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자원전쟁
1951년 이란 석유국유화 선언…미국 주도로 쿠데타 유도, 팔레비 복권
석유전쟁⑤…CIA, 이란 모사데크 정권 축출하다
2020. 09. 24 by 김현민 기자

 

페르시아(이란)은 중동에서 기름이 가장 먼저 발견된 나라였지만, 그 검은 황금은 그들에게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났다.

1901년 영국인 광산업자 윌리엄 다시(William Knox D'Arcy)가 페르시아 카자르(Mozzafar al-Din Shah Qajar) 국왕에게 돈 몇푼(2만 파운드)에 석유생산 이익의 16%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60년간 채굴권을 보장받았다. 다시는 석유채굴에 실패해 권리를 버마 석유( Burmah Oil Company)에 넘겼는데, 버마 석유는 1908년에 석유채굴에 성공했다. 버마 석유가 본격적으로 페르시아 석유채굴에 나서면서 세운 회사가 영국 BP의 원조가 되는 앵글로-페르시아 석유다. 영국은 1차 대전 직전인 1904, BP에 정부 자금을 투자해 국영회사로 전환한 다음, 페르시아 내정에 시시콜콜 간섭했다.

 

1941년 8월말, 소련군과 영국령 인도군이 이란 점령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1년 8월말, 소련군과 영국령 인도군이 이란 점령 후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위키피디아

 

러시아 혁명후 소련은 페르시아 북부 카스피해 연안에 페르시아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고 군대를 테헤란d로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영국은 페르시아에 강력한 정부를 세울 계획을 세웠다. 1921년 영국은 북부 코사크 여단연대를 지휘하던 레자 칸(Reza Khan) 장군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사주했다. 쿠데타는 성공했다. 레자 칸은 1923년 카자르 국왕을 퇴위시키고 스스로 국왕에 올라 팔레비 왕조를 열었다.

하지만 레자 국왕은 영국의 의도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1935년 나라 이름을 이란이라고 바꾸고 석유자본을 이용해 이란을 현대화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그의 계획은 나름 성공해 2차 대전 직전에 이란은 거의 유럽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했다. 레자 국왕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던 독일과도 교류를 했다. 국왕의 양다리 걸치기 태도에 영국은 곱지않은 시선을 보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란은 중립을 지켰다. 이란에 석유가 나지 않았다면 중립은 국제적 공인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이란 국왕을 의심했다. 영국은 명분을 만들었다. 독일이 이란의 석유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1941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영국과 소련은 그해 8월 선제적으로 이란을 공격해 유전을 장악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고, 이란군은 무방비 상태로 외국군에 점령당했다. 전투도 없었다.

영국군과 소련군은 레자 칸을 체포되채포해 런던으로 추방(압송)하고, 22살 된 그의 아들인 펠레비(Mohammad Reza Pahlavi)를 꼭두각시 국왕으로 앉혔다. 그리고 마음껏 기름을 퍼갔다. 1)

 

1946년 소련과 영국의 이란내 영향력 범위 /위키피디아
1946년 소련과 영국의 이란내 영향력 범위 /위키피디아

 

영국과 소련에 대한 이란의 국민감정이 들끓었다. 팔레비 국왕은 점령군에 저항하지 않았지만 몰래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미국은 이에 응해 예비역 육군 대령 노먼 슈워츠코프(Herbert Norman Schwarzkopf)를 보내 이란군 군사훈련을 시켰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적으로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다. 이란에서도 외국 세력을 몰아내고 석유를 국유화하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addegh) 박사가 그 운동의 중심에 섰다.

모사데크는 귀족 집안 출신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후 191524살에 정계에 입문해 하원의원을 거쳐 법무장관, 재무장관, 아제르바이잔 총독을 역임했다. 그는 레자 국왕의 권력탈취를 비판하며 정치를 그만두었고, 1940년에는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그는 레자 국왕이 축출된 후 1944~53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종전 후 70대가 된 이 노회한 정치인은 석유메이저들이 어떻게 해외에서 착취를 하는지를 꿰고 있었다. 1950년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가 미국 메이저들이 설립한 아람코와 협상해 수익을 5050으로 나누기로 합의한 것이 이란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다. 영국 BP는 이란에게 수익의 16%를 주기로 약속해놓고도 실제로는 8~10%박에 돌려주지 않았다는 게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모사데크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이슬람주의자들을 연합해 국민전선(Jebhe-ye Melli-ye Irān)을 결성하고 석유국유화 운동을 벌였다. 2)

 

1

모하마드 모사데크 /위키피디아
모하마드 모사데크 /위키피디아

 

9514월 이란 하원은 모사데크를 압도적인 표결로 총리로 선출했고, 팔레비 국왕도 마지못해 그를 총리로 승인했다. 의회는 곧바로 BP의 유전을 접수할 것을 의결했다. 51일 모사데크 정부는 BP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모사데크 정권은 군 통수권도 장악해 팔레비 국왕을 무력화시켰다.

