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아틀라스뉴스
뒤로가기
철의 세계
러일전쟁 중 개설…경의선과 연결하기 위해 표준궤로 개축
동북아 철도전쟁⑤…간도와 맞바꾼 안봉선
2020. 12. 26 by 김현민 기자

 

18942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만주의 러시아군 주둔지를 공격했다. 그해 4월에 압록강 연안에 포진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5월에 봉황성(鳳凰城)에 진입했다. 일본군은 근처 본계호탄광(本溪湖炭鑛)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그곳에서 생산된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봉천(奉天)~안동(安東) 간 철도건설을 구상했다.

일본군은 이 철도 부설을 위해 철도대대를 급조해 810일 압록강 입구 안동현에서 기공식을 가진 후 113일까지 3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봉천~안동간 안봉선(安奉線) 303km를 건설했다. 철로는 궤간이 좁은 협궤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은 러시아가 건설한 남만주철도 가운데 장춘(長春)~대련(大連) 구간 704km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지선까지 포함하면 849km나 되었다. 이에 더해 일본은 전쟁기간에 서울~신의주간 경의선 철도를 완공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남만주철도, 경의선, 안동선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 문제는 경의선은 표준궤였고, 남만주철도는 러시아식 광계, 안동선은 협궤였다. 남만주철도 남부구간의 모든 권리를 러시아로부터 양도받았기 때문에 표준궤로 개축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군은 전쟁을 빌미로 중국인들의 토지를 무단점거해 안동선을 건설했다. 일본은 안동선 구간의 권리를 정식적으로 인정받아 표준궤로 개축해야 했다.

 

만주철도와 한반도 북부 철도 /위키피디아
만주철도와 한반도 북부 철도 /위키피디아

 

일본이 경의선~안봉선~남만주 철도를 단일궤도로 구축하려는 것은 원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눈에는 한반도가 대륙을 연결하는 다리였고, 한반도 철도와 대륙의 철도를 단일 궤폭으로 연결해 중국 만주와 본토로 진출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육군의 대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부산~의주 철도는 동아시아 대륙으로 통하는 대도로서 장차 중국을 횡단하고 인도에 도달하는 철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경부-경의선과 대륙철도를 연결하는 고리에 안봉선이 있었고, 이 철도를 군사적, 경제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컸다.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일본과 청국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와 청국 직예총독 위안스카이(袁世凱)19051222일 만주철도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는 남만주철도 남부구간에 대한 권리를 러시아에서 일본으로 양도하고, 안동~봉천 구간의 철도를 일본이 상업화물 운송용으로 변경하는 것을 인정하는데 내용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안봉선 개축에 관한 조약의 해석에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일본측은 중국이 협약문에 안봉선의 협궤를 표준궤로 확대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해석했다. 이에 비해 청국은 기존에 군용으로 깔아 놓은 협궤철도를 약간 보완하는 것을 인정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두 나라가 해석을 달리하는 가운데 일본은 1907년 일방적으로 안봉선의 표준궤 변경을 추진하면서 중국인들의 사유지를 무단으로 점거했다. 청나라가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과의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다.

 

청국이 선택한 것은 남만주철도의 경쟁노선 건설이었다. 청나라는 영국자본을 끌어들여 1907년 신민에서 흑룡강성 치치하얼까지 철도 부설을 추진했다. 중국측의 의도는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와 나란히 노선을 깔아 중국내 화물과 여객을 모두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측 병행노선을 저지해야 했다.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며 뺏은 남만주철도가 무력화되어 적자노선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중국측 병행노선의 건설에 동의할수 없다는 입장을 청조에 전달했다. 청나라는 중국의 철도부설은 내정에 관한 것이므로 일본이 개입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만주의 철도 문제로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첨예하게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1909년 미국 국무장관 녹스(Philander C. Knox)는 만주철도 중립화 방안을 제안했다. 내용인즉, 만주에서 중국의 주권 인정, 무역상의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전제로 각국이 소유하고 있는 기존철도와 예정철도를 중국에 넘기되 필요한 자금을 국제신디케이트에서 부담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중립화 방안은 만주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기득권을 포기하하고 미국 자본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으로 미국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와 일본은 이 제의에 동의하지 않았고 녹스의 제안은 무산되었다.

 

만주국 시절의 안동역(安東驛) /위키백과
만주국 시절의 안동역(安東驛) /위키백과

 

중국측은 여전히 안봉선의 표준궤 확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이슈가 등장했다. 바로 간도(間島) 문제였다.

간도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부지역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원으로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고향이었던 곳을 봉금(封禁) 지역으로 선포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금지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가 개간하고 그곳을 간도라 불렀다. 간도는 조선 중기부터 국경 문제로 청과 조선 사이에 국경분쟁 지역이 되어 왔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일본 통감부는 만주 용정(龍井)에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두어 그 지역을 대한제국 영토로 인정했다. 일본도 만주 일부가 조선 땅임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간도보다는 만주 철도 연결을 중시했다. 190926, 주중 일본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는 청국에 만주에서 일본의 철도 부설권과 광산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의 중국 영유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청나라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가로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아울러 남만주철도와의 병행선 부설 계획도 포기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과 청나라는 190994일 간도협약을 체결한다. 일본은 간도를 내주고 안봉선과 함경도 회령에서 만주 장춘(長春)을 연결하는 길회철도(吉會鐵道) 부설권을 얻었다. 아울러 안봉철도 주변에 있는 푸순(撫順)탄광을 비롯해 여러 광산의 채굴권도 획득했다. 간도협약이 체결된 이후 안봉선 개축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척되었다.

 

중국측에서 본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중국측에서 본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그런데 안봉선과 경의선을 연결하려면 물살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압록강에 철교를 놓아야 했다.

압록강은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철도 개설 이전에는 수운으로 물류를 유통했다. 압록강은 7월 초순부터 8월 하순까지 여름엔 홍수가 빈번하고, 12월 초순부터 3월말까지 결빙해 선박 운항이 불가능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에서 철교를 놓는 것도 난공사였다.

압록강철교 가설은 러일전쟁 중에 논의되었다. 일본은 19052월 철교 가설을 위해 설계와 예산 계획을 세우고, 하저지질 조사, 수심 측량, 유수량 관측 등을 실시하고, 7월에 설계도 및 예산서를 확정했다. 당초 압록강철교는 단선철도, 복선철도, 단선철도 양측에 인도 가설 등 세가지 안이 논의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안이 채택되었다.

압록강 철교는 19099월에 착공되어 191110월에 완공되었다. 안봉선도 191111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안봉선과 압록강철교가 완성되면서, 일본은 조선의 경부선과 경의선, 만주 철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활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한반도를 다리로 삼아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게 된다.

현재 안봉선은 중국에선 심단선(瀋丹線)으로 불린다. 안동(安東)이 단동(丹東)으로, 봉천(奉天)이 심양(瀋陽)으로 지명이 변경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참고자료>

한국일보, [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안봉선(安奉線)

김지환, 부산에서 만주에 이르는 직행열차, 2014, 학고방

이철우, 일본의 중국 및 만주침략과 남만주철도, 2008, 리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