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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과 전쟁
독자적으로 군대 조직해 피우메 점령…무솔리니가 그의 방식 답습
이탈리아 파시즘③…원조 극우파 단눈치오
2020. 10. 19 by 김현민 기자

 

이탈리아 파시즘의 정신적 지주는 베니토 무솔리니에 앞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였다. 단눈치오는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고 1차 대전에서 직접 전쟁터에 뛰어든 전쟁영웅이였으며, 민간인 신분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잃어버린 영토 피우메(Fiume)를 되찾은 인물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무솔리니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위키피디아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위키피디아

 

그는 1863년 이탈리아 남부 아부르초주 페스카라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귀족의 딸과 결혼한 자산가 계급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천재적 감성으로 저널리즘과 귀족들의 살롱에서 인기를 얻어 문단의 중심적 존재로 부상했다.

19141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전쟁 참여를 주장했다. 그는 여러 집회에서 연합국에 가담해 이탈리아의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비행기를 발명한 미국 라이트 형제의 동생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와 친하게 지내며 비행기술을 배웠다.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 참여했고, 전쟁 말기엔 오스트리아 수도 빈까지 700마일을 비행기로 날아가 선전물(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다. 그의 무모함은 이탈리아인들의 열광적 찬사를 받았다. 1)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65만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95만명이 부상당했다. 산업시설은 붕괴되었고 경제는 연합국의 원조로 연명해 나갔다.

이탈리아는 1915년 연합국과 런던 조약을 체결할 때, 참전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의 티롤과 해안주(Littoral)를 돌려받는 조건에 합의했다. 하지만 엄청난 희생을 내며 참전한 결과는 초라했다. 전쟁이 끝난후 1919910일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이탈리아는 배제되었다. 이탈리아는 남티롤과 트리에스타, 이스트리아, 자다르를 확보했지만, 애당초 받기로 했던 달마치아 영토의 상당부분을 돌려받지 못했다. 연합국에 가담한 유고슬라비아측의 주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실망에 빠졌다. 그들은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이 아드리아해 동부 해안에 확보한 영토 모두를 넘겨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눈치오는 불구가 된 승리”(Mutilated victory)라는 표현을 쓰며 영국, 프랑스, 미국을 비난하며 민족주의적 감정을 충동했다.

 

1915년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가 회복하기로 약속한 영토 /위키피디아
1915년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가 회복하기로 약속한 영토 /위키피디아

 

파리평화회의 결과가 전달되자 단눈치오는 즉시 비정규군 2,600명을 동원했다. 퇴역군인과 민족주의자, 영토회복론자들이 대거 합세했고, 정규군도 일부 가담했다.

1919102, 그들은 달마치아의 해변도시 피우메로 행군을 했다. 그들이 피우메에 도착하자,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영국, 프랑스의 군대가 퇴각했다. 단눈치오의 의용군은 순식간에 피우메를 접수했다.

피우메는 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제카(Rijeka). 피우메는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투르크를 거쳐 합스부르크 영지로 되었다가 런던조약에 의해 크로아티아 영토로 편입되어 있었다.

단눈치오의 피우메 점령에 크로아티아가 반발했다. 크로아티아는 1차 대전 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와 연합왕국을 형성하고, 곧이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했다.

이탈리아는 피우메의 인구 88%가 이탈리아인이고, 나머지가 크로아티인이라고 주장했다. 피우메의 이탈리아인들은 단눈치오의 의용군을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단눈치오는 즉시 피우메를 이탈리아 왕국과 합병한다고 선언했다. 2)

 

1919년 9월, 피우메의 이탈리아인들이 단눈치오의 군대에 환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9년 9월, 피우메의 이탈리아인들이 단눈치오의 군대에 환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정부가 당혹해 했다. 조약이 아무리 부당해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탈리아가 조약을 위반한 결과가 되었다. 단눈치오의 의용군은 정식 군대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단눈치오에게 철군을 명령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피우메를 봉쇄하고 단눈치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단눈치오는 명령에 불복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탈리아 정부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을수 있는 합당한 절차를 밟으라는 것이었다. 단눈치오는 중재안에 저항했지만 결국 피우메의 미래를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1218일에 치러진 투표에서 놀랍게도 피우메 주민들은 이탈리아 정부안을 받아들였다. 투표 결과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피우메의 미래를 놓고 협상에 들어갔다.

 

피우메 /위키피디아
피우메 /위키피디아

 

그 사이에 단눈치오는 피우메를 카르나로 섭정국(Italian Regency of Carnaro)이란 이름으로 직접 통치했다. 그는 무정부주의, 파시즘, 민주공화국의 다양한 요소를 집어 넣어 헌법을 만들고 통치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짧지만 스스로 서울 여의도 3배쯤 되는 소도시(28)의 통치자가 되어 자신의 철학을 구현하려 했다.

그는 스스로를 두체(Duce)라고 불렀으며, 이익단체들로 국가를 구성하는 조합주의(corporatist state)를 채택했다. 비상조치를 발동할 때 두체가 독재자가 되는 입법안을 마련했다. 그는 로마제국의 인사법을 도입하고, 관사 발코니에서 연설하는 기교를 부렸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의 피우메 통치방식을 눈여겨 보았다. 그는 집권후 단눈치오가 한 방식을 거의 대부분 수용했다. 국가 통치자를 두체라 부르는 것, 조합주의를 채택한 것, 인사법 등을 무솔리니는 그대로 답습했다. 단눈치오는 무솔리니에게 세례 요한이나 다름없었다. 3)

 

단눈치오의 공화국은 15개월만에 종말을 고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국(Free State)의 지위를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도 이 합의에 동의했다. 단눈치오는 합의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규군은 도시를 접수하고 단눈치오와 그의 군대를 강제로 철수시켰다. 19201224~30일 사이에 양측에서 유혈충돌(Bloody Christmas)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눈치오의 군대가 철수한 이후 피우메 자유국(Free State of Fiume)에서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무솔리니가 1922년 권력을 접은 후 곧바로 이탈리아군을 투입해 피우메를 다시 접수했다. 4)

 

단눈치오와 의용군 /위키피디아
단눈치오와 의용군 /위키피디아

 

단눈치오의 독자적 영토회복 운동은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을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 넣었다. 극우파들은 스스로 군대를 조직해 정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사람이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로 전향한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1919323일 밀라노에서 200명의 회원으로 이탈리아 전투단(Italian Combat Squad)이란 파시스트 조직을 만들었다. 단눈치오의 거사에 자극받은 파시스트들이 단결을 추구하게 되었다.

1921119일 무솔리니를 비롯해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로마에 모여 전국파시스트당(National Fascist Party)을 결성했다. 파시스트당은 행동대원으로 검은셔츠단(Blackshirts)을 조직했다. 검은 셔츠는 1차 대전에서 명성을 날린 이탈리아 최정예부대 아르디티(Arditi) 부대의 군복 색깔에서 따왔다.

 

단눈치오는 피우메를 빼앗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이탈리아 파시스트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파시스트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1921813일에 정체불명의 괴한들에 의해 창문에서 내던져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단눈치오는 그해 10월에 있은 파시스트들의 로마 행진에 참여하지 못했다.

 


1) Wikipedia, Gabriele D'Annunzio

2) Wikipedia, History of Rijeka

3) Wikipedia, Italian Regency of Carnaro

4) Wikipedia, Free State of Fi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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