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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세계
일본, 철도 앞세워 만주 침략…길회선과 나진항 통해 직항로 개설
동북아 철도전쟁⑥…만철과 만주사변
2020. 12. 27 by 김현민 기자

 

한중일 지도를 펼쳐놓고 도쿄에서 만주의 심장 장춘(長春)까지 가장 빨리 가는 최단길을 선택한다면 철도로 동해안으로 간 다음 해로로 나진으로 가서 나진에서 장춘으로 가는 길이다. 오사카를 기준으로 할 때, 일본 내륙철도를 거쳐 동해로 빠져 나진~장춘 철도로 갈 경우, 대련까지 해운을 이용하고 대련~장춘간 철도로 가는 경우보다 거리로 660~730km가 줄어들고, 수송 시간으로 20시간 단축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은 장춘에서 회령을 거쳐 함경북도 해안까지의 철도공사를 서두른다.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최단코스를 개척하고, 아울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항과 동청철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본~만주 사이 철도 및 해상로 / 그래픽=김현민
일본~만주 사이 철도 및 해상로 / 그래픽=김현민

 

1905년 러일전쟁 직후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일본은 요동반도 남단 여순항과 대련항 주변 지역의 조차권과 러시아로부터 남만주철도 중 장춘~대련간 704km를 포함해 849km의 철도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철도 권리에는 연변의 부속지와 광산권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만주를 가로지르는 긴 띠의 영토를 획득하게 되었다.

만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농산물이 풍부하고 지하자원도 많다. 일본은 러시아를 제압한 후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하는 전략을 취했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중국을 차지해야 하고, 중국을 얻기 전에 만주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가 일본 군부에 먹혀들어갔다.

1906년 일본은 대련과 여순 조차지를 관동조차지로 개명하고 총독을 파견했다. 총독의 관할구역에는 조차지 뿐 아니라 철도, 광산이 포함되었다. 일본은 이 조차지를 통제하기 위해 관동군을 편성해 파견하고, 총독이 사령관을 겸했다. 요동 조차지와 철도가 관동군의 통제에 넘어갔다.

일본은 만주 철도를 통제하고 경영하기 위해 1906년말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에 영업을 개시했다. 만철은 일본정부가 50% 지분을 갖는 반관반민 형태를 띠었으나, 사실상 국영기업으로 운영되었다.

철도는 일본이 만주를 경제적으로 침략하는 통로가 되었고, 만철은 만주를 중국 영토에서 분리해 일본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도구였다.

만철은 철도 뿐 아니라, 철도 주변의 도로, 수로, 전기 및 가스, 숙박시설, 상점, 물품 교역, 교육기관, 병원, 공장, 농장, 탄광 등 부대사업도 운영했기 때문에 사실상 거대 재벌이나 다름없었다. 1914년 자산이 21,000만원으로, 일본의 중국 직접투자 가운데 50%, 만주 투자의 80%를 차지했다.

만철은 푸순(撫順)탄광 채굴권도 가지고 있었고, 안산제강소(鞍山制鋼所)도 보유했다. 일본은 만철이란 거대기업을 통해 만주 경제를 장악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주식회사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으나, 만철은 영국과 네덜란드 제국주의 첨병이었던 동인도회사와 다를 게 없었다. 관동도독부, 관동군사령부, 일본영사관, 만철은 따로 떨어진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이들은 경제적 침탈을 통해 만주를 석권하고 현지에서 중국인들의 분란을 유도한 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단계적 전술을 전개했다.

 

남만주철도회사 본사(대련) /위키피디아(일본어판)
남만주철도회사 본사(대련) /위키피디아(일본어판)

 

만철은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간도를 중국에 떼주는 조건으로 안봉선(安奉線) 표준궤 작업을 얻어내고 길회선(吉會線) 부설권을 얻어냈다.

안봉선은 신의주 건너편 안동(安東, 후에 丹東)에서 봉천(奉天, 후에 瀋陽)을 연결하는 철도인데, 1911년에 완공되었다. 이 철도는 그해 압록강철교 준공과 함께 부산에서 봉천까지 표준궤로 연결했다.

일본이 그 다음에 노린 것은 길회선이었다. 장춘~길림(吉林)까지 길장선(吉長線) 128km1912년에 완공되었으므로, 길림에서 함경북도 회령까지 철도(길회선)를 놓는 놓으면 한반도 북부를 경유해 만주 심장부로 철로가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일본이 동해를 가로질러 장춘으로 가는 철로를 구상한 것은 러일전쟁 전부터였다. 그들은 1902년 러시아 동청철도측과 협상해 장춘~길림 노선을 일본 자본으로 부설하기로 협정을 체결했다. 이 철도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에 착공해 1912년 준공되어 운행을 개시했다.

길회철도는 길장철도의 연장선으로 궁극적으로 함경북도 동해안과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그 기회를 만주군벌 장쩌린(張作霖)이 만들어 줬다. 장쩌린의 봉천파(奉天派) 군벌은 베이징 주변의 직예파(直隷派) 군벌과 1922, 1924년 두 차례에 걸쳐 전쟁(봉직전쟁)을 벌였는데, 장쩌린은 전쟁비용을 조달해야 했다. 이 틈을 일본이 비집고 들어가 길림~돈화(敦化) 210km의 철도 부설권을 따내고, 공사비 1,800만원 가운데 600만원을 장쩌린에게 건넸다.

