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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소련에 이어 멕시코, 유전 몰수…英·美 석유기업에 도전, PEMEX 설립
석유전쟁①…1938 멕시코 석유국유화
2020. 09. 20 by 김현민 기자

 

지하자원은 누구의 소유인가. 미국·영국 등 시장자유주의를 이끄는 나라들은 무주물 선점(無主物先占)의 원리를 적용한다. 땅 속의 자원은 주인이 없기 때문에 먼저 발견한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국가주의자들의 견해는 지하의 자원은 공공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이 대립은 석유자원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1918년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한 러시아가 처음으로 석유국유화를 선언했다. 이후 1937년 볼리비아, 1838년 멕시코에 이어 1951년 이란, 1961년 이라크, 1962년 버마(미얀마)와 이집트, 1963년 인도네시아, 1968년 페루에서 줄줄이 석유를 국유화했고, 1971년 중동산유국이 일제히 자국 석유산업을 국유화한다. 1)

석유메이저들에게 국유화는 청천벽력이다. 자신들이 개발하고 이익을 내던 재산을 강탈하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는 지하의 석유자원은 돈을 투자해 개발한 사람이 가진다는 생각이 도전을 받은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러시아였다. 공산주의 사상은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국가가 통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볼셰비키는 정권을 장악하자 곧바로 바쿠 등 유전지대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러시아는 192212월 소련이 출범하기까지 5년간 긴 내전을 치렀고, 볼셰비키의 국유화 선언도 내전 결과에 달려 있었다. 렀다. 석유메이저들은 볼셰비키의 적군이 패배하고 서방세계가 지원하는 백군이 승리하길 기대했다. 이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미국 엑슨의 CEO 티글(Walter C. Teagle)이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의 산유량은 전세계 15%2위를 차지했고, 3분의1을 스웨덴의 노벨 가문이, 일부를 로열더치셸이 지배하고 있었다. 노벨 형제들은 내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할 것으로 직감하고, 엑슨의 티글에게 주식 절반을 사라고 제의했다. 티글은 백군이 승리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19207월에 1,150만 달러에 주식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대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티글의 믿음과 달리 볼셰비키 정권은 백군의 도전과 미국, 영국, 일본군의 개입에도 살아남았다. 볼셰비키는 카프카즈로 군대를 보내 유전을 국유화했다. 엑슨은 역사상 가장 무분별한 투자에 희생양이 되었다.

엑슨과 셸(로열더치셸)은 소련 정부에 배상금을 요구했다. 소련 당국은 석유메이저들의 요구를 들은척도 않고 싼값이 기름을 양산해 국제시장에 쏟아냈다. 엑슨과 셸은 한편으로 소련에 배상금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련산 석유를 사서 치열한 가격경쟁을 벌였다. 1925년엔 영국정부가 소련 정부를 승인했다. 한때 소련 정부는 석유메이저들에게 일정액의 배상금을 주어 타협할 생각도 했다. 하지만 소련은 국제외교관계가 바뀌는데다 석유메이저 간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배상금 지불을 유야무야해 버렸다. 결국 서방의 석유기업들은 소련에서 재산을 날라게 되었다. 2)

 

멕시코의 툴라 데 아옌데 유전 /위키피디아
멕시코의 툴라 데 아옌데 유전 /위키피디아

 

멕시코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스페인이 식민지를 개척한 16세기초였다. 멕시코만 지역에서 목동들이 소를 잃어버렸는데, 타르 웅덩이에 빠져 있었다. 당시 스페인인들은 그곳을 값진 자원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고, 장애물쯤으로 보았다.

19세기말 미국과 유럽에서 석유의 가치가 인정되고 멕시코의 석유 탐사가 이뤄졌다. 멕시코에서는 1901년 미국 석유개발업자 에드워드 도히니(Edward L. Doheny)가 에바노 유전개발에 성공해 상업용 석유를 최초로 생산했다.

곧이어 1908년 영국 사업가 위트먼 피어슨(Weetman Pearson)에 의해 석유가 터졌다. 피어슨은 멕시코 대통령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íaz)의 초청으로 멕시코 시티의 배수시설과 전차선로 건설을 수주받아 사업을 하던 중에 1901년 텍사스 스핀들톱에서 대형유전이 터지자 멕시코에도 석유가 날 것이라 보고 석유탐사에 나섰다. 그는 툭스판(Tuxpan)에서 거대한 유전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후 멕시코에선 미국인 도히나의 후아스테카석유(Huasteca Petroleum)와 영국인 피어슨의 엘아길라(El Aguila)가 경합했고, 독재자 디아즈는 두 회사에 막대한 토지를 불하했다. 도히나는 자신의 지분을 스탠더드오일오브인디애나(아모코)에 매각했고, 피어슨은 자신의 지분을 셸에 매각했다. 멕시코에서 미국 스탠더드계와 유럽의 셸이 대결을 벌이게 되었는데, 주도권은 셸이 쥐었다. 3)

 

1914년 4월 27일 미군이 멕시코 베르쿠르즈를 점령한 이후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4년 4월 27일 미군이 멕시코 베르쿠르즈를 점령한 이후 성조기를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멕시코는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미국, 러시아에 이어 3위의 산유국이었고, 1차 대전후엔 한때 2위 산유국이었다.

