간신히 승리했다. 힌덴부르크는 군주제 정당들의 지지를 업었으나 당선 후 군주제 복귀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나치당은 당세 확장에 나섰다. 여성도 당원으로 받아들였고, 히틀러의 친위대격인 SS(Schutzstaffel)도 창설했다. SS19254월 히틀러의 개인경호대로 출발했는데, 신체가 건강한 순수 아리아인 혈통으로 대원을 뽑았다. 대원들은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받았으며, 특톡한 휘장의 검은 제복을 입었다. 300명으로 출발한 SS대원은 1933년 나치 집권 당시 5만명이 넘었다.

나치 당은 히틀러를 정점으로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요세프 괴벨스(Joseph Goebbels),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을 지도부로 구축해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나치당의 이념은 젊은 층에 파급력이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청소년, 대학생들은 민족주의에 열광했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독일을 피폐하게 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독일인의 건강한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선동은 전후 극심한 가난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을 빨아들였다. 사회민주당이나 우파 정당들이 젊은층에게 소구하지 않는 가운데 나치는 미래세대를 공략했다는 점에서 기성정당보다 현대적이었다. 나치는 또 노동자보다는 농민에게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19285월 총선에서 2.6%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의석수도 12석으로 줄었다. 바이에른에서는 비교적 높은 5.1%의 지지율을 얻었는데, 이작은 지역정당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무렵 당원수는 13만명으로 늘어났다. 1929년 대공황이 없었더라면 나치당은 영원히 권력을 잡지 못한 채 소수 극우정당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와 SS 친위대 /위키피디아
히틀러와 SS 친위대 /위키피디아

 

1920년대 중반 이후 독일에선 나치당과 같은 극단적인 정치세력이 자리잡지 못할 정치·경제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1923년말 렌텐마르크가 도입된 후 살인적 인플레이션도 잡혔고, 1924년 미국의 중재 하에 타협한 도스안(Dawes Plan)으로 전쟁배상금 부담이 한결 완화되었다. 1924~1929년 사이에 독일의 총생산량은 50%나 증가하며 놀라운 회복세를 보였고, 많은 산업분야가 전쟁 전에 세계시장에서 차지했던 우세한 입지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쾰른~본 사이의 아우토반(Autobahn)이 개통되어 세계최초의 고속도로 시대를 열었고, 초고속열차가 베를린에서 함부르크까지 2시간만에 주파했다.

외교관계도 비교적 순탄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Gustav Stresemann)은 총리를 102일만에 그만두고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외무장관을 오래 역임하면서 실타래처럼 얽혔던 유럽문제를 풀어나갔다. 그의 외교전략은 베르사이유 조약을 갱신해 독일이 유럽 외교무대에 다시 나서도록 한다는 것이다.

슈트레제만은 192510월 프랑스·벨기에와 로카르노 조약(Locarno Treaties)을 맺어 국경문제를 매듭지었다. 이 조약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가 국경지대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상호안정보장조약으로, 영국과 이탈리아가 이를 보장하도록 했다. 이 조약에 힘입어 1926년 독일은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소련과도 관계개선에 나섰다. 1926년 슈트레제만은 소련과 베를린 조약을 체결해 한 나라가 다른 제3국의 침략을 받으면 다른 나라가 중립을 지킨다는 상호중립보장안을 약속했다. 소련은 서방국가들이 독일과 힘을 합쳐 모스크바를 쳐들어가는 악몽에서 벗어났고, 독일도 프랑스와 소련이 동맹을 맺는 가정에서 해방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황금의 1920년대라고 불렀다.

 

1929년 뉘렘베르크의 SA돌격대 /위키피디아
1929년 뉘렘베르크의 SA돌격대 /위키피디아

 

평화기에 나치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19285월 총선에서 패배하자,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를 각인시키는 전략에 돌입했다. 그는 공산당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국민들에게 반공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나치의 돌격대 SA(Sturmabteilung)는 베를린의 공산당사를 향해 행진하다가 공산당의 준군사조직인 로트프론트(Rotfront)와 충돌했다. 19293월 대통령 선거에 1차 대전 기간에 참모차장을 맡았던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를 내보냈다. 루덴도르프는 1%의 지지밖에 얻지 못해 전쟁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힌덴부르크에게 참패했다.

1929년 여름 공산당 돌격대가 히틀러의 연설을 방해하자 나치 SA가 반격을 가해 2명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SA는 다시 공산당 집회를 방해하고 베를린의 공산당 당사를 공격했다. 10월에 괴벨스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베를린의 공산당 본부를 습격해 양측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192910월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주가가 폭락하며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대공황은 히틀러와 같은 광신도가 선동하기에 좋은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대공황은 이제 갓 안정을 되찾은 독일 경제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히틀러는 유대인 자본이 속임수로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선동했다. 유권자들은 그의 말에 귀를 열었다. 19309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나치당은 107(8.25%)을 얻어 제2당으로 급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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