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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전쟁
파라과이-볼리비아, 10만명 사망하는 전쟁 불구, 뚜렷한 유전 소식 없어
기름 난다는 소문에 일어난 남미의 차코전쟁
2020. 10. 02 by 김현민 기자

 

남미의 내륙국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는 19329월부터 19356월까지 전쟁을 치렀다. 3년에 걸친 전쟁에서 두 나라는 당시로는 최신 무기인 항공기, 탱크, 장갑차를 동원하고 기관총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살상을 벌였다. 죽은 사람만 볼리비아 5~8만명, 파라과이 35,000~5만명이다. 대략 계산해도 10만명이 죽었다. 볼리비아 인구의 2%, 파라과이 인구의 3%가 생명을 잃었다. 1)

두 나라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나라다. 스페인 후예들이 서로 대량살상의 전쟁을 벌인 이유는 바로 접경지대에 석유가 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사이에 그란차코(Gran Chaco)란 황무지가 있다. 면적은 78으로 한반도의 4배쯤 되는 지역이다. 반건조지대인 이곳엔 밀림과 늪으로 이뤄져 사람들이 거주하기 힘들었고, 원주민인 과라니(Guarani) 족들이 스페인 점령자들을 피해 살고 있었다. 경제적 가치가 없어 초기엔 볼리비아나 파라과이가 이 땅에 관심이 없었다. 2)

1928년에 그란차코 서쪽 끝부분, 안데스산맥 기슭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 개발자는 미국의 엑슨(Standard Oil of New Jersey)이었다. 엑슨은 그란차코에 엄청난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볼리비아가 그동안 무시하던 그란차코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다.

 

그란차코 지역 /위키피디아
그란차코 지역 /위키피디아

 

그 무렵 볼리비아는 태평양 출구를 영원히 잃었다. 1929년에 체결된 리마 조약(Treaty of Lima)에 의해 볼리비아는 태평양전쟁(1879~1883)에서 타크나(Tacna)와 아리카(Arica)를 페루와 칠레에 넘겨주고 내륙국이 되었다.태평양이 막하자 볼리비아는 대서양으로 나가는 출구를 찾았고, 그란차코를 얻어 강을 타고 수송로를 열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석유발견 소식은 두 나라의 국경분쟁을 촉발했다. 볼리비아는 미국계 스탠더드오일의 지원을 얻었고, 파라과이는 영국-네덜란드 합작사인 로열더치셀의 지지를 받았다. 남미 종속이론가들은 이 전쟁이 미국과 영국계 석유메이저들의 석유이권에 의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볼리비아와 파라과이는 영-미 석유메이저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실증적 연구자들은 볼리비아가 해양수로를 얻기 위해 파라과이를 침공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나라는 전쟁 후에도 그 지역에 석유탐사에 열을 올렸기 때문에 석유전쟁이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3)

 

차코 전쟁 분쟁지역 /worldatwar.net
차코 전쟁 분쟁지역 /worldatwar.net

 

1928년 파라과이가 볼리비아측 요새를 습격하자 볼리비아가 보복으로 파라과이측 요새를 보복공격했다. 범미회의((PanAmerican Conference)의 조정으로 일단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석유에 대한 욕심은 두 나라를 휴전 상태로 머물게 하지 않았다. 19326월에 양국이 전면전쟁에 돌입했다.

당시 인구나 병력 면에서 볼리비아 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전쟁 결과는 거꾸로였다. 파라과이 병사들은 적극적으로 싸웠지만 볼리비아군은 징집된 인디언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국가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또 파라과이인들은 지형과 기후에 익숙해 있었으나, 볼리비아군은 고산지대 출신으로 저지대 토양과 기후에 익숙하지 못했다. 전쟁 기간에 황열병, 말라리아, 이질등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사상자를 증폭시켰다. 독사와 해충에 물려 죽은 사람도 많았다.

1935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우루과이, 미국 등이 참여하는 국제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회의 중재에 따라 1938년 양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냈다. 차코 전쟁(Chaco War)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20세기 남미에서 일어난 최악의 전쟁으로 꼽힌다.

평화 협상에서 분쟁지역의 4분의3은 파라과이가, 나머지 4분의1은 볼리비아가 차지했다. 덩치큰 볼리비아가 상대적으로 작은 파라과이에게 패배한 전투였다.

 

차코 전쟁의 파라과이 군대 /위키피디아
차코 전쟁의 파라과이 군대 /위키피디아

 

전쟁 후 과연 이 땅에서 기름이 철철 흘러넘쳤을까. 전쟁이 끝나고 두 나라는 각자가 차지한 땅에서 석유채굴에 열을 올렸다. 파라과이에선 49개의 유정을 파헤쳤지만, 가스가 조금 분출되었을 뿐 기름은 나지 않았다. 미국의 엑슨과 러시아 콘소시엄이 담벼 들었지만 실망하고 돌아갔다. 4)

77년동안 그란차코에서 기름 한방울 나지 않았다. 석유회사들은 초기 탐사가 오류였다고 발표했다. 서구 석유회사의 잘못된 탐사 보고서에 10만명의 인구가 죽어 나간 것이다.

그러다가 201211월 그란차코의 파라과이 영토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나왔다. 페데리코 프랑코 파라과이 대통령은 감격에 넘쳐 차코 전쟁에서 죽은 3만명의 파라과이인들의 이름으로, 그란차코는 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석유보고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2014년 파라과이는 그란차코에서 첫 원유를 채굴했다. 볼리비아도 자기네들이 차지한 그란차코에서 가스를 발견했다.

하지만 발견된 유전의 매장량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파라과이는 아직도 아르헨티나와 미국,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석유를 전량 수입하고 있다. 이에 비해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두 번째 많은 천연가스를 생산한다. 주로 브라질에 공급한다.

파라과이는 아직 그란차코에서 원유가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현재 그란차코의 황무지는 소를 키우는 목장과 내무를 벌목하는 곳으로 남아 있다.

 


1) Wikipedia, Chaco War

2) worldatwar.net, The Gran Chaco War, 1928-1935

3) Wikipedia, Chaco War

4) Americas Quaterly, The Promise of Oil in Paragu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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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봤습니다 2021-04-02 23:44:21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