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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이란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에 공급 감축…신유전 개발, 에너지 절감으로 극복
석유전쟁⑩…중동불안에 1979년 2차 오일쇼크
2020. 09. 29 by 김현민 기자

 

1973년말 국제유가가 4배나 오른 것은 소비국에겐 석유위기이요 오일쇼크였지만, 산유국에겐 횡재였다. 전세계 돈이 중동으로 몰려 들었다. 각국의 국가수반이 중동을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산유국의 국왕들은 선심 쓰듯 석유를 주었다. 서울 강남에 테헤란로라는 가로명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인 1977년이다.

하지만 중동의 부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집중되었다. 석유기업을 국유화하면서 수익은 국왕에게 돌아갔다. 산유국의 국왕은 초호화생활을 했지만, 백성들은 빈민촌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특히 이란은 중동국가 가운데 인구가 많았다.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은 해마다 스위스 산모리츠 호텔에서 스키를 즐겼지만, 일반 국민들은 낡은 움집에서 힘들게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런 조건을 이용해 사회주의자들이 파고들었다. 팔레비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무차별로 탄압했다. 샤바크(SAVAK)라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반대파를 학대, 고문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야당을 폐쇄해 버렸다.

 

이란 혁명의 발단은 187817일 한 일간지에 실린 이란, 붉고 검은 식민화”(Iran and Red and Black Colonization)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이 글은 정부 당국자가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슬람 지도자 호메이니를 영국 스파이와 미친 인도 시인으로 비유하며 이란을 신식민주의와 공산주의에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국왕 팔레비의 백색혁명에 반대한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1964년 추방되어 터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은 이슬람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고, 시위자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후 팔레비 정권과 이슬람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

 

1979년 이란 혁명 과정의 무장 시위대 /위키피디아
1979년 이란 혁명 과정의 무장 시위대 /위키피디아

 

197899일 테헤란의 정유공장에서 노동자 700명이 팔레비 정부에 항의하며 파업을 일으켰고, 파업은 확산되어 11월에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되었다. 이란의 모든 석유생산시설과 정유시설이 가동을 멈췄다. 석유분야에 종사하는 37,000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란을 떠났다. 하루 150만 배럴의 석유생산이 중단되었고, 이듬해 116일 팔레비 국왕과 왕비는 이란을 떠나 해외로 망명했다. 국왕이 출국한후 호메이니가 이란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란에서 공급이 중단된 석유는 전세계의 4%에 불과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기름 생산을 늘리면 국제적 수급을 맞출수 있었지만 사우디가 19791월에 석유생산량을 200만 배럴이나 줄여버렸다. 산유국들의 공급감소가 유가 폭등을 유발해 국제유가는 1979년에 배럴당 15.85달러에서 39.5달러로 두배 이상 뛰었다. 2)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처음엔 중동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칼리드(Khalid) 국왕은 호메이니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사우디의 건국이념인 와히비즘을 이단이라고 비난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수니파의 이라크가 시아파의 이란을 공격했다. 1980922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대통령은 이란 공군기지를 폭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라크의 전투기는 이란 공군기지 10군데를 기습공격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투기는 활주로도 제대로 폭격하지 못했고, 이란의 격납고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자상군은 그나마 실력을 발휘했다. 이라크 육군은 이란 남부 유전지대인 후제스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침공 1주일 후인 922일 후세인은 일방적으로 전쟁중단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이라크의 협상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장기전을 준비했다. 전쟁은 장기화했다.

이 전쟁에서 후세인은 많은 우군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선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 아랍의 수니파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지했다. 이란은 시아파의 종주국이었고, 왕정을 유지하는 수니파 국가들이 이란 혁명의 여파가 밀려올까 두려워 이라크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이라크를 지지하며 무기를 팔았고, 미국과 소련도 이라크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미국의 경우, 이란의 친미정권이었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후 이란 혁명세력들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다수의 미국인을 감금하는 사태를 벌였기 때문에 이라크를 지원함으로써 이란 혁명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로 삼았다. 미국은 당시 후세인 정권의 무차별적인 화학무기 사용과 민간인 학살도 묵인했다. 소련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란과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이나 끌었다. 죽은 자가 50만명, 사상자도 비슷한 숫자였다. 100만명의 사상자를 낸 두 나라의 전쟁은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한, 승자 없는 전쟁으로 종결되었다. 3)

 

1979년 미국의 한 주유소 앞에 차량행렬이 주유를 기다리는 모습. /위키피디아
1979년 미국의 한 주유소 앞에 차량행렬이 주유를 기다리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석유시설이 파괴되고, 세계석유 공급량이 10%나 줄었다. 석유소비국들에는 또다시 석유대란이 벌어졌다. 주유소에는 긴 차량행렬이 이어졌다. 미국의 지미 카터 정부는 단계적 유가 인상을 단행했지만 두배로 기름값이 뛰는 것을 완충하지 못했다.

1973, 1979년 두 차례의 석유위기는 지구촌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국가들은 이 시기에 경기 침체를 겪었다. 미국은 1973~1975년 사이에 긴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다.

우리나라도 2차 오일쇼크 때인 1980년에 마이너스 성장(-1.2%)을 기록했다. 197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는 중화학공업 육성시책을 벌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석유파동으로 성장이 정체하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오일쇼크는 주요국의 정권교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선 중동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지미 카터가 재선에 실패해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백악관을 내주어야 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제임스 캘러핸에 맞서 보수당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승리했다. 대처는 물가 앙등이 유가 상승 때문이 아니라 노동당 정부의 과다한 재정지출를 감추기 위한 속임수라고 공격해 지지를 얻었다. 한국에서도 18년간 장기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시해사건으로 무너졌다.

 

일본의 시부시 석유비축시설 /위키피디아
일본의 시부시 석유비축시설 /위키피디아

 

각국은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를 찾았다. 석탄을 다시 사용하고 원자력 에너지를 상용화하는 방안이 연구되었다.

국제유가는 1980년대 중반들어 꺾이기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알래스카 유전이 개발되고, 나이지리아, 멕시코에서 새 유전이 발견되었다. 유럽에서도 북해 유전이 터졌다.

석유소비국들은 기름을 많이 쓰는 분야에 대한 절감 노력이 이어졌다. 미국 자동차 3사는 대형차 생산을 중단하고 에너지 절감형 차량으로 전환했다. 덕분에 미국, 유럽, 일본의 석유소비량이 1979~1981년 사이에 13%나 줄었다. 1986년에는 국제유가가 정점 대비 46%나 떨어졌고, 이후 20년간 저유가 시대를 맞게 된다. 4)

세계 각국은 두 번의 기름 파동을 겪으면서 석유 비축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땅 속 갚은 곳에 석유저장시설을 만들어 적어도 1년간 쓸 원유를 비축해 또다시 닥쳐올지 모르는 오일쇼크에 대비했다.

 


1) Wikipedia, Iranian Revolution

2) Wikipedia, 1979 oil crisis

3) Wikipedia, IranIraq War

4) Wikipedia, 1970s energy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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