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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고대부터 유출, 스웨덴 노벨 형제들이 개척…1차, 2차 대전에 공격목표
석유의 역사⑤…한때 미국 생산 제친 바쿠 유전
2020. 09. 10 by 김현민 기자

 

미국에서 텍사스 유전이 터지기 이전인 1898~1901년 사이에 카스피해의 바쿠(Baku) 유전은 미국보다 많은 석유를 생산했고, 세계 석유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러시아제국은 1820년대에 이 지역을 손에 넣고 쏟아지는 검은 황금에 흡족해 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석유에 허덕이던 독일과 그 동맹국들이 이 기름밭을 노렸다. 현재 바쿠 유전은 아제르바이잔의 소유로 이 나라 경제에 기둥이 되고 있다.

 

바쿠의 노천 기름에 대한 기록은 고대부터 나온다. 13세기에 이탈리아인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바쿠 유전을 언급했다. 그는 그곳에 기름이 흘러 나오는데 백여척의 배에 실어 나른다. 먹지는 못하지만 불에 타고, 사람과 낙타의 상처 난 곳에 바르면 약효가 좋다.”고 썼다.

마르코 폴로에 앞서 서기 3~4세기에 이미 코카서스 기름이 언급되고,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은 그 존재를 기록했다. 1593년의 기록에는 땅속 35m까지 내려가 원유를 채굴했다고 한다. 17세기 오스만투르크의 과학자는 바쿠 주변에 500개의 유정이 있으며, 그곳에서 흰색과 검은색 정제유가 생산된다고 썼다.

18~19세기에 코카서스 지역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바쿠에서 조로아스터(Zoroaster) 사원에서 불을 뿜는 모습을 언급했다. 그 불은 바쿠 유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를 태워 나는 것이었다. 조로아스터교는 배화교(拜火敎)라고 하는데, 불을 숭상하는 종교다.

 

바쿠의 조로아스터 사원 굴뚝에서 불을 뿜는 모습을 그린 그림(1890~1907) /위키피디아
바쿠의 조로아스터 사원 굴뚝에서 불을 뿜는 모습을 그린 그림(1890~1907) /위키피디아

 

러시아가 차지하기 전에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투르크족의 이슬람 칸들이 할거해 지배하고 있었고, 바쿠는 바쿠 칸국이 지배했다. 러시아는 페르시아와 10(1804~1813) 간 전쟁을 치러 승리한 후 바쿠 칸국을 제국의 영토에 넣었다.

러시아는 유전을 국유화한 후 생산업자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을 취했다. 러시아 지배 초기에 바쿠 유전에서 생산된 원유는 연간 20만 푸드(pood, 1푸드=16.38kg)였고, 유정은 120개였다. 1837년에는 정제공장도 건설했다. 1)

러시아의 바쿠 지배 초기에 석유의 용도가 제한적이었다. 고약이나 전통 치료제로 쓰이거나 조명용으로 활용되었다. 채굴도 수작업으로 이뤄졌고, 지표에서 얼마 내려가지 못했다. 따라서 1860년대까지 바쿠 유전의 생산량과 유정의 수가 크게 늘어나지 못했다. 채굴된 원유는 페르시아에 수출되거나 흑해 또는 볼가강을 통해 러시아 내륙으로 수송되었다.

 

바쿠 최초의 유전 /위키피디아
바쿠 최초의 유전 /위키피디아

 

1860년대까지 바쿠 유전은 지표면을 뚫고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석유를 채굴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유전 개발에 나선 것은 185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대형유전이 터지고 등유가 대중적으로 등잔의 조명에 사용되는 것이 확인되고부터다. 러시아에서도 등유 수요가 급증하고 바쿠에서 등유 정제 사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쿠에서 처음으로 석유시추에 나선 사람은 1871년 아르메니아인 이반 미르조예프(Ivan Mirzoev)였다. 그는 나무 막대를 이용해 지하 45m까지 파고 들어 원유 채굴에 성공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아프셰론(Apsheron) 반도 일대의 유전 독점권을 확보해 생산한 원유를 해외에 수출하게 된다.

미르조예프의 시추에 이어 바쿠 일대에는 러시아 자본가들이 뛰어들었다. 러시아 정부도 독점 계약권을 장기로 늘리고 등유세를 면제함으로써 자본 유치에 나섰다.

