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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소련 70년⑫…흐루쇼프의 해빙에서 원상복귀, 위성국 이탈에 무력 개입
브레즈네프, 개혁조치 폐기…’프라하의 봄’ 진압
2021. 04. 15 by 김현민 기자

 

19562월의 흐루쇼프 비밀 연설은 스탈린 격하 이외에도 평화공존론들 강조했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평화롭게 공존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미국과의 긴장 완화를 추구했다. 그는 데탕트를 추진하며 미국과 ICBM 등 핵무기 감축을 논의했다. 1959년엔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흐루쇼프가 소련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런 화해무드도 일순간, 1960년에 미국 U-2 정찰기가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터지고, 이어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한다. 브레즈네프는 자발적 공산혁명이 일어난 쿠바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턱밑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다. 핵무기를 실은 소련 군함이 196210월 카리브해로 진입했으나, 미국은 수백척의 함정과 1,000여대의 전투기를 동원해 소련전함의 항해를 저지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흐루쇼프는 전함의 철수를 지시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 군함을 감시하는 미국 정찰기 /위키피디아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 군함을 감시하는 미국 정찰기 /위키피디아

 

쿠바 미사일 위기는 흐루쇼프의 이중성과 변덕을 보여주는 결정판이었다. 그는 한편으론 데탕트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상대방의 치명적 위치에 전략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 적대국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포기했다. 이 사건은 소련공산당 내 스탈린주의자들을 분노케 했다.

19643월 소비에트 최고간부회의 의장인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동료들과 흐루표프의 제거를 의논했다. 그는 당 상임위원들을 하나씩 끌어들였다.

그해 10월 흐루쇼프는 그루지아로 휴가를 떠났다. 1012일 브레즈네프는 휴가중인 흐루쇼프에게 전화를 걸어 농업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당 특별위원회가 개최될 예정이니, 모스크바로 돌아오라고 했다. 흐루쇼프는 뭔가 의심을 품었지만,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그가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을 때, KGB 요원들이 그를 급습해 체포했다. 소비에트 정치국 특별회의는 흐루쇼프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퇴임할 것을 권고했다. 말이 권고지, 강요였다. 흐루쇼프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는 정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사임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사후 1953년 권력을 잡아 1964년까지 11년간 집권했다. 그는 집권기간 쿠데타 음모를 두어차례 발각했지만 주모자들을 스탈린 시대와 달리 죽이지는 않았다. 그도 권좌에서 밀려났지만, 집으로 돌아가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197177세의 나이로 숨졌다. 스탈린 시대와 달라진 정치적 풍경의 하나다.

 

브레즈네프는 1906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으며, 흐루쇼프보다 12살 아래다. 브레즈네프는 191710월 혁명때 10대였고, 내전이 끝난후인 1923년에 당에 가입했다. 혁명후 세대로서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 교육을 받으며 당 생활을 했고, 흐루쇼프의 후원으로 고위직에 올랐다. 스탈린 추종자였던 흐루쇼프가 탈스탈린을 외쳤던 것처럼, 브레즈네프도 흐루쇼프의 해빙을 원상복구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는 1인자인 서기장에 올랐지만, 총리격인 각료회의 의장 알렉세이 코시긴(Alexei Kosygin), 2서기인 나콜라이 포드고르니(Nikolai Podgorny)와 삼두체제를 형성했다. 브레즈네프의 연합체제는 흐루쇼프의 해빙을 부정하고 구시대로의 복귀를 추진했다. 그는 정치국원의 합의를 유도했다. 집단지도체제 지도부는 함께 늙어가면서 현상유지를 최선의 목표로 삼았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사망할때까지 18년간 집권했는데, 이 기간 동안 소련은 변화를 거부한 정체의 시기를 맞았다. 브레즈네프의 정체(Brezhnev Stagnation)로 불리는 이 시기에 경제는 저성장을 지속했고, 자유주의는 탄압을 받았며, 체코슬로바키아 민주화운동은 탱크에 짓밟혔다. 미하일 고르바쵸프라는 개혁가가 등장할 조건은 브레즈네프 시기에 만들어졌다.

