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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세븐시스터스에 대항…이란과 소련산 석유 수입, 알제리 독립운동 지지
석유전쟁⑥…마테이 죽음의 미스터리
2020. 09. 25 by 김현민 기자

 

19621027,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밀라노로 가는 4인승 자가용 경비행기가 롬바르디아주의 한 마을에 추락했다.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이탈리아 거물기업인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와 그를 취재하던 미국 라이프지 기자, 조종사가 숨졌다. 이탈리아 군당국은 사고 조사후 사고라고 발표했다. 나중에 비행기 내에는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누군가 마테이를 죽이려 한 것이다. 마테이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미국 CIA, 프랑스 극우단체, 또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소행이라는 설이 나왔지만, 사건은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1)

 

마테이(1906~1962)는 어려서부터 반골 기질이 있었다. 25세에 베니토 무솔리니가 창당한 파시스트 정당에 가입했으나 당의 정책에 반발해 탈당하고 기름 유화제 생산공장을 차렸다. 1943년엔 반파시스트 운동에 참여해 레지스탕스의 리더로 활동했다.

1945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는 이탈리아 국영석유회사 아지프(Agip: Azienda Generale Italiana Petroli) 사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2차 대전을 막 끝낸 상황이라, 경제가 엉망이었고 산업시설은 피폐했다. 정부가 그에게 내린 지시는 아지프를 해산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는 정부의 지시를 듣지 않고 아지프를 구조조정을 해 살려내고 국내에서 석유탐사작업에 나섰다. 1949년 그는 이탈리아 북부 포강 유역(Po Valley)에서 석유와 메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광맥은 소규모에 불과했다.

 

엔리코 마테이의 기업활동 /사진=eni.com
엔리코 마테이의 기업활동 /사진=eni.com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마테이는 미국과 영국계 석유회사들이 판치는 국제석유시장에 도전했다. 1953년 이탈리아 석유회사를 합쳐 국영석유회사 에니(ENI: Ente Nazionale Idrocarburi)를 설립하고 회장에 올랐다.

에니는 국제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미국의 엑슨, 모빌, 소칼, 걸프오일, 텍사코등 5대 자매, 영국계 BP와 로열더치셸 등 2대 자매가 카르텔을 형성해 이탈리아 회사를 끼워주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 정부가 운영하는 회사가 미국과 영국의 이익에 의해 따돌림 당하는데 분노했다. 그는 세븐시스터스 카르텔의 빈틈을 노렸다. 세븐시스터스(seven sisters, sette sorelle)란 말은 마테이가 만든 말이다.

마테이의 복수는 7자매의 카르텔이 지배하는 이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란에서는 모사데크 정권이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로 붕괴되고, 7자매가 원유 수입을 독점하고 있었다.

마테이는 이란의 팔레비 국왕에게 석유공동 개발의 제의하면서 이익을 7525로 배분하자고 했다. 미국 석유회사들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5050으로 이익분배를 제의한 것에 비해 산유국에는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란 민족주의를 이용한 마테이의 교묘한 전략은 먹혀들어갔다. 팔레비 국왕은 이탈리아회사의 석유개발을 허용했다. 이란에서 7자매의 카르텔 일각이 무너진 것이다.

 

엔리코 마테이의 기업활동 /사진=eni.com
엔리코 마테이의 기업활동 /사진=eni.com

 

마테이의 파격적인 활동은 7자매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7자매들은 세계 곳곳에서 에니의 석유공급을 차단했다. 마테이는 7자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석유공급원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소련에 문을 두드렸다. 시절은 미-소 냉전이 극에 치닫던 때였다. 7자매를 넘어 미국의 콧털을 건드린 것이다.

1950년대말 소련은 우랄지방에서 새로운 유전을 발견해 석유수출로를 찾고 있었다.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산 원유의 수출을 제한했다. 7자매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 조치였다.

마테이는 7자매와 전면전을 벌이기로 하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니키타 흐루시초프 서기장을 만났다. 1959년부터 소련산 값싼 기름이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마테이의 전략은 미국-영국 메이저에 눌려 있던 산유국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 스탠더드 오일에서 분리되어 조그만 회사로 남아 있던 스탠더드오일오브인디에나(AMOCO)도 이탈리아 방식을 따라 이란에서 합작사업을 따냈다. 2)

 

마테이는 프랑스도 자극시켰다.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알제리 독립운동을 탄압해 유전을 확보하려 했다. 마테이는 알제리 독립운동가들에 지지를 보내며 현지 유전에 눈독을 들였다.

마테이는 튀지니, 모로코와도 접촉해 수익 5050의 조건으로 석유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 국가들을 헤집고 다니는 마테이는 프랑스 극우단체 OAS의 타깃이 되었다.

마테이는 한때 영국 보호령이었던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 석유개발 조약을 맺었다. 그는 사하라 사막을 관통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1960년엔 중국과도 협상을 벌여 영-미 석유회사들의 독점을 깨려 했다.

 

에니의 주유소 /위키피디아
에니의 주유소 /위키피디아

 

마테이가 국제석유시장을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가장 타격을 받은 회사는 미국의 엑슨이었다. 엑슨은 마테이와 휴전하기로 하고, 백악관에 줄을 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도록 주선했다.

그러나 마테이와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비행기 추락사로고 마테이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마테이의 적은 많았다. 미국 국가안보위원회(NSC)1958년 보고서에서 그를 장애물로 규정했고, 프랑스 정부도 알제리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에니의 프랑스 사업을 금지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은 점이 많다. 파괴된 기체의 증거물은 즉시 사라졌다고 한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의 보스였다가 회개한 토마소(Tommaso Buscetta)는 시칠리아 마피아가 미국 마피아의 사주를 받고 저지를 범죄였다고 폭로했다. 그 이유는 마테이가 미국의 정책에 반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군비밀정보기관에 책임자로 있었던 풀비오(Fulvio Martini)는 마테이가 저격당했다고 밝혔고,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한 아민토레 판파니(Amintore Fanfani)는 마테이 사건을 이탈리아 역사상 첫 테러로 규정했다.

 


1) Wikipedia, Enrico Mattei

2)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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