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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세계
일본, 만주 공략 위해 부설…6·25 때 폭파, 그후 북·중 우호의 다리로
동양제일 국경 명물이던 압록강철교…철로 옆 인도
2021. 01. 01 by 김현민 기자

 

일본이 조선에 경의선(京義線)을 건설하고 만주에 안동(安東)~봉천(奉天) 철도를 급조한 후에 두 철도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다리가 압록강철교다. 이 다리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킨 후에 만주에 눈독을 들이기 위해 가장 먼저 추진한 철교였다.

철교 가설을 위한 구상은 러일전쟁 중에 시작되었다. 1904년 일본 임시군용철도감부는 경의선 종점을 의주(義州) 구도심에 설치하지 않고 그곳에서 20km 하류에 있는 늪지대로 정했다. 일본이 경의선을 건설한 것은 조선의 인적·물적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그들은 군사전략상 경의선을 놓았고, 건너편 안동(安東)을 연결할 철교를 놓기 적합한 지점에 경의선 종점으로 설정한 것이다. 일본은 그곳을 신의주역이라고 정했다.

조선시대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는 연결점은 의주였다. 신의주역이 들어설 자리는 홍수가 일어날 때마다 압록강 탁류가 잠기는 갈대밭 늪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경의선 종착역이 신의주에 형성되면서 의주의 도시기능이 신의주로 옮겨가 1924년 도청소재지가 의주에서 신의주로 옮겨가게 된다.

 

압록강 철교 /위키피디아
압록강 철교 /위키피디아

 

일본은 19045 2월에 압록강철교 가설을 위한 설계도와 예산을 정하고 10월에 도쿄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경의선과 안동~봉천 철도를 연결해 만한(滿韓) 간 교통을 연결하고,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는 교통을 연계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압록강철교 설계에 세가지 방안이 상정되었다. 첫 번째는 단선철교 방안이고, 두 번째는 복선철교로 가설하되 한 선을 인도교로 하는 방안이고, 세 번째는 단선철교로 하되 양측에 인도를 가설하는 방안이다. 경비와 실용성등을 고려해 세 번째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렇게 해서 압록강철교는 철도 양측에 인도가 들어서게 된다.

 

경의선은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19043월에 착공해 19063월에 완공되었다. 안동~봉천간 안봉선(安奉線)은 러일전쟁 중에 일본군에 의해 협궤 철도러 부설되었다. 전쟁후 1909년 일본은 간도를 중국영토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안봉선을 표준궤로 개축할 것을 중국측으로부터 허락받는다. 안봉선 완공 기일과 동시에 압록강철교를 개통하는 것이 일본의 목표였다.

 

일본이 압록강철교를 건설한다는 소식에 북경주재 영국과 미국 공사가 철교건설 예정지가 서구열강의 안동 거류지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 운항에 지장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며, 철교를 개폐식으로 가설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총감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선박항해의 편의를 위해 압록강철교 설계를 계폐식으로 변경하도록 주문했다. 이에 철교는 계폐식으로 설계변경된다.

 

개폐식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개폐식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철교는 19098월에 착공해 191110월에 완공되었다.

압록강 철교는 단선철교와 양편 인도교로 건설되고 당초 계획에 없던 개폐안까지 추가해 진행되었다. 건설비 175만원은 일본과 청나라가 분담했다. 철교건설에는 연인원 51만 명 동원되었다.

압록강 하구로부터 상류 쪽 45km 지점을 가로질러 신의주와 중국의 안동(지금의 단동)을 연결하는 인도교 겸용 장대 압록강 철교는 총연장 944m이다. 교각은 모두 12. 교각의 기초는 일본으로서도 처음으로 압기잠함(壓氣潛函) 공법이 적용되었다. 철근콘크리트로 통을 만들어 강바닥에 내려 놓고 기초공사를 하는 방식이다.

교량 상판은 활 모양의 궁상형(弓狀形) 강형(鋼桁)을 사용했다. 이 철강재는 모두 미국에서 1905~1910년 사이 제작된 철강재를 도입했다. 중앙 교각 위의 탑 높이는 28m, (의 총 중량은 9,247톤이다.

압록강 철교는 상판 가운데에 단선 철로를 깔고, 좌우로 2.6m의 인도가 설치되었다. 보도폭은 각각 2.6m였다.

 

압록강 철교 내부 인도교와 철교가 나란이 설치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압록강 철교 내부 인도교와 철교가 나란이 설치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압록강철교는 최초의 근대적 장대 인도교가 병행된 철교이다. 게다가 회전식 장대교로, 신의주로부터 9번째 교각의 형을 개폐식으로 건설했다. 회전 방식은 케이슨(caisson)공법을 적용, 형을 90° 회전시켜 다리를 열면 자형, 닫으면 자형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45°를 여는 데 2~3분이 걸렸다고 하며, 조작상의 위험으로 인해 수동으로 개폐했고, 하루 2(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다리를 열고 닫았다.

압록강철교는 당시 동양 제일의 국경 명물로 일컬어지며 해외에서도 그 명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수평으로 회전해 다리를 개폐하는 선개교(旋開橋, swing bridge) 방식이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했기 때문이다.

1932년 통계에 이 철교를 건너간 보도통행자가 연간 260만 명이었다고 한다. 1934331일부터는 교량 보존 등을 이유로 가동을 중지했으나 1945815일 광복을 기념해 단 한 번 가동된 적이 있다.

한만 간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일제는 이 철교 위쪽 199m 지점에 별도의 철도건설에 착공해 1943년 개통했다. 두 개의 철교는 복선형 철도로 활용되었다.

 

압록강철교 폭파(1950년 11월 14일) /위키피디아
압록강철교 폭파(1950년 11월 14일) /위키피디아

 

압록강철교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11월 미군의 B-29에 의해 폭파됐다. 미국은 중공군이 도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다리를 폭파했는데, B-29 100대를 동원해 6일간 34회에 걸쳐 다리의 세 군데를 파괴했다.

지금은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 Yalu River Broken Bridge)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북한과 중국은 이 다리를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라 부르고 있다.

 

끊어진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끊어진 압록강철교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Wikipedia, Sino-Korean Friendship Bridge

Wikipedia, Yalu River Broken Bridg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압록강철교

김지환, 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 SOC 인프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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