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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
유럽 최초로 대서양 진출…바다에 대한 미신 극복, 대서양 군도 영토화
포르투갈사④…대양의 개척자, 항해왕자 엔리케
2020. 11. 11 by 김현민 기자

 

포르투갈은 지정학적으로 대서양과 싸워야 하는 위치에 있다. 유럽 최서단의 나라로 서쪽과 남쪽 해안은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지중해에서도 벗어나 있다. 긴 해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해술이 발달했고 바다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육로로는 적대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은 1248년에 리콩키스타(Reconquista)를 완성한 이후 바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에는 강 하구에 리스본을 비롯해 좋은 항구가 많았다. 포르투갈인들은 일찍부터 영국, 플란더스(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한자동맹 도시와 교역하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화폐 경제가 형성되고 농촌에서도 상품성 작물 재배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지중해 서부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장악했고 동부와 남부는 오스만투르크와 이슬람 해적들이 차지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뒤늦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동방거래는 묶이다시피 했다. 향료며, 금의 수입이 이슬람 상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1)

 

세우타 전투 /위키피디아
세우타 전투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해양으로 진출했다. 포르투갈의 르네상스를 연 왕은 아비스 왕조(Aviz dynasty)의 초대 국왕 주앙 1세였다. 이웃 카스티야의 공격을 물리치고 독립과 영토가 굳어진 다음, 주앙의 왕자들은 지브롤터 건너편의 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를 공격하지고 주장했다.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왕자는 넷째 엔리케였다. (엔리케 왕자에 관한 별도 기사 참조)

세우타는 지브롤터 해협 남쪽에서 위치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가는 길목의 숨통을 조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이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BC 1세기에 거점을 만들었다. 서기 42년에 로마제국이 이 땅을 차지해 영토로 삼았고, 중세에는 반달족의 나라가 되었다가 771년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다.

1415821일 아침 주앙 1세는 왕자들를 이끌고 세우타를 기습공격했다. 200대의 함대에 올라탄 포르투갈군 45,000명의 포르투갈군은 순식간에 아랍 요새를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엔리케 왕자는 부상을 당하면서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2)

 

세우타와 탕헤르 /위키피디아
세우타와 탕헤르 /위키피디아

 

엔리케(Henrique, 1394~1460) 왕자의 신화는 과장되고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흔히 엔리케는 항해왕자(Prince the Navigator)로 불린다. 당대에는 그렇게 부른 사람이 없었다. 다만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자들이 처음 항해왕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영국인들이 이를 인용하면서 국제적으로 그의 존재가 재가공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그는 해양개척의 선구자로 부각된 것이다.

엔리케도 실패의 이력이 있다.

세우타는 포르투갈이 점령하기 이전까지 아랍물산이 집중되는 상업도시였다. 세우타를 빼앗기자 아랍인들은 거래지를 바꾸었다. 모로코 북부에 있는 탕헤르(Tangier)에 새로 시장이 형성되고 세우타는 빈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엔리케 왕자는 부왕 주앙 1세에게 탕헤르를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모로코에는 마리니드 술탄국(Marinid Sultanate)이 지배했고, 술탄국 내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위계승자인 두아르테와 페드루등 왕자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일단 원정계획은 중단되었다.

두아르테가 왕위를 이어받자, 엔리케는 동생 페르난두를 끌어들여 탕헤르 공격을 단행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해 마침내 원정이 성사되었다.

1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1437년 여름 탕헤르 원정이 전개되었다. 엔리케가 총사령관을 맡고 동생 페르난두가 참여했다. 포르투갈군은 탕헤르를 포위해 920일 첫공격을 시도했다. 세차례나 탕헤르를 공격햤지만 마리니드의 저항에 부딛쳐 실패했다. 드디어 마리니드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엔리케의 군대는 오히려 마리니드군에 포위되어 보급로가 차단되고 굶주리게 되었다. 절반 이상이 전사하고 3,000명만 남았다. 말을 잡아먹으며 버텼지만 식수가 극히 부족했다.

