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공황과 전쟁
리비아, 에티오피아, 알바니아로 영토확장…영·불에 대항, 나치 독일과 협력
이탈리아 파시즘⑥…로마제국 복원의 망상
2020. 10. 22 by 김현민 기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새로운 로마제국을 건설해 과거 유럽의 지배자 위치로 돌아겠으며, 고대로마인들이 표현했듯이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로 만들어 제해권을 되찾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파시스트들은 고대 로마가 3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거쳐 차지한 옛 카르타고를 회복하겠다고 별렸다. 그곳은 시칠리아섬 건너편에 있는 튀니지로,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프랑스는 1830년에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고 1881년에 이웃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뒤늦게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여 리비아를 식민화했다.

무솔리니는 알제리와 리비아 사이에 있는 튀니지를 절반씩 나눠 갖자고 프랑스에 제의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튀니지를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았다.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무솔리니는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이 차지했던 지중해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파시스트들이 영유권을 주장한 곳이 지중해 상의 로도스 섬(Rodos Island)과 그리스 서해안의 코르푸섬(island of Corfu)이다.

로도스 섬은 베네치아가 400년 이상 지배했다가 오스만투르크에게 빼앗겼다. 1차 대전에서 오스만투르크가 패전국이 되자, 이탈리아 파쇼들은 신생 터키공화국의 영토를 규정하는 로잔 회의에 참여해 로도스섬을 영토화하는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이번에 그리스 반도 내에 베네치아 영토였던 코르푸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리스가 강하게 항의하며 국제연맹에 호소했다. 19238월 이탈리아 장군과 부하들이 그리스에서 살해된 사건이 알어나자, 무솔리니는 군대를 동원해 코르푸섬을 점령했다. 영국이 중재에 나서 이탈리아는 배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코르푸섬에서 철군했다. 이탈리아는 반대급부로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영국령 주바랜드(Jubaland)를 얻었다. 1)

 

이탈리아 제4의 해변 전략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제4의 해변 전략 /위키피디아

 

1930년대 들어 파시스트들은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냈다. 무솔리는 해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솔리니는 해군력을 증강시켜 1940년대엔 이탈리아 해군은 세계 4위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3면으로 둘러싸인 이탈리아 반도에 제4의 해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지중해 건너편 리비아였다.

이탈리아는 1911~12년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승리한 후 리비아의 트리폴리와 키레나이카(Cyrenaica, 벵가지 주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923년에 현지 부족들이 이탈리아 통치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벌였다.

1932년 무솔리니는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해 리비아 시르테(Sirte)에 상륙해 진압에 나섰다. 이탈리아 원정군은 잔혹했다. 그들은 화학무기를 사용했고, 항복한 군인을 포로로 삼지 않고 죽여버렸다. 시민들도 사살했다. 키레나이카에선 총인구 22만명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 베두인족에 대해선 인종청소를 단행해 10만명을 추방했고, 원주민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이탈리아인을 이주시켰다.

이탈리아군은 유목민들에게 생명줄인 동물들을 몰수하거나 내쫓아 버렸고, 원주민을 수용소에 몰아 넣었다. 수용소는 비위생적이었고, 어떤 곳엔 2만명의 베두인인들이 1남짓한 좁은 공간에 낙타와 동물들과 함께 뒤섞여 살아야 했다. 수용소가 1년후에 폐쇄되었을 때, 10만명중 4만명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2)

이탈리아는 이집트와 영국과 협상해 동쪽과 남서쪽의 영토를 얻어 리비아에 합병했다. 이 영토가 오늘날 리비아의 영토가 된다.

 

이탈리아의 리비아 영토 확장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의 리비아 영토 확장 /위키피디아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영토였던 스페인 내정에 깊이 간여했다. 스페인에 내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무솔리니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했다. 스페인 좌파들이 왕정을 몰아내려 하자, 무솔리니는 스페인 왕실과 민족주의자들에게 지지의사를 보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무솔리니는 이때다 싶어 스페인 남쪽 지중해상의 발레아레스 제도(Baleares, Islas)를 점령했다.

무솔리니는 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해 6만명의 대군을 파견했다. 프랑코 장군의 진영이 좌파진영을 진압하는데 이탈리아군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시스트 시기의 이탈리아 제국 /위키피디아
파시스트 시기의 이탈리아 제국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제국주의의 절정은 에티오피아 통치다.

이탈리아는 30년전인 1896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가(1차 이탈리아 전쟁) 대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무솔리니는 앞서 에드와 전투에서 에티오피아에 패배한 것을 설욕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탈리아는 호시탐탐 에티오피아 침공을 위한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1928년 이탈리아는 양국이 설정한 국경선 안쪽 웰웰(Welwel)이라는 오아시스에 군사요새를 건설했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의도를 비난했다. 193411월 에티오피아는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이탈리아 초소에 접근해 철수를 요구했다. 이탈리아군은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에티오피아군에서 107, 이탈리아군이 50명의 사망자가 각각 발생했다.

이탈리아는 이 사태의 책임을 에티오피아에게 전가하고 전쟁을 개시했다. 1935103일 이탈리아는 선전포고도 없이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에 주둔한 병력을 에티오피아 영내로 진입시켰다. 에티오피아군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탱크와 야포, 항공기를 보유한 이탈리아군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에티오피아군을 격퇴시키고 서서히 고원지대로 조여갔다.

이듬해인 193655일 이탈리아군은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국왕 비토르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포했다. 3)

 

1940년 5월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1940년 5월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 /위키피디아

 

무솔리니는 19346월에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그는 처음에 히틀러의 독일이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지 못할 것을 보았다. 무솔리니는 나치 게르만족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무력점령이 성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노골적으로 무솔리니 정권을 반대했다.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가 주도하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히틀러에 기울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직전인 1939년에야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결합이 이뤄졌다. 독일이 프랑스의 알사스-로렌을 쳐들어가면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남쪽 니스(Nice)와 코르시카섬을 빼앗는다는 묵계가 이뤄졌다. 4)

 

19394월 무솔리니는 아드리아해 건너편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전쟁은 닷새만에 끝났다. 무솔리니는 에마누엘레 국왕에게 알바니아 국왕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어 522일 베니토 무솔리니와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동맹관계임을 명시하는 강철조약(Pact of Steel)을 체결했다.

9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공격하고, 영국이 참전하면서 2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자동적으로 독일 편에 서서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탈리아 나치 정권의 끝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1) Wikipedia, Italian Empire

2) Wikipedia, Italian Libya

3) Wikipedia, Second Italo-Ethiopian War

4) Wikipedia, Italian imperialism under Fascis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