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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스페인 추방 후 브뤼헤, 앤트워프, 암스테르담으로 이동…근대자본주의 선구
16~17C 유대인, 유럽 무역과 금융업 장악하다
2020. 08. 28 by 김현민 기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16세기에 유럽의 여러 해안도시에 정착했다. 그들은 사업과 안전이라는 두 가지를 보장하는 곳이면 어디에든 정착했다. 브뤼헤(벨기에), 앤트워프(벨기에), 암스테르담(네덜란드), 런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 함부르크(독일)에 그들의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결혼 또는 유대인 길드를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유대인들은 해운과 무역, 어업에 종사했다. 이들을 항구의 유대인’(Port Jew)이라 명명되었다.

 

16~18세기 유럽에선 중상주의(Mercantiism)의 시대가 열렸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상인을 천시했기 때문에 상업은 유대인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종족간 단결력이 높기 때문에 유럽 전역에 상거래망을 형성했다.

플랑드르(벨기에)의 브뤼헤(Bruges)에는 영국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정착한 곳이다. 1290년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유대인 대부업자 1만여명을 추방함에 따라 그들은 해협을 건너 브뤼헤에 정착했다. 브뤼헤 유대인들은 모직물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영국산 양모를 들여와 유통시키고 모직물의 질을 한층 높여 이탈리아 모직 업자들과 경쟁했다.

1492년 스페인의 알함브라 칙령에 의해 추방된 유대인들은 동족이 살고 있는 브뤼헤로 대거 몰려 왔다.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들이 오면서 브뤼헤는 유럽 최고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스페인산 양모와 피혁, 천일염 등을 수입해 거래했고, 바스크 지방의 철과 남부의 과일, 올리브, , 포도주를 취급했다. 커피도 거래했다.

브뤼헤의 유대 무역상들은 범위를 넓혀 발트해 연안에 플랑드르산 아마, 모직물, 프랑스산 포도주, 독일 맥주를 수출했다. 하지만 브뤼헤는 츠빈 강의 수로가 바닷물이 들어와 침전물로 막히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들은 플랑드르의 또다른 항구도시 앤트워프로 발길을 돌렸다.

 

벨기에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상가 거리 /위키피디아
벨기에 앤트워프의 다이아몬드 상가 거리 /위키피디아

 

브뤼헤에 살던 유대인들은 거의 모두 앤트워프(Antwerp)로 넘어갔다.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다루던 상품 외에 인도산 향신료와 금은 보석과 다이아몬드를 거래했다. 당시로선 최고가 품목들이었다.

스페인에 추방될 때 유대인들에게 금과 은의 반출은 금지되었지만, 보석 반출은 허용되었다. 그들은 가져온 보석을 바탕으로 보석상을 열었다. 앤트워프는 국제보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거래가 가장 많은 이윤을 남겼다. 유대인들은 인도로 간 유대인들과 협력해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가공해 팔았다. 지금도 앤트워프는 전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84%가 집결되어 가공되고 있으며, 그 산업의 주류를 유대인들이 이어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보석 거래에서 번 돈으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협조했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북유럽의 타르(역청)에서 호밀, 스페인의, 양모 소금 포도주 울리브기름 등을 거래했다. 신상품으로 부상한 커피와 차 코코아 담배 설탕도 주요 거래 품목이었다.

유대인들은 생산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중계무역에 주력했다. 그들은 당시 아메리카, 인도의 신세계에서 들어오는 상품을 거래했다. 무역업은 금융산업으로 확대되었다. 유대인들은 처음엔 담보 금융을 했지만, 점차 신용대출을 상품 거래와 연계시켰다.

유대인들은 앤트워프에서 환어음 시장을 개척했다. 신용대출 시장을 확대해 3개월에 2~3%, 1년에 8~12%의 이자를 붙여 유통시켰다. 돈이 돈을 버는 금융은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의 또다른 업종으로 성장했다.

유대인들이 몰려 오면서 16세기 앤트워프의 인구는 2만에서 5만명으로 팽창했고, 도시 인구의 절반이 유대인들이었다.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가 유럽 최초로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들을 격리시키자 베네치아 유대상인들은 대거 앤트워프로 이동해왔다. 16세기초 앤트워프는 세계 교역량의 40%치지하는 최대 무역도시가 되었다.

 

앤트워프의 번영은 스페인에 의해 종언을 고했다. 당시 앤트워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령이었는데,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신교를 지지했다. 스페인은 오랜 전쟁에 국가부도를 선언하고 군인에게 줄 봉급도 모자랐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앤트워프의 부를 탐냈다. 국왕의 명령을 받은 스페인군은 157611월 앤트워프를 포위하고 시민 7,000명을 학살했다. 이 학살 사건 이후 앤트워프의 금융 및 무역 센터 기능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전하게 되고, 유대인들도 암스테르담으로 건너갔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청어 염장 공장 /위키피디아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청어 염장 공장 /위키피디아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다. 유럽 전역의 종교 난민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암스테르담은 합스부르크령 앤트워프의 기능을 흡수해 유럽 최대항구로 성장했고, 유대인들은 16세기말에 암스테르담 상권을 장악했다.

14세기부터 스칸디나비아 발트에서 잡히던 청어가 해류의 변화로 네덜란드 연안까지 남하하는 기상이변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청어잡이에 나섰다. 네덜란드에서는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소금에 절여 오래 보관하는 염장법이 개발되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염장 청어는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유대인들은 청어 염장에 눈을 돌렸다. 염장법에는 대량이 소금이 소요되었다. 당시 소금은 독일과 폴란드 암염 광산에서 생산된 소금이 수입되었는데 비쌌다. 유대인들은 무역망을 통해 스페인 천일염을 수입해 왔다. 천일염이 암염보다 값도 쌌고 염장에는 효과적이었다. 청어 열풍에 유대인들은 소금 수입을 통해 돈을 버는 탁월한 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소금산업을 장악했다. 그들은 천일염을 한번 더 가공해 정제염을 만들어 냈다. 정제염은 순도가 높고 모양과 색깔이 고와 고객들의 요구에 부합했다. 고급 요리에 유대인들이 공급하는 질 높은 정제염이 사용되었고, 정제염은 유럽인의 식탁에 널리 보급되었다.

 

1600년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위키피디아
1600년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위키피디아

 

유대인들이 네덜란드에 기여한 결정적인 것은 근대자본주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최초의 주식회사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해양무역에 나섰다.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획기적인 발상을 했다. 동인도회사 주식이 활발하게 거래되자 유대인들은 신주를 발행해 대규모 자본을 끌어들일 구상을 했다. 그 구상은 1608년 세계최초의 증권거래소를 설립하는 기초가 된다. 동인도회사는 이익을 내지 못할 때에도 증권거래소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수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도 유대인들이 견제를 받았다. 유대인들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1632년 유데인의 길드 가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상품의 제조에서는 쫓겨났지만 금융, 의사, 출반등에서 삶을 영위할 수는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돈이 많다는 소문이 돌면서 항상 강탈과 납치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췄다.

이런 제약이 무기명 채권이라는 금융상품을 개발하는 동기기 되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국제거래를 할 때 문서에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다가 가명도 쓰지 않는 채권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무기명 채권이다. 그들은 항상 위협 속에 살았기 때문에 언제든 추방될 경우 환어음이든 무기명수표를 들고 갈 필요가 있었다.

네덜란드 유대인들은 무역과 금융에서 돈을 번 것 이외에 출판업에도 참여했다. 그것은 순수히 유대교를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유대 경전인 토라탈무드를 인쇄해 그들은 자손들에게 유대교를 가르치곻 유대인임을 잊지 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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