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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8.5~9.0의 강진에 쓰나미, 화재로 3~4만 사망…지질학 탄생의 계기
1755 리스본 대지진…재난 수습의 모범 사례
2020. 08. 27 by 김현민 기자

 

그날은 카톨릭 만성절(萬聖節)이었다.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날(Feast of All Saints)이어서 카톨릭 신자는 모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었다.

1755111일 만성절을 맞아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는 왕비와 함께 일찌감치 미사를 마치고 별장으로 떠났다. 상류층과 귀족들도 국왕의 눈치를 보며 일찌감치 성당을 찾은 후 교외로 빠져나갔다. 오전 9시 신도들은 수도 리스본의 여러 성당에 빽빽이 밀려들었다.

 

오전 940분 첫 지진파 달쳐왔고, 이어 3분동안 두차례 지진이 찾아왔다. 940분 큰 지진이 밀려왔고, 리스본 도심에 너비 5m의 균열이 생겼다.

리스본 성장의 바닥이 흔들려 파이프오르간이 저절로 울리더니 굉음이 성가대의 합창소리를 덮고 땅이 솟구쳤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을 그린 동판화 /위키피디아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을 그린 동판화 /위키피디아

 

리스본에 살고 있던 영국 목사 찰스 데이비(Charles Davy)는 당시의 기록을 남겼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는데 탁자가 약하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집이 토대부터 흔들렸다. 처음에는 마차가 지나가며 덜컹 거리는 소리인줄 알았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땅 속 멀리서 우르릉 대는 천둥소리 같은 이상하고 무서운 소음이 나고, 집이 흔들리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데는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무너지는 건물을 피해 도망치던 사람들은 탁 트인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고 부둣가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바닥이 드러나고 배들이 좌초할 정도로 물이 빠져나간 바다였다. 지진이 덮친후 약 40분 뒤, 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로 쇄도했고, 강을 따라 역류했다. 말을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박차를 가했다. 해일이 두 번 더 왔다.

지진으로 교회 촛불이 넘어지면서 화재가 났다. 화재는 리스본 시가지를 5일 밤낮으로 불태웠다.

재앙은 리스본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포르투갈 남부 해안인 알가르브(Algarve) 거의 모든 해안도시 및 촌락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라구스(Lagos)에서는 파도가 도시 성곽 꼭대기에 다다랐다. 프니치와 카스카이스를 비롯한 다른 포르투갈 지역들도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는 내륙도시인 쿠빌라(Covilhã)도 영향을 받았다. 지진의 충격파로 인해 쿠빌라의 성벽과 높은 탑들이 무너졌다. 마데이라 제도에서도 정착지들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고, 아조레스 제도의 거의 모든 항구가 해일로 파괴되었고, 바닷물은 내륙 150 미터까지 육박했다.

 

지진의 충격파는 전 유럽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남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 북으로는 핀란드에도 느껴졌고, 북아프리카에 이르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에도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높이 20m의 해일이 북아프리카 해안을 휩쓸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마르티니크와 바베이도스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남부 콘월에는 높이 3미터의 해일이 찾아왔고, 아일랜드 서해안의 골웨이에서도 해일로 도시 성곽 일부가 파괴되었다. 아일랜드 남해안 킨세일에서는 선박 여러 척이 항구 안으로 굴러들어오고 시내의 장터에 물이 들어찼다.

 

리스본 대지진의 진앙지 /위키피디아
리스본 대지진의 진앙지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에서는 지진에 갈라지고 쓰나미가 밀려오고, 화재가 나면서 3~4만명이 사망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가 3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인구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의 기록으로 추정하면 지진강도는 진도 8.5~9.0으로 추정된다. 진앙지는 상비센트 곶 서남쪽으로 약 200 킬로미터 지점 대서양 해역으로 비정한다. 이 지진을 계기로 유럽에서는 지질학의 개념이 생기게 된다.

 

리스본 대지진(Lisbon earthquake)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였고, 그날은 마침 만성절 축일이었다. 지진이 휩쓸고 간 뒤 리스본의 교회들은 모두 파괴되었다. 신학자들은 지진의 종교적 원인과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신의 천벌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계몽철학자들은 교회는 무너졌지지만 리스본의 홍등가는 지진을 피해갔다며 코웃음쳤다.

당대의 볼테르(Voltaire)는 이렇게 말했다.

피 흘리고 찢겨 어머니의 가슴에 누운 어린 생명들이 무슨 죄를 품었단 말인가. 멸망한 리스본이 런던, 파리, 마드리드보다 유독 악에 깊이 젖어 있었단 말인가.”

 

포르투갈 교회도 어느 때처럼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신도들의 본노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민란을 우려한 포르투갈 정부도 교회에 응징론을 피해달라고 주문했다. 결국 교회는 재앙과 신의 섭리는 상관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리스본에서 발생한 재앙은 종교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좁히고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당장 지진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지질학이라는 학문이 새로 생겼다. 18세기 중반 이후 발명과 기술개발이 잇따르고 각종 사상과 학문이 급성장하는 가운데 산업혁명이 순식간에 미친 것도 종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사회적 분위기 덕분이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의 파장 /위키피디아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의 파장 /위키피디아

 

리스본 대지진에서 탁월하게 평가할 것은 재난 대응이었다. 국왕 주제 1세는 지진의 공포에 질려 폐소공포증에 걸렸다. 그는 리스본 교외의 아주다 언덕에 텐트와 정자를 만들고 그곳을 궁전 대신 삼았다. 그는 국정을 외무장관이던 드카르발류(Sebastião José de Carvalho)에게 맡겼다.

국왕은 드카르발류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심판을 내렸소.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오.”

재상 드카르발류 /위키피디아
재상 드카르발류 /위키피디아

 

드카르발류는 대답했다. “폐하, 죽은 자는 묻고 산자는 먹이면 됩니다.” 그는 곧바로 국왕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재난 수습에 나섰다.

리스본 시민들이 너나할 것 없이 도시를 떠나려 했다. 드카르발류는 리스본 경계에 군대를 배치해 몸이 성한 주민들이 리스본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는 건장한 사람들을 모아 도시 안에 머물게 하면서 지진과 쓰나미의 잔해를 제거하고 피난처를 짓게 했다. 약탈을 막기 위해 도시의 높은 곳에 교수대를 세웠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교수대에 매달았다. 한달 사이에 30면이 처형당했.k

드카르발류는 질서를 유지하고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200개의 법령을 공포했다. 급하게 법령을 발표하느라, 무릎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써서 명령을 내렸다.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피난처와 음식을 마련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재난을 틈탄 물가 인상을 금지했다. 학교와 교회를 다시 세웠다. 오늘날 재난 매뉴얼과 다를게 없는 일 처리였다. 그는 예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체들이 부패하기 전에 바지선에 실어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했다.

건축가 마누엘 다 마아디(Manuel da Maia)의 건의에 따라 리스본 시내는 완전히 쓸어버리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도시를 지었다.

국왕은 드카르발류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는 무너진 곳에 새로운 건물을 세울 때 유럽 최초로 내진성을 강화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드카르발류의 귀족 작호를 따 폼발 양식(Pombaline style)이라고 했다.

도시의 잔해는 10년 안에 모두 정리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대지진의 아픔을 잊고 커다란 광장, 직선형 대로, 넓은 거리 등을 조성해 신생 리스본을 질서정연한 도시로 만들었다.

 

리스본 카르모 수녀원의 1755년 대지진 흔적 /위키피디아
리스본 카르모 수녀원의 1755년 대지진 흔적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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