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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자의 설화…불교에서 영향받은 듯, 울릉도 전설에 남아
사라진 고대왕국 우산국③…우해왕 전설
2019. 05. 13 by 김현민기자

 

서기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 장군은 지혜로운 장수였다. 지세의 험함과 바닷물의 깊음을 믿고 덤비는 우산국 군졸들을 물리치기 위해 사나운 맹수를 끌어들였다. 나무로 깎은 사자(木偶師子)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두 사서에서 이사부가 목우사자를 동원해 우산국 사람들이 공포에 떨어 항복했다는 대목에서 일치한다.

사자는 우리나라에서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동물 중에는 호랑이가 가장 무서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사부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사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면 이사부는 어떻게 사자를 알게 됐을까.

사자의 분포지역은 인도와 아프리카다. 인도 사자는 현재 멸종 위기에 있다. 하지만 인도사자는 고대에는 인도에서 파키스탄, 이란, 그리스까지 분포해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의다 죽여 없앴다.

불교와 힘두교에서는 사자를 영물로 받들어 숭배해왔다. 우리나라에는 불교 전파를 타고 사자상이 들어왔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시기는 우산국 정벌후 13년 후인 법흥왕 15(525)이다. 불교는 이미 신라에 들어와 있었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는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인 모례(毛禮)가 자기 집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모셨다. (중략) 비처왕(소지왕)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가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왔다.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도 없이 죽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일선군은 지금의 경북 구미에 해당한다. 눌지왕(417~458) 때 신라의 지방에 불교가 들어왔고, 이차돈 순교로 공인되기까지 불교는 100년 가까이 민간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사부도 어린 시절에 불교에 접하면서 사자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갈라파고스처럼 고립된 우산국 사람들은 사자를 몰랐을 것이 분명하다.

이사부가 전함에 목우사자를 가득 싣고 울릉도 해안에 접근해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리라고 위협하자, 어리석고 사나운 우산국 병졸들이 항복했다는 스토리는 다분히 우화적이다.

현재 울릉도의 주민은 1만여명. 1,500년전엔 1,000~2,000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인구에서 군대를 징발하면 수백명 정도. 이사부는 막강한 신라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침공했고, 우산국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을 것이다. 목우사자의 우화는 민간의 설화로 전해오다가 고려시대에 김부식과 일연이 사서를 집필하며 옮겨 적은 게 아닌가 싶다.

이사부가 나무사자를 만들어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낸 일화는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에 비견된다. 트로이 목마는 수많은 군인들이 들어갈수 있도록 대형으로 제작됐지만, 나무사자는 군선에 실어야 했으므로 트로이 목마보다 규모가 작았을 터이지만, 우산국인들이 두려워 항복할 정도였으니, 상당한 크기로 제작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사부 군대가 출항한 곳으로 알려진 삼척시에서는 여름에 매년 이사부 축제를 열고 나무사자 깎이 행사를 갖는다.

 

삼척시에서 열리는 이사부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나무사자를 깎고 있다. /삼척시
삼척시에서 열리는 이사부축제에서 참가자들이 나무사자를 깎고 있다. /삼척시

 

울릉도에는 동해 한가운데서 바닷길의 험함을 믿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는 신라를 우습게 여긴 우산국의 마지막 우해왕과 그 섬의 정복자 이사부에 관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다. 이 전설을 실화처럼 여겨 소설이 나오고, 어린이용 교재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고려 중기에 여진족이 울릉도를 침공하는 바람에 공도(空道)정책이 취해쳐 사람이 살지 않는 섬으로 남는다. 우산국의 후예들이 모두 뭍으로 나왔고, 그후 사람이 다시 살때엔 뭍의 백성들이 옮겨졌다.

지금 울릉도 주민들 가운데 우산국 후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해왕 전설이 우산국 시절부터 전해온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후대에 다시 섬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역사의 재료에다 현지의 지형을 조합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은 사실에 가깝게 묘사돼 있다. 전설은 전설로 보면 된다. 많이 알려진 스토리이지만, 다시 한번 소개한다.

 

지금의 울릉도를 옛날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불렀다. 우산국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우해왕(于海王)이 다스릴 때라고 한다. 우해왕은 신체가 건강하고 기운도 장사여서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주름잡고 다녔다. 우산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근처의 어느 나라보다 바다에서는 힘이 세었다.

우해왕은 우산국에 와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들의 본거지인 대마도에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갔다. 대마도의 왕은 우해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하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제안을 하였다. 그리고 대마도를 떠나려고 하니 대마도의 왕은 자신의 세 딸 중에서 인물도 마음씨도 뛰어난 셋째 딸 풍미녀(豊美女)가 우해왕을 따라가고자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만약 왕이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굶어 죽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해왕은 할 수 없이 풍미녀를 데리고 우산국으로 돌아왔다. 풍미녀의 용모와 마음가짐이 단정하여 왕후로 삼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 우해왕은 풍미녀를 왕후로 삼기로 했다. 우산국의 백성들은 우해왕과 풍미녀를 온 힘을 다해 받들었다. 그러나 풍미녀가 왕후가 된 후부터 우해왕의 마음이 전과는 달라지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왕은 백성들의 생활을 걱정하기를 자기 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사치를 좋아했다. 그리고 풍미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우산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보물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 우해왕은 신라까지 신하를 보내어 노략질을 해 오도록 했다. 신하 중에서는 부당한 일이라고 항의하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거나 바다에 처넣었다. 백성들은 우해왕을 겁내게 되었고 풍미녀는 더욱 사치에 빠지게 됐다.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있다고 보고를 했으나 우해왕은 도리어 그 신하를 바다에 처넣었다. 이 광경을 본 신하는 될 수 있으면 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않으려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결국 풍미녀가 왕후가 된지 몇 해 뒤에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 (울릉문화원 웹사이트 인용)

 

울릉도의 사자바위 /울릉군
울릉도의 사자바위 /울릉군

 

울릉도에는 이외에도 이사부와 연결되는 전설로 사자바위와 투구봉 전설이 남아있다.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사부의 목우사자(木偶師子)에 놀란 우해왕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사부가 제시한 항복조건은 우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우산국은 신라의 속국으로서 해마다 공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전설은 남아 있다. 우해가 죽을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신라군이 가져온 나무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되고, 우해가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됐다고 한다.

울릉도에는 우해왕에 대해 또다른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풍미녀가 죽자 우해왕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뒷산에 병풍을 치고 백 일 동안 제사를 지냈다. 또 왕비를 모시던 열두 명의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뜯게 했다. ‘비파산과 학포 이야기를 보면, 평소에 왕비가 사랑하던 학이 백 일 제사를 마치던 날 소리 높이 슬프게 울며 학포(鶴圃) 방면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울릉문화원)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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