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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북송 시대에 가정용 연료 사용…영국, 산업혁명후 석탄채굴량 급증
석탄, 중국서 먼저 실용화…산업화후 유럽 양산
2020. 09. 03 by 김현민 기자

 

석탄의 역사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양에서보다 동양에서 더 오래전에 석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중국 만주 선양(瀋陽)에서 발굴된 BC 4000년경의 신석기 유물에서 검은 갈탄을 깎아 만든 장식물이 나왔다. 또 만주 푸순(撫順)에서는 BC 1000년경에 구리를 제련하는데 석탄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석탄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 Theophrastus, BC 371~287)는 석탄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땅 속에 있는 광물질 가운데 안트라마케스(anthrakes, 석탄)라는 것이 있는데, 불을 붙이면 숯처럼 잘 탄다. 그것은 금속 작업을 할 때에 사용된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청동기 시대(BC 3000~2000)에 사람이 죽어 화장할 때 석탄이 사용되었고, 로마제국의 지배시절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석탄이 채굴되었다. 서기 200년경에는 로마인 거주지역에는 곡물을 말리는데 석탄이 이용되었고, 석탄수송용 도로도 놓았다. 로마 시대 영국에서는 석탄을 활용해 철을 제련한 유적지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로마제국 멸망후 중세에 들어가면서 영국에선 석탄은 종적을 감추게 된다.

 

석탄수송 열차 /위키피디아
석탄수송 열차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에서 석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사기> 진평왕조에 “31(서기 609) 봄 정월,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불탄 넓이가 4, 길이가 8보였으며 깊이가 5척이었다. 1015일에 이르러 꺼졌다.”는 대목이 나온다.

<삼국사기> 무열왕조에는 “4(서기 657) 가을 7, 동쪽 토함산(吐含山)의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졌다는 구절도 있다.

땅 속에서 불이 났다는 것은 지하에 매장된 석탄에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때 석탄은 갈탄으로 추정된다. 모지악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으나, 삼국사기의 두 기사를 보면,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의 갈탄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석탄광산(1637년 간행 '天工開物'의 삽화) /위키피디아
중국의 석탄광산(1637년 간행 '天工開物'의 삽화) /위키피디아

 

중국에서는 석탄이 실용화되었다. () 왕조 때부터 일부 지역에서 철을 가공하는 연료로 석탄을 사용했고, 삼국시대인 4세기에 석탄(石炭)이란 글자가 나타났다.

()나라 시절엔 석탄을 채굴해 가정용 연료로 이용했으며, 세금이 부과되었다. 북송 시대(960~1127)에 중국에선 석탄은 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연료로 사용되었다가 가정용으로 확산되었다. 1075년에 카이펑에는 석탄을 파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12세기초엔 개인주택에서도 난방용으로 나무 대신에 석탄이 사용되었다. 벽돌을 굽는 가마에도 석탄이 사용되었다. 가마에서는 도자기도 양산되었다. 1)

중국은 당 대 이후 심각한 목재 부족에 시달렸기에 석탄의 활용이 빠르게 보급되었고, 용광로나 도자기 공업에 사용되는 등 산업에도 빠르게 도입되었다. 이 석탄의 높은 화력 덕분에 중국의 요리문화는 볶음, 찜 등 고화력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게 된다.

원나라 시대에 이탈리아인 마르크 폴로(Marco Polo)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가정에서 석탄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르코 폴로는 "산의 광맥에서 뽑아내는 일종의 검은 돌을 마치 장작처럼 태우는데, 카타이(중국) 전역에서 다른 연료는 사용되지 않는다"고 그의 <동방견문록>에 썼다.

 

19세기 영국의 석탄 산지 /위키피디아
19세기 영국의 석탄 산지 /위키피디아

 

유럽 중세에 잊혀졌던 석탄이 다시 등장한 것은 13세기 영국에서였다. 인구 증가로 농토가 늘어나 산림자원이 줄어들면서 목재가 귀해졌고, 석탄이 가정용 연료로 사용되었다. 1354년 영국왕 헨리 3세는 석탄을 광산에서 런던까지 운반하는 해상면허를 내주게 된다.

처음에는 석탄을 해탄(seacoal)이라고 했다. 뉴캐슬의 바닷가 단충 구조에서 석탄이 채취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노천에서 수집되던 석탄은 금새 고갈되었다.

1575년 조지 브루스(George Bruce)라는 상인이 스코틀랜드 바닷가에서 수직 갱을 뚫어 석탄을 채굴했다. 점차 땅 속에 수직 갱을 파서 탄을 파기 시작했고, 석탄의 이름도 pitcoal이라고 바뀌었다. (pit는 갱 또는 구덩이란 뜻이다)

 

본격적인 석탄 수요는 산업혁명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초기 공장들은 물이 흐르는 곳에 수차(물레방아)를 돌려 에너지로 사용했다. 수력은 수량이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곧 한계를 드러냈다. 증기기관, 증기선, 증기기관차가 개발되고, 석탄을 연료로 한 제철법이 개발되면서 석탄의 수요는 급증했다.

영국엔 석탄매장량이 풍부했고,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석탄 채굴이 급증했다. 1700년 영국의 석탄생산량은 연간 300만톤이었으나 1770~1780년엔 연간 625만톤, 1790~1815년엔 연간 1,600만톤으로 급팽창했고, 1830년대엔 3,000만톤으로 늘어났다. 100년 사이에 석탄 생산량이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영국은 한때 전세계 석탄생산량의 85%를 생산하기도 했다. 2)

 

중부유럽의 석탄산지 /위키피디아
중부유럽의 석탄산지 /위키피디아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이 유럽대륙으로 확산되면서 유럽 각국이 석탄 채굴에 나섰다.

1750년대에 독일 서부 루르(Ruhr) 지역에 석탄광맥이 발견되었다. 곧이어 벨기에에서도 석탄 광산이 채굴되었고,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알사스-로렌 지방에도 석탄과 철광석 산지가 개발되었다. 프랑스는 알사스-로렌 지방의 석탄 매장량이 전국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석유가 개발되기 이전에 석탄은 주요 광물자원이자 연료였다. 석탄 광산을 갖지 못하면 산업을 발전시킬수 없었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주요 전쟁이 석탄광산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프로이센이 실레지아(Silesia)를 점령한 것(1742), 독일이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의 알사스-로렌을 합병한 것(1871), 1차 대전 후 프랑스가 루르지방을 점령한 것(1923) 등이 석탄의 이해가 깔려 있었던 사건들이다.

 

우리나라에선 조선 말기에 궁내부 내장원(內藏院)에서 소유하고 있던 광산 수는 51개였는데, 이중에서 석탄으로 표시된 광산수는 12개였다. 12개 광산은 석탄과 철··은광 등을 포함해 중복된 광산이며, 석탄뿐인 순수 탄광은 강원도 삼척과 경기도 통진 두 곳에 불과했다.

구한말인 1900년경에 외국자본과 기술이 침투해 석탄·흑연 등을 채굴했으며, 석탄광산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으로 채굴되었다.

 


1) 함재봉 < 한국사람 만들기 I > 아산서원, (2017), P 63~75

2) Wikipedia, History of coal mi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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