1910년 디아즈의 장기독재에 저항하는 멕시코 혁명(Mexican Revolution)이 일어나 디아즈가 실각하고 프란스시코 마데로(Francisco I. Madero)가 집권했다. 마데로는 우에르타 장군에 의해 암살되고, 우에르타(Victoriano Huerta)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은 우에르타 정권을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우에르타 정권의 자금줄이 셸이라고 의심했고, 영국이 뒤에서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은 미국 정부가 스탠더드의 직원이냐고 맞받아쳤다. 미국과 영국과의 외교관계가 험악해졌고, 미국은 멕시코에 대해 엠바고(무역금지조치)를 내렸다. 마침내 영국도 미국에 굴복해 우에르타 정권의 타도에 동조하게 된다.

19144월 윌슨은 미군을 투입해 멕시코 유전지대인 베라쿠르스를 점령했다.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한 이유로 쿠데타 정권을 쫓아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유전지대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미군의 공격과 내부의 비판세력에 직면에 우에르타는 자메이카로 망명을 가고, 카란사(Venustiano Carranza)가 대통령이 되었다. 카란사는 헌법 개정을 추진해 1917년에 노동자, 농민계급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한 헌법을 제정한다. 1917년 헌법 27조에는 모든 토지와 지하자원은 국가의 자산이며, 국가는 개인에게 그 소유권을 양도할수 있고, 몰수할 수도 있다고 규정했다. 또 지하자원은 국가만이 개발할수 있다고 규정했다. 4)

그러나 석유메이저들은 멕시코의 헌법을 무시했다. 멕시코 정부도 미국과 영국에 대항해 석유를 국유화할 힘이 없었다. 다만 헌법 명문으로만 규정했을 뿐이다.

 

라자로 카르데나스 대통령 /위키피디아
라자로 카르데나스 대통령 /위키피디아

 

1차 대전이 끝난후 미국은 석유자원의 고갈에 위협을 느꼈다. 미국은 멕시코 원유를 대규모로 수입했고, 멕시코산 석유수입량이 19173,000만 배럴에서 1922~23년에 1억 배럴로 증가했다. 미국의 원유수입이 급증하면서 멕시코 내에서는 석유회사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대했다. 외국회사들이 국내에서 기름을 파내 마구 가져가는 것에 혁명주의자들이 분노했다. 석유노동자들은 오두막집에서 비참하게 생활했다.

1925년 카에스(Plutarco Elías Calles) 대통령은 외국회사들은 멕시코 정부에 등록해야 하고, 석유권리를 50년으로 제한했지만, 국유화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1935년 멕시코의 석유산업은 완전하게 외국회사에 장악되었다.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고 외국 석유회사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멕시코 노동자연맹(Confederation of Mexican Workers)을 조직하고 대대적인 파업투쟁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유정에 소금물을 집어 넣으며 석유생산을 방해하기도 했다. 석유회사들은 타협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법정 소송을 몰고갔다. 노동중재위원회는 석유회사에 그동안 밀린 임금 2,600만 페소를 지급하라며 노동자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석유메이저들은 비열한 방법을 취했다. 멕시코 석유를 고갈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증산에 돌입했고, 서서히 베네수엘라로 이전할 채비를 했다.

1937317일 라자로 카르데나스(Lázaro Cárdenas) 대통령은 중대한 조치를 발표했다. 그는 17개 석유회사를 국유화해 버렸다. 멕시코는 이날을 새로운 독립일로 선언하고, 기념비를 멕시코 시티에 건립했다. 멕시코는 국영석유회사(PEMEX)를 설립하고 국유화한 유전의 경영을 맡겼다. 5)

 

멕시코 시티에 세워진 석유국유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멕시코 시티에 세워진 석유국유화 기념비 /위키피디아

 

석유메이저와 모국이 반격에 나섰다. 로열더치셸의 모국인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는 멕시코 정부에 즉각적인 배상을 요구했다. 영국은 멕시코 혁명 기간에 피해를 입은 영국인들의 재산까지 피해보상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멕시코 외무부는 힘에 눌려 적절한 배상을 하겠다고 물러섰고, 보상비로 지불해야 할 금액이 13,000만 달러나 되었다.

외국 석유회사들은 기술자들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했다. 엑슨과 셸은 멕시코를 보이콧했다. 두 회사는 석유정제에 필요한 테트라에틸이라는 화학물질과 특수설비의 수출을 막았다.

 

멕시코 국영석유회사 PEMEX 본사 /위키피디아
멕시코 국영석유회사 PEMEX 본사 /위키피디아

 

멕시코는 석유국유화 조치로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다. 미국의 프팽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선린 외교를 표방하며 석유기업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멕시코 기술자들이 정제에 빌요한 첨가제와 설비를 개발해 위기를 수습했다. 무엇보다도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미국과 영국은 멕시코가 독일 진영에 석유를 공급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멕시코는 석유국유화에 성공했다. PEMEX1980년대까지 멕시코 수출의 80%를 차지했고, 국가재정수입의 절반가량을 보탰다. 멕시코의 석유국유화는 후에 아랍 산유국의 석유국유화 선언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1) Wikipedia, Nationalization of oil supplies

2)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105~107

3) Wikipedia, Petroleum industry in Mexico

4) 라틴아메리카, 우덕룡 등, 송산출판사(2000), P228~230

5) Wikipedia, Mexican oil expropr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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