 

노벨 형제의 바쿠 발라카니 유전 /위키피디아
노벨 형제의 바쿠 발라카니 유전 /위키피디아

 

해외 자본에도 유전 개발을 허용했다.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이었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형인 로베르트(Robert)과 루드비그(Ludvig) 노벨 형제는 바쿠 유전의 개척자였다.

1873년에 로베르트 노벨은 소총 개머리판 제작에 사용할 호두나무 목재 구입을 위해 코카서스 지역을 갔다. 그는 코카서스 지역을 두루 살피다가 원하던 목재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바쿠에서 유전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등유 사업에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목재를 사려던 돈으로 소규모 유전을 매입했다. 로베르트는 동생 루드비그에게 석유개발 사업에 투자하도록 설득했다. 형제는 러시아 정부가 유전 지대의 토지를 민간에 매각하자 본격적으로 석유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1875년에 발라카니(Balakhani) 유전 대부분을 사들이고 정유공장도 세웠다. 이어 1877년에 노벨 브러더스 석유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바쿠 유전은 낙후해 있었다. 노벨 형제들은 러시아 최초로 원유수송용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유조열차를 제작했다. 이어 1878년엔 세계 최초의 유조선 조로아스터호를 건조했다.

두 형제는 바쿠에 보다 대규모 석유산업단지를 만들기 위해 동생 알프레드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알프레드는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어 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1979년에 노벨 3형제 모두 바쿠 유전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노벨 형제 이외에도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법인인 로열더치셸(Royal Dutch Shell), 유럽의 유대금융가문 로스차일드 등 외국계가 대거 카스피해 유전에 뛰어들었다.

1907년에는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와 흑해 바툼을 연결하는 송유관이 준공되었다. 1898년 바쿠 유전은 미국 생산량을 추월했다.

 

아제르바이잔 유전 /위키피디아
아제르바이잔 유전 /위키피디아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었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휴전했다. 아제르바이잔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되어 볼셰비키 적군과 싸우러 떠났다.

그 틈을 타서 1918년에 아제르바이잔 민족운동가들은 민주공화국을 수립해 독립을 시도했다.

독일은 러시아 내전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압박해 전쟁 물자를 사들이고, 카스피해 서안 바쿠유전에 눈독을 들였다. 독일의 동맹인 오스만 투르크도 바쿠 유전을 차지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다가 백계 러시아군이 바쿠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병력 16,000여명을 보냈다.

오스만군이 바쿠로 진격하자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우려하던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을 믿는 아제르바이잔인 학살에 나섰다. ‘18183월의 학살로 불린 종교적 광기는 아제르바이잔 회교도 약 12,0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스만군이 진격하자 아르제바이잔인들은 보복 학살에 나서 5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거나 집을 잃었다.

1918826일 오스만군은 바쿠를 포위한 채 본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영국군이 바쿠 유전을 방어했다. 전투 개시 19일 만에 영국군의 철수로 끝났다. 동맹군이 승리했지만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유정을 모조리 파괴했다. 결국 석유 공급선이 모두 막히면서 오스만투르크와 독일은 순차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9204월 볼셰비키군은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고, 아제르바이잔은 소련의 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바쿠 유전도 소련의 것이 되었다.

 

바쿠 유전의 원유생산량 추이 /위키피디아
바쿠 유전의 원유생산량 추이 /위키피디아

 

2차 세계대전에서도 바쿠 유전은 양진영의 타깃이었다. 러시아는 1939~1940년에 나치 독일에 석유를 공급하고 있었다. 전쟁 우려가 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파이크 작전(Operation Pike)을 수립해 개전과 동시에 바쿠 유전을 폭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이 연합군에 참여하면서 파이크 작전은 무산되었다.

러시아를 침공한 나치 독일은 1942년에 극심한 석유부족에 시달리며 군대를 남하시켜 바쿠유전을 점령할 계획을 시도했다. 작전명 에델바이스(Operation Edelweiss)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무산되었다. 2차 대전에서 아제르바이잔은 바쿠유전을 지키기 위해 25만명이 희생되었다. 소련은 130명의 아제르바이잔인들에게 소련 영웅이라는 칭호만 주었을 뿐이다.

아제르바이잔은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바쿠유전은 150여년을 파먹어 현재는 빠르게 고갈되어 가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원유생산량은 하루 833,000배럴로 산유국 24위를 차지하고 있다. 2)

 


1) Wikipedia, Petroleum industry in Azerbaijan

2) Wikepedia, List of countries by oil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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