만철은 19266월에 길림~돈화 철도를 착공해 1928년에 완공했다.

19286월 장쩌린이 열차를 타고 봉천 근처에 이르렀을 때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 봉천군벌은 장작림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의 손에 넘어갔다. 장개석(蔣介石)이 주도하는 국민당 정부의 북벌이 시작되면서 장쉐량은 돈이 궁해졌다. 이때 또 일본이 장쉐량에게 500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돈화~도문(圖們)간 돈도(敦圖)철도를 비롯해 여러 철도부설권을 얻어냈다.

도문은 두만강을 낀 중국측 도시로, 강을 건너면 조선 함경북도 회령(會寧)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장춘에서 함경도 해안에 이르는 철로를 건설하게 된다.

 

만주철도 노선 /위키피디아
만주철도 노선 /위키피디아

 

일본이 만주에서 야금야금 철도를 부설하자 중국인들이 중국 자본과 기술로 철도를 부설하려는 철도자판운동(鐵道自辦運動)을 대규모로 전개했다. 봉천, 길림, 하얼빈, 여순, 대련에서는 군중집회가 열리고, 시위대들은 조차지 회수, 불평등조약 철폐를 요구했다. 여론은 일본과 야합하는 장쩌린과 그의 아들 장쉐량을 비판했고, 장씨 부자도 민심에 등을 돌릴수 없었다.

중국의 민족자본가들은 일본의 만주철도, 러시아의 동청철도에 대항하는 철도를 부설해 나갔다. 일본은 남만주철도와 경쟁하는 병행선 금지 협약(1905)에 어긋난다며 중국 정부에 항의했지만 중국 정부는 자판운동에 의한 철도 부설을 은근히 지원했다. 1921~1931년 사이에 중국 정부 또는 지방정부, 민간이 건설한 철도는 10개 노선으로 1,500km를 넘었다. 중국인들은 가격인하 등을 통해 만철이 경영하는 철도의 재정을 악화시켰다.

중국의 자판철도와 일본의 만철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만철의 운송량이 감소했고, 1930년에는 수송량이 3분의1이나 감소했다. 이듬해 만철은 경영난으로 2,000명의 종업원을 해야 했다.

 

만철의 영업부진과 중국인들의 자판운동은 일본 군부를 자극했다. 특히 관동군은 도쿄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반독립적으로 지위를 누렸다. 그들은 장쩌린 부자를 믿지 못했다. 뇌물을 줄 때는 잘 받아먹으면서, 중국인들의 자판운동에 부응하고 있는 장씨 부자가 일본 군부의 눈에는 가시처럼 보였다.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혼조 시게루(本庄繁)의 관동군 3인방은 장쉐량의 만주군벌을 타도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의 음모에 따라 1931918일 밤 2220, 관동군 1개 분대는 봉천 북쪽 7.5km 지점 류타오후(柳条湖)를 지나는 철도를 폭파시켰다. 그들은 중국인들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했다면서 장쉐량의 봉천 사령부를 공격했다. 류타오후 폭파사건과 앞서 장쩌린 폭사사건은 2차 대전후 전범재판에서 모두 관동군 소행임이 밝혀졌다.

류타오후 사건은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되었고, 1932년 일본 관동군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를 옹립해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은 장춘을 수도로 정하고, 신경(新京)이라 개명한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관동군의 봉천 진입 /위키피디아
1931년 9월 18일 일본관동군의 봉천 진입 /위키피디아

 

만철은 만주국에서 철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독점적 세력을 유지했다. 길회선은 본국 수도와 만주국 수도를 직통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철로가 되었다.

일본은 길회선과 함경북도 회령 사이에 철교를 놓고 함경북도 해안을 연결할 요량으로 항구를 물색했다. 항구 후보지로 나진, 청진, 웅기를 올려 놓고 검토작업을 했다.

청진은 철도를 놓을 거리가 길고, 수송능력에 제한이 있다는 단점이 제기되었다. 웅기는 앞바다에 풍랑이 세고 항구 수용 능력이 500~600만톤에 불과하다는 결점이 있었다. 길회선의 종단항으로 나진이 가장 유리했다. 나진으로 결정하는데 일본 군부의 의견이 먹혔다는 견해도 있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항에 대항하기 위해 나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군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일본은 나진~회령 사이에 직통철도를 부설키로 했다. 1932511일 일본은 나진항을 종단항으로 결정했다. 철도 부설과 항만 건설은 1933년에 착공해 1937년에 완성한다.

일본 총리를 역임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종전에 유럽에 가려면 블라디보스톡을 거처야 했으나, 길회선이 완성된 이후 회령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할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든 화물이든 모두 우리 영토를 거쳐야 하며, 따라서 동양의 교통대동맥을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이군호, 일본의 중국 및 만주침략과 남만주철도, 2008, 리북

김지환, 일본은 왜 간도협약을 체결했나, 2014, 학고방

이매뉴얼 C.Y. , -현대 중국사(하권), 2013, 까치글방, P671~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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