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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1880년대 전쟁으로 볼리비아, 내륙국 신세…해양접근로 놓고 끈질긴 분쟁
초석전쟁 100년 원한…칠레-볼리비아-페루
2019. 04. 29 by 김현민기자

 

칠레 북쪽, 볼리비아 서쪽, 페루 남쪽에 아타카마 사막(Atacama Desert이 있다. 19세기초 세 나라가 스페인으로 독립할 때만 해도 이 사막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초석(硝石, Saltpeter)과 구아노 매장지가 발견되었다. 구아노는 새의 배설물이 쌓여 형성된 퇴적물로 비료로 사용되었고, 초석은 화약와 비료의 원료였다. 이제 막 독립한 세 나라에 초석과 구아노의 경제적 가치는 높았다.

이 사막의 영유권은 볼리비아에 있었다. 볼리비아는 아타카마 사막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을 확보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스페인의 식민지 하에서 동족이었고, 독립 투쟁 과정에선 서로 동지였기 때문에 주인 없는 사막은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라를 따로 세우고 나서는 내것, 네것을 구별해야 했다.

 

1866년 칠레-볼리비아 협정 /위키피디아
1866년 칠레-볼리비아 협정 /위키피디아

 

1866년 볼리비아와 칠레는 경계선 조약을 통해 아타카마 사막을 가운데에 놓고 국경을 남위 24°으로 나누고 23~25° 사이에서 생산되는 광물의 세금을 반으로 나누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칠레 광업자들이 몰려 들어 개발권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자 볼리비아는 칠레와 대항하기 위해 페루와 비밀리에 동맹을 체결했다. 이어 칠레와 볼리비아는 1874년 세금을 나눠먹던 종전 방식을 폐기하고 각자 자국 영토에서 생산하는 광물에 대한 세금 인상을 유예하기로 합의했다.

그런 와중에 볼리비아에선 쿠데타가 발생해 새 정권이 1874년 조약을 파기하고 세금을 인상했다. 칠레 광산업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볼리비아는 광산을 몰수했다.

때마침 세나라 모두 경제 공황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나라든, 이 광산을 확보하는 것이 경제 회생의 관건이 되었다.

1879214일 칠레는 초석 집산지인 안토파가스타 항구에서 군사 조치를 취했고, 이에 맞서 볼리비아는 페루에게 동맹의 의무를 요청했다. 187945일 칠레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 본격화되었다. (이 전쟁은 2차 대전 때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개된 태평양 전쟁과 구별해 남미 태평양 전쟁’, 또는 초석 전쟁이라고 한다.)

초반에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동맹군이 수와 병력에서 칠레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혼란에 빠졌다. 볼리비아와 페루는 미국에서, 칠레는 유럽에서 각각 무기를 사왔다. 전쟁은 점차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칠레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파나마 운하가 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군수품이 페루까지 도달하려면 남아메리카 마젤란 해협을 돌아야 했다.

전쟁은 4년이나 지속되었고, 최종 승자는 칠레였다. 1883년에는 칠레와 페루 사이에, 1884년에는 칠레와 볼리비아 사이의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이 전쟁으로 볼리비아는 아타카마 사막 일대의 서부 연안 영토와 광산 개발권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볼리비아 해군 열병식 /위키피디아
볼리비아 해군 열병식 /위키피디아

 

볼리비아는 1904년 칠레와 협정 영구화 조약으로 태평양 진출의 통로가 막힌 내륙국이 되었다. 이후 볼리비아 사람들은 칠레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내륙국가이면서도 해군을 보유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의 호수 티티카카호에 해군기지를 두고 병력도 보유하고 있다. 언젠가 칠레에 빼앗긴 땅을 되찾아 태평양으로 나가는 통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볼리비아는 끊임 없이 바다로 나가는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1956년 칠레와 볼리비아 외교장관은 칠레가 볼리비아의 티티카카호 사용권을 받고, 볼리비아에게 태평양 진출 길을 허용한다는데 합의했다. 하지만 페루가 반대하고 나섰다. 페루는 티티카카호를 공동소유하고 있는데, 두 나라가 일방적으로 칠레에 사용권을 내주기로 한데 불만을 품은 것이다. 그후 칠레가 볼리비아와 공동소유하고 았던 라우카 강의 수로를 일방적으로 변경하자 1962년 볼리비아는 칠레와 단교를 선언했다.

1973년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군사정권은 볼리비아와 관계개선을 추구해 이듬해 1974년 국교를 재개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볼리비아에 해양통로를 제공하기 위해 페루와의 국경에 3국 공동관리지역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페루가 반대했다.

 

1970년대 칠레 피노체트가 제안한 3국 공동관리 회랑 /위키피디아
1970년대 칠레 피노체트가 제안한 3국 공동관리 회랑 /위키피디아

 

볼리비아에선 아직까지도 칠레와의 관계가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일관계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볼리비아에서 천연가스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천연가스를 미국에 수출하는 방법을 두고 정치적 논란이 되었다. 이 천연가스를 미국에 수출하려면 칠레에 빼앗긴 아타카마 사막을 통과하는 것이 빠른 방법이다. 친미파인 곤잘레스 산체스 데 로사다(Gonzalo Sánchez de Lozada) 대통령은 비용이 저렴하게 드는 이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볼리비아 야당은 이 방법보다는 멀고 험한 산지를 통과해야 하는 페루 통로를 주장했다. 과거 자신들의 땅이었던 아타카마 사막을 통과하며 칠레에 토지와 항구 시설에 대한 사용료를 내는 일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3년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에서 칠레로 가는 파이프라인 건설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교통이 마비되고 도시의 다른 기능들도 마비되었다. 도시의 대부분의 상점과 사무실이 문을 닫았다. 라파스로 올라오는 주요 도로들이 시위대로 차단되었다. 정부가 이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수십명의 시위대가 목숨을 잃었다. 민중들의 분노로 결국 2003년 말 산체스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도주했다.

2004년 볼리비아 의회는 도망간 전 산체스 대통령과 장관 15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정에 세웠다. 볼리비아 정부는 산체스의 인도를 요구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역사적 앙금이 오래 가고 있는 것이다.

 

칠레 점령지역 (1880~1929) /위키피디아
칠레 점령지역 (1880~1929) /위키피디아

 

이후 볼리비아에 2006년에 좌파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대통령이 되면서 볼리바아는 칠레에 강경하게 돌아섰다. 20092월 제정된 볼리비아 새 헌법은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 행사에 기초한 태평양으로의 출구 확보는 볼리비아의 항구적이고 불가분한 목표라는 규정을 넣었다. 이어 2010년에 칠레와 다시 단교를 선언했다.

이어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태평양 접근 주권 요구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겼다. 하지만 2018년 재판소 법관 15명중 12명이 칠레가 볼리비아가 요구한 주권 협상에 참여할 의무가 없다며 칠레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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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파 2020-05-13 01:47:30
한국의 문얼간이도 좌파 대통령. 특히 간첩 신0복을 존경한다고 하며, 스스로 간첩임을 자백함. 이 새끼도 모랄레스 처럼 헌법 개정을 통해 영구 집권 노림. 2020년 4.15총선 부정 계표로 좌파 국회의원 180명 의 민주당 만듦. 나라꼴이 볼리비아 꼴 날 것. 나라 꼴이 개 조옷같이 되어 엉망으로 망할 것임이 뻔함.
좃됫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