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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1656년 재입국 허용…영란은행 창설에도 기여, 런던금융시장 장악
영국 유대인, 런던을 세계금융 중심지로 만들다
2020. 08. 30 by 김현민 기자

 

영국에서 유대인은 노르망디공 윌리엄 1세가 1066년 영국을 정복할 때 유대인 상인과 의사를 데리고 간 것을 시발점으로 한다.

이후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 상인들이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한 법령을 어겼다는 게 이유였다. 이때 영국에서 쫓겨난 유대인이 4,000~16,000명으로 추산된다.

이후 유대인들은 간헐적으로 영국에 입국했다. 그들은 유대인 신분을 감추거나 기독교로 개종한 마라노(marrano)였다. 마라노들은 브리스톨에 거주지를 형성하고 대륙의 유대인들과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마나세 벤 이스라엘 /위키피디아
마나세 벤 이스라엘 /위키피디아

 

영국에서 유대인의 재입국이 허용된 것은 청교도혁명 시기인 1656년에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서였다.

크롬웰은 항해조례를 반포해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했다.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은 암스테르담 이외의 피난처를 찾아 나섰다. 그 대상지가 스웨덴과 영국이었다. 그들은 대표단을 뽑아 스웨덴과 영국과 접촉하기로 했는데, 대표에 랍비 마나세 벤 이스라엘(Manasseh Ben Israel)이 선정되었다. 미나세는 스웨덴 여왕과 영국 크롬웰에게 유대인 재입국을 허용해달라고 청원을 넣었다.

크롬웰이 선수를 쳤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경제적 부를 거머쥐고 있는 유대상인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미나세는 1655년 크롬웰을 만나 격렬한 토론을 벌여 유대인의 재입국을 설득했다.

이듬해 크롬웰은 내각과 상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인 재입국을 허용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추방된지 360여년만에 영국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된다.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집단으로 도버해협을 건넜다.

미나세가 주도하는 유대 금융인들은 크롬웰에게 전쟁 비용을 제공하며 적극 도왔다. 크롬웰은 상인들에게 중상주의 정책으로 보답하고, 런던 도심에 2.6넓이의 땅에 특별금융구역으로 지정했다. 그곳이 오늘날 런던금융가 더시티(The City). 더시티는 유대 금융인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런던 금융중심지 더 시티 /위키피디아
런던 금융중심지 더 시티 /위키피디아

 

168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윌리엄 3세와 메리의 부부가 군대를 이끌고 명예혁명을 일으키고 왕권을 장악했을 때 네덜란드의 금융인들이 따라갔고, 유대인들도 합류했다. 이때 윌리엄 왕을 따라 영국에 들어간 유대인은 세파르디(Sephardi) 유대인 3,000명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 5,000명 등 도합 8,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윌리엄 3세를 따라온 유대 금융인들은 네덜란드의 자본주의 사업방식을 그대로 영국에 이식시켰다. 윌리엄과 메리 부부 왕은 권리장전과 관용법을 받아들여 비국교도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덕분에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영국 주류사회에 진입할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의 금융산업 발전과 산업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중 이삭 페레이라(Isaac Pereyra)는 영국 병참부 장관이 되어 1690년에 막대한 선박 건조비용과 군수품 조달을 성사시켰다. 그는 그 비용 95천 파운드의 돈도 무사히 되돌려 받았다.

또 대표적인 경제학자가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를 들수 있다. 그의 아버지 에이브러햄 리카도(Abraham Ricardo)는 런던 증권거래소 중개인이었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증권거래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리카도는 비교우위론으로 자유무역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애덤 스미스 이후 메이너드 케인즈가 나오기까지 주류경제학을 이어온 경제학자였다.

 

유대인들은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ank of England) 설립에도 참여했다.

때는 윌리엄 3세 때였다.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를 쫓아내과 왕위를 차지한 윌리엄 3세는 1690년 프랑스와의 비치 헤드 해전(Battle of Beachy Head)에서 패배했다. 해전만큼은 프랑스에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던 영국으로선 충격이 컸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윌리엄 3세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고 폐위된 제임스 2세를 지지했다. 윌리엄으로선 프랑스를 꺾지 않고는 왕권은 물론 영국의 패권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빠졌다.

윌리엄은 해군 전력 강화에 120만 파운드가 필요했다. 영국은 오랜 전쟁으로 국채 발행에 한계점에 도달했고, 게다가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 대규모 자금의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영란은행의 설립이었다.

영란은행의 설립은 앞서 윌리엄 패터슨 등 여러 사람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실행되지 않다가 재정이 고갈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주도자는 재무장관 찰스 몬태구(Charles Montagu) 백작이었다. 그는 유대인과 스코틀랜드 금융인들을 끌어들였다.

유대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은 자본을 투자해 영란은행을 설립하고, 그 돈을 정부에 대부하기로 했다. 대신에 영란은행은 출자액 만큼의 발권력을 부여받았다. 영란은행은 12일만에 12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윌리엄 3세는 이 돈으로 해군력을 재건해 프랑스를 물리치고 프랑스로부터 국왕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이때 만들어진 영란은행은 영국의 중앙은행으로 발돋음하게 된다.

 

영란은행 설립허가증 날인 /위키피디아
영란은행 설립허가증 날인 /위키피디아

 

영국에서도 유대인 세력이 커지자 견제가 심해졌다. 유대인이 소매업을 할 경우 기독교를 믿는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영국인 상인 보호를 위해 유대인의 소매업 종사를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소매업을 피해 도매업, 유통업, 무역업, 은행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금융업에서 유대인들은 기량을 발휘했다. 유대인들은 주식거래업에 참여했다. 당시 런던증권거래소에는 124명의 증권거래인들이 있었는데, 유대인은 12명만 참여하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소수의 거래인으로도 영국 주식거래를 장악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영국의 유대인 금융인은 로스차일드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에서 출발했다. 창업자 암셀 마이어 폰 로트실트(Amschel Mayer von Rothschild)는 다섯 아들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에 파견했다. 이중 3째 아들인 네이선 마이어(Nathan Mayer)1811년에 설립한 것이 영국 로스차일드다.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내리자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프랑스의 감시를 피해 영국 상품을 대륙에 밀무역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영국 정부가 동맹국들에 보내는 자금 온동도 맡았다. 그는 스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막내동생 야콥 마이어와 함께 프랑스를 경유해 막대한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1815년 워털루 전투 때에는 로스차일드 가의 정보망을 이용해 영국 국채를 대량 매입해 엄청난 차익을 거두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있었다. 유대인들은 영국 민주주의를 비집고 들어가 정치적으로도 입지를 넓혔다. 귀족 작위를 받는 유대인도 나오고 1855년엔 런던 시장에 뽑히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후손인 라이오널은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유대인 총리다. 그는 1852, 18581859, 18661868년 세 차례 재무장관을 지냈고, 1868년과 1874~1880년에 대영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가 촐리를 하던 동안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을 빌려 수에즈운하 경영권을 차지하고, 제국주의적 확장에 나섰다.

영국의 유대인들은 1차 대전중에 유대인 국가 설립운동(시오니즘)에 뛰어들어 1917년 영국정부로부터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이끌어 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형성된 것은 영국 유대인에 힘이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위키피디아
벤저민 디즈레일리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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