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공황과 전쟁
1932년 두 번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1933년 나치 집권하다
히틀러의 부상④…바이마르 공화국의 종언
2020. 08. 12 by 김현민 기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합법적 공간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 공간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공한 민주주의라는 제도였다.

대공황 3년째인 1932, 독일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좌익과 우익은 첨예하게 대결했다.

19324월 히틀러를 꺾고 재선에 성공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를 경질하고 중앙당 의원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신임총리에 앉혔다. 파펜을 총리로 옹립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육군참모총장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였다.

파펜은 베스트팔렌 귀족 출신이었다. 그의 내각은 주로 귀족과 대토지소유자들로 구성돼 남작의 내각이라 불리었다. 파펜은 자본가와 융커(Junker)로 불리는 지주계급을 대변하며 우파노선을 걸었다. 나치 돌격대(SA)에 대한 전임 브뤼닝 총리의 규제를 해제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나치 SA1932년말에 200만을 헤아렸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정당이 거의 없었다. 중앙당마저 브뤼닝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파펜은 육군 참모총장인 슐라이허를 국방장관에 임명하고 사회민주당-중앙당 연합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프로이센을 제압할 계획을 꾸몄다. 프로이센은 독일연방의 3분의2를 차지하는 최대 주()였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동의를 얻어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프로이센의 총리와 장관들을 축출하고 내각을 해체시켰다. 이에 프로이센 주정부는 헌법소원을 제기하며 중앙정부와 법적 공방을 벌이는 사태가 빚어졌다.

 

1932년말의 나치 돌격대 /위키피디아
1932년말의 나치 돌격대 /위키피디아

 

이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파펜은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신임을 물었다. 1932731일 실시된 총선은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나치당이 37.27%의 지지를 얻어 123석을 더한 230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나치의 대승은 중산층이 대거 지지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은 21.58%(133)을 얻어 2위로 쳐졌고, 공산당 14.32%(89), 중앙당 12.44%(75), 독일국가인민당 5.91%(37), 바이에른인민당 3.23%(22)의 순이었다.

 

1932년 7월 독일 총선 판도 /위키피디아
1932년 7월 독일 총선 판도 /위키피디아

 

히틀러가 정국을 흔들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나치가 2, 3, 4당 중 어느 당과 합세해도 권력을 쥐게 된다. 나치당 내 좌파는 사회당과의 연정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히틀러는 좌파와 손잡지 않겠다고 밝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을 총리로 지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부했다. 나치 이외의 정당에서도 과반을 넘는 연정 구성에 실패했다.

나치당과 공산당은 사사건건 파펜의 정책을 반대했다. 파펜은 극우와 극좌의 정당이 연합해 자신을 실각시킬 것을 우려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다시 실시했다.

1932116일 실시된 총선에서 나치당은 33.1% 지지로 196석을 차지, 1당은 유지했지만 7개월 전보다 34석을 잃었다.

또다시 어느 정당이 연정을 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군부를 대표하는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자신이 총리가 되겠다고 설득했다. 파펜은 슐라이허의 배신으로 6개월만에 총리에서 쫓겨났고, 그해 12월 슐라이허가 군부의 지지를 업고 총리가 되었다.

 

슐라이허는 나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총리를 맡고 히틀러에게 부총리의 자리를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히틀러가 거부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당의 내부를 흔들었다. 그는 나치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히틀러의 경쟁자 위치에 있던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를 물밑 접촉을 통해 지기 편을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노회한 히틀러는 슈트라서의 반란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고 무산시켜 버렸다. 슐라이허는 사회민주당 노조를 접촉했지만 사민당이 슐라이허의 시도를 차단해 버렸다.

슐라이허는 마지막으로 힌덴부르크에게 의회를 해산하자고 했지만 대통령은 자꾸만 총선을 치르는 것에 반대했다. 결국 슐라이허는 1933128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최단명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임했다.

 

1932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위키피디아
1932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 /위키피디아

 

힌덴부르크 대통령으로선 이제 막다른 골목이었다. 총선을 다시 치르자니 정치적 부담이 컸고, 히틀러를 총리로 받아들이자니 마뜩치 않았다. 참모총장 출신인 힌덴부르크는 하사 출신의 히틀러를 깔보고 있었다. 게다가 나치 돌격대의 폭력행동에 염증을 느꼈다.

이 무렵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Oskar von Hindenburg)를 접촉해 그동안의 탈세 사실과 토지 불법취득을 경고하며 협박과 회유를 했다.

파펜 전 총리가 히틀러에게 접근해왔다. 파펜은 자신을 밀어낸 슐라이허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 파펜은 히틀러가 총리를 맡고, 자신이 부총리를 하는 방안을 히틀러에게 제시했다. 파펜은 또 우익 민족정당을 표방하는 인민당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와 협상을 벌여 연립내각에 참여할 것을 설득했다.

그래도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슐라이허가 군부를 부추겨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이 돌았다.

파펜이 힌덴부르크 설득에 나섰다. 파펜은 자신의 정치공학을 설명했다. 최근 추세로 보면 나치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으며, 내각에 11명의 장관 중 3명을 나치에게 배당하기로 했으므로 히틀러가 총리를 맡더라도 힘이 빠질 것이라고 했다. 80대 중반의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정신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파펜의 현란한 말재주에 넘어갔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총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331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마침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총리 아래에 파펜이 부총리를 맡고, 나치 당원 가운데 빌헬름 프리크가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장관을 맡았다. 나치 추종자들은 열광했지만,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종말을 고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1933년 3월 21일 힌덴부르크 데통령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히틀러 /위키피디아
1933년 3월 21일 힌덴부르크 데통령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히틀러 /위키피디아

 

독일의 나치 집권에 대한 연구들이 많다. 이중에서도 2차대전 승전국의 학자들이 내놓은 견해가 지배적이다. 독일 학자들도 독재정권 허용에 대한 반성으로 비판적 입장에 서 있다.

그렇다면 왜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등장했을까. 승전국들의 책임은 없을까.

1차 대전의 승전국, 특히 프랑스가 패전국 독일을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물렸고, 그에 따른 민족적 감정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결국은 하사 출신의 극우주의자를 독재자로 옹립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1차 대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받은 프랑스는 알사스와 로렌 등 독일 영토를 점령해 자원을 가져갔고, 과도한 배상금 상환을 압박했다.

배상금 상환에 쫓기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무제한으로 통화를 찍어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고, 독일에 공산 혁명의 기운이 불었다.

좌냐, 우냐의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좌파적 경향을 가미한 민족주의를 주창한 것이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이고, 나치였다.

독일 나치주의는 민주주의라는 토양에서 급성장했다. 1차 대전후 패전국 독일은 당시로는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을 채택했는데, 이 민주 헌법을 활용해 나치는 의회권력을 장악하고, 좌파의 분열을 이용해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집권한 다음 히틀러의 나치 정부는 곧바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폐기해 버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