이란의 석유국유화 정책은 영국과 BP의 잘못도 있다. 미국은 산유국의 민족주의 확장을 저지할수 없다고 간파하고 사우디에서 이익의 50%를 내주는 선에서 무마했다. 하지만 영국은 아직도 자국이 세계최강의 나라라는 제국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BP도 관료주의적 의식에 젖어 있었다. 윌리엄 프레이저(William Fraser) BP 사장은 변화하는 세계에 무감각했다.

이란의 석유국유화 사태는 영국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였다.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 Attlee) 내각은 자유주의적 입장과 달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허버트 모리슨(Herbert S. Morrison) 외무장관은 영국군을 파병해 모사데크 정권을 축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미국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란을 점령하더라도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석유를 생산하고 수송할수 없으므로 무력 동원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강력한 주장에 영국은 무력 개입을 포기하게 된다.

 

이란의 석유국유화 조치에 BP는 미국의 5대 메이저와 로열더치셸을 동원해 이란산 석유 매입을 중단하도록 했다. 세븐시스터스(Seven Sisters)라 불리는 거대 석유메이저들이 이란 석유를 사지 않게 되자, 이란은 기름을 한방울도 팔수 없었다. 모사데크 총리는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란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미국 대통령은 한달후에 보낸 편지에서 이란은 국제의무를 지킬 필요가 있다며 냉담하게 거절했다.

이란 경제는 수직 낙하했고,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알토란 같은 유전을 확보하면 잘살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모사데크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모사데크는 소련에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53년 테헤란에 등장한 쿠데타군의 탱크 /위키피디아
1953년 테헤란에 등장한 쿠데타군의 탱크 /위키피디아

 

드디어 미국의 CIA와 이란 내 반모사데크 세력이 음모를 꾸몄다. 주도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자 커미트 루스벨트(Kemit Roosebelt Jr.)였다. 미국 정보기관 CIA와 영국 정보기관 M16이 작전을 짰다. 1942~1946년에 군사고문으로 이란에 근무한 노먼 슈워츠코프도 참여했다. 그가 교육시켰던 군과 경찰 요원들이 동원되었다.

쿠데타의 목적은 팔레비 국왕을 복권시키고, 유전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타이밍을 기다리던 중에 팔레비 국왕은 모사데크를 추방하려다가 실패해 오히려 로마로 망명하는 일이 생겼다. 국왕이 나라를 떠난지 3일후, 1953815일 음모자들은 마침내 작전을 개시했다.

쿠데타군은 유혈충돌을 벌이며 순식간에 권력을 장악했다. 모사데크는 체포되었다. 국왕이 귀국하고 쿠데타군의 도움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3)

 

팔레비 국왕은 권력을 되찾았지만 떨떠름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CIA의 힘으로 권좌에 다시 올랐기 때문이다.

이 쿠데타는 미국 CIA의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에 의한 것이었는데, 산유국의 권력이 석유메이저에 반할 때 강대국에 의해 전복될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동시에 중동의 석유패권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모사데크 정권의 붕괴로 BP는 이란 유전을 되찾았지만, 과거 40년 동안 누렸던 전권을 가질수는 없었다. 미국 몫을 내줘야 했다. 프랑스도 숟가락을 걸쳤다. 19548월 석유메이저들은 이란 석유를 배분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협의 결과, BP40%, 미국의 5대 메이저가 40%, 로열더치셸이 14%, 프랑스의 CFP6%를 갖기로 했다. 미국 몫 40%는 엑슨, 모빌, 소칼, 텍사코, 걸프오일이 사이좋게 8%씩 나눠 가졌다. 이로써 이란 석유는 BP 단독 소유에서 세븐시스터스와 프랑스 회사가 참여하는 8대 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후에 미국은 독립계 석유회사에 5%를 나눠주어 5대 메이저의 개별 지분은 7%로 낮아진다. 4)

이렇게 나눠 가진 이란 석유는 1979년 호메이니에 의한 이란 혁명에 의해 다시 국유화된다. 미국과 이란 관계는 그후에도 악화일로를 걷는다.

 


1) Wikipedia, Anglo-Soviet invasion of Iran

2) Wikipedia, Mohammad Mosaddegh

3) Wikipedia, 1953 Iranian coup d'état

4)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180~18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