엔리케는 협상을 제의해 안전한 철수를 보장받았다. 101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조건은 세우타를 돌려주고 동생 페르난도와 일부를 인질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엔리케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귀족회의(코르테스)는 세우타를 돌려주는 조건의 정전협정 비준을 거부했다. 페르난도 왕자는 다른 방도로 찾기로 했지만 그의 구원노력은 실패했다. 페르난도는 1443년 모로코 수용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엔리케 왕자 /위키피디아
엔리케 왕자 /위키피디아

 

탕헤르 원정에 실패한 이후 엔리케는 중앙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영지인 알가르베(Algarve)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항해자들을 모으고 해외 개척에 나섰다. 마데이라(Madeira), 아조레스 열도(The Azores), 카나리아 열도(Canary Islands)는 그가 주도한 탐험대에 의해 개척되고 식민화한 섬들이다. 대서양에 있는 이 섬들은 지금도 포르투갈령으로 남아 있다.

 

엔리케 시절만 해도 항해자들은 모로코령 서아프리카에 있는 보자도르 곳(Cape Bojador) 이남으로 내겨가길 두려워 했다. 그곳에서 더 가면 바다의 괴물이 있다거나, 낭떠러지가 있다거나, 뜨거운 태양에 타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다.

탐험가 질 이아네스(Gil Eanes)가 이 미신에 도전했다. 엔리케가 그를 후원했다. 엔리케의 도움으로 배와 선원을 얻은 이아네스는 1433년 라고스 항을 떠나 미지의 바다로 나갔다. 그는 카나리아 군도를 발견하고 그곳 주민을 노예로 잡아 돌아왔다. 이듬해 엔리케는 또 그의 출항을 지원했다. 이아네스는 보자도르 곳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이아네스의 탐험은 적도 이남에 대한 공포를 씻어주었다. 세상의 끝이라던 그곳이 더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435년 아이네스는 한번 더 탐험에 나섰다. 보자도르 곳 남쪽 240km까지 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항해에서 그는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엔리케가 지원한 탐험대는 금을 찾아 나섰다. 그는 모로코 남쪽 어딘가에 금이 생산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또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전설적인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얘기에도 감명받았다.

엔리케가 후원하는 탐험대는 조금씩 조금씩 아프리카 서해안을 내려가 1448년에 세네갈강 하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금이 있었다. 지금도 그곳을 황금 해안(Gold Coast)이라고 부른다. 포르투갈인들은 황금해안에서 사금을 채취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포르투갈은 이 금으로 크루자두(cruzado)라는 금화를 제조했다.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노예무역에도 손을 댔다. 그이전의 노예무역은 주로 아랍인들이 유럽인이나 흑인들을 잡아 거래하면서 이뤄졌다. 유럽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거래한 것은 포르투갈인이 처음이다.

엔리케의 지원을 받은 안탐 곤살베스(Antam Gonclvez)1441년에 금과 함께 10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처음으로 포르투갈에 데려왔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그들을 데려다 새로 개척한 아조레스와 마데이라 제도의 밀과 사탕수수 재배에 투입했다. 4)

 

리스본에 세워진 발견기념비.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엔리케 왕자다. /위키피디아
리스본에 세워진 발견기념비.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엔리케 왕자다. /위키피디아

 

엔리케 왕자는 유럽대륙 끝자락에 붙은 포르투갈을 해양국가로서의 틀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그가 죽은 후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인도네시아로 진출했다. 그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당대 국왕이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에 남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1960년 엔리케 사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리스본에 발견기념비를 세운 것도 그런 맥락이다.

 

 

1) Wikipedia, History of Portugal (14151578)

2) Wikipedia, Conquest of Ceuta

3) Wikipedia, Battle of Tangier (1437)

4) Wikipedia, Prince Henry the Navig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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