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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반신권에서 아이디어…‘폰지 사기’란 용어를 만든 최악의 사기범
찰스 폰지, 평생을 피라미드 사기로 살았다
2020. 12. 17 by 김현민 기자

 

폰지 사기란 말이 있다. 투자자들에게 높은 배당이나 수익을 주겠다고 속이고 투자를 받아, 그돈으로 또다른 투자자를 모은다.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약속한 배당이나 수익을 줄 때에는 투자이익금으로 주지 않고, 나중에 투자한 사람들의 돈으로 지급한다. 이렇게 거액의 돈을 모아 먹고 튀는 사기 수법이다.

폰지 사기는 20세기초 찰스 폰지(Charles Ponzi, 1882~1949)라는 유명한 사기꾼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1920년대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1920년대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찰스 폰지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대학 4년을 방학으로 생각하는 돈 많은 친구들과 사귀며 술집과 카페에서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빈털터리가 되어 미국에 가면 큰 돈을 번다는 생각에 1903년 보스턴에 도착했다. 그때 그의 손에 쥐어진 돈은 2달러50센트였다.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도박을 벌이다가 돈을 다 잃었기 때문이다.

폰지는 미국 동부에서 식당 일을 하며 전전하다가 고객 거스름돈을 떼먹다가 해고되고, 1907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갔다.

몬트리올에서 방코 자로시(Banco Zarossi)라는 은행에 은행원으로 취직했다. 이 은행은 이탈리아인 루이지 자로시(Luigi Zarossi)가 창업한 은행으로,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 폰지는 이 은행에서 이른바 폰지사기(Ponzi scheme) 수법을 배웠다.

자로시 은행은 당시 예금금리보다 두배나 높은 6%의 이자를 주고 예금자를 모았다. 이 은행에 예금자가 많이 몰렸는데, 자로시는 수익금에서 이자를 주지 않고 신규고객의 예금에서 이자를 메웠다. 아랫돌을 빼 윗돌을 메우는 방식으로 영업을 하다가 은행은 결국 파산하고 자로시는 멕시코로 도주했다.

폰지는 몬트리올에 남아 자로시의 남은 가족을 돌보다가 자로시 은행의 고객인 캐나디언 웨어하우징(Canadian Warehousing)의 빈 사무실에 들어가 그 회사의 423.58 달러 어치의 어음을 발행해 현금화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몬트리올 감옥에서 3년간 살았다. 이 때 그는 어머니에게 교도소장 특별보좌역으로 채용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1911년 폰지는 석방되어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이탈리아인 불법이민자의 입국을 알선하다가 애틀란타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그는 또다른 스승을 만났는데,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칠리계 범죄단체 두목 이그나지오 루포(Ignazio Lupo)와 월스트리트의 금융사기범 찰스 모스(Charles W. Morse). 그는 이 두 사람에게서 폰지 사기의 구조를 완성한다.

 

영국에서 발생된 1실링 짜리 국제반신환(1959) /위키피디아
영국에서 발생된 1실링 짜리 국제반신환(1959) /위키피디아

 

5년을 복역하고 석방된 폰지는 1919년 여름에 보스턴에 사무실을 차리고 광고사업을 하기 위해 유럽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서신을 주고받던 중에 폰지는 편집에 붙은 국제반신권(international reply coupon)에 관심을 가졌다.

국제반신권은 국제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회원국들 사이에 국제우편을 교환할 때에 사용하는 우표다. 이 우표를 붙이면 수신인이 발신인에게 답신을 할 때 추가 우편요금을 면제한다. 이 우표는 발행국마다 자국 화폐 가치로 발행되었다.

폰지는 여기서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당시 이탈리아에선 1차대전 직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리라화의 가치가 절하되었고, 미국 달러는 안정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국제반신권을 사서 미국에서 팔면 엄청난 아비트리지(arbitrage) 이익을 얻을수 있었다.

 

폰지는 은행에서 대출받아 국제반신권 거래를 하려 했지만 신용불량을 찍혀 대출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사기에 뛰어든다. 그는 증권개래사(Securities Exchange Company)라는 그럴듯한 회사를 차려 투자자를 모집했다. 그는 90일 후에 두배의 이익을 불려 돌려주겠다고 했고, 얼마후 한발 더 나가 45일 후에 50%, 3개월후에 두배를 주겠다고 꼬여였다.

첫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대로 이익금을 불려 지급했다. 그 돈은 다음에 투자한 사람들의 돈에서 빼냈다.

3개월만에 돈을 두배로 불려준다는 말에 엄청난 투자자들이 몰려왔다. 19202월에 5,000 달러였던 모집액이 다음달에 25,000 달러로 불어났다. 폰지는 직원들을 뉴잉글랜드, 뉴저지로 보내 투자자들을 모급했다. 이윽고 그해 5월에 42만 달러로 팽창했다. 이 돈은 2019년 달러가치로 환산하면 540만 달러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기 발생했다. 그가 투자받은 돈으로 국제반신권을 사려면 타이태닉호를 가득채울 정도의 우표가 필요한데, 국제적으로 그 정도의 물량이 거래되지는 않았다.

폰지의 사기에 의심을 품은 일부 투자자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폰지는 수사당국을 구워 삶아 용케 피해나갔다. 하지만 언론은 피하지 못했다. 1920724일 보스턴포스트지가 폰지의 사기를 보도한 이후 시리즈물로 폰지의 돈사냥 구조를 파헤쳤다.

 

이 보도후 투자는 끊기고 투자자는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서 폰지의 회사는 파산했다. 그는 남은 돈을 풀어 투자자들에게 돌려줬다. 투자자들에게 돌아간 돈은 1달러당 30센트였다. 그는 사기죄로 체포되었다. 피해금액은 모두 2,000만 달러로 현재가치로 22,500만 달러에 이른다.

 

플로리다 타임스에 실린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플로리다 타임스에 실린 찰스 폰지 /위키피디아

 

폰지는 1925년에 풀려난후 플로리다에서 60일에 200% 수익을 약속하며 부동산을 대상으로 피라미드 사기를 쳤다. 대상 토지는 악어가 우글거리는 플로리다 늪지대였다. 그는 그곳에서 1년형을 받았지만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는 보석기간에 플로리다를 여행하다가 보안관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1934년에 감옥에 풀려나 이탈리아로 추방됐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사기 행각을 벌였지만 더 이상 이득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 브라질에서 이탈리아 항공사인 알라 리토리아의 에이전트로 취직하고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말년에는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1949년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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