 

1973년 세계여성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브레즈네프 /위키피디아
1973년 세계여성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브레즈네프 /위키피디아

 

1965년 코시긴 총리는 흐루쇼프 개혁안의 일부를 꺼내 기업에게 보다 자유를 허용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집단지도체제는 과거로의 회귀를 다시 강조했다.

브레즈네프는 1971년 제24차 전당대회에서 소련이 성숙한 사회주의사회로 진입했다고 주장하고, 1980년대에 미국을 따라잡고 공산주의가 완성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력은 점점 둔화되었다. 미국 CIA의 분석에 따르면, 1960~1970년 사이 소련의 GNP 성장률은 연평균 4.8~4.9%에 달했으나, 1970~1975년에 3.0%, 1975~1980년에 1.9%로 가라 앉았다. 육류와 소비재는 부족했고, 상점에는 물건을 사기 위해 줄이 늘어섰다. 집단농장의 근로자들은 의욕을 잃었다. 그들은 퇴근후 각자에게 배당된 조그마한 텃밭을 열심히 가꿔 부족한 식량을 메웠다.

 

두브체크 /위키피디아
두브체크 /위키피디아

 

196815일 개혁파 알렉산드르 두브체크(lexander Dubček)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Socialism with a human face)를 표방했다. 소련식 공산주의는 민주와 자유화 열망을 빼앗았고, 인민들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몰아 넣었다. 칼 마르크스는 인민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공산주의, 사회주의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지구상에 실현된 공산주의는 감옥 그 자체였다.

두브체크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배치되는 사상이 아니며, 사회주의에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론은 서유럽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동유럽 지식인층에 빠르게 번져 나갔다.

두브체크는 지식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19682월 공산주의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의 민주주의 전통에 부합하는 공산주의를 건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곧이어 4월 두브체크는 경제적으로 소비재 생산을 강조하고, 정치적으로는 다당제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증진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비밀 경찰의 권력을 제한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동등한 연방으로 분리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외교적으로는 서방국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소련과 공산국가들과 협력하는 방안도 내놨다.

6월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 70명은 ‘2,000 단어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유명 작가 바출리크(L. Vaculík) 등의 주도로 작성되었는데,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며 두브체크 정권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두브체크의 자유화 정책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웃 헝가리 공산당 개혁파들이 두브체크의 개혁에 동조하고, 프라하의 봄바람은 점차 동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브레즈네프는 두브체크의 개혁이 동유럽을 흔들어 소련의 지위를 약화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소련 지도부는 프라하의 움직임이 반동운동으로 규정했다. 6월 소련 지도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에게 압력을 넣어 프라하의 변화를 중지하거나 약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두브체크를 지지하는 열성파 개혁주의자들은 소련과의 타협을 거부했다.

소련은 군사적 대응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브레즈네프는 체코 자유화 운동의 싹이 더 커지기 전에 잘라야 한다고 판단하고 동맹군을 편성했다. 안드레이 그레치코(Andrei Grechiko) 소련 국방장관은 서방국가와 3차 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체코 침공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8821,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가 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전날 밤에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집결한 병력수는 25만명. 소련군이 주축이 되고, 폴란드,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군 등 위성국 4개국 병력이 동원되었다. 루마니아와 알바니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를 지지하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2,000대의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 조약 군대는 순식간에 프라하를 장악했다.

두브체크는 자국민에게 소련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울분에 찬 프라하 청년들은 국기를 흔들며 소련군 탱크에 돌진했다. 일부 소련제 탱크가 불타기도 했지만, 평화시위는 무참히 진압되었다. 당시 죽은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이 137, 중상자가 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소련은 곧바로 두브체크를 해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체시켰다. 소련은 곧바로 구스타프 후사크(Gustáv Husák)를 권력자로 내세워 두브체크가 추진했던 모든 자유화조치를 무효화했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은 짓밟혔다.

 

1968년 8월 프라하에 진입한 소련군 탱크가 불타고 있는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청년들이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68년 8월 프라하에 진입한 소련군 탱크가 불타고 있는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 청년들이 국기를 흔들며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브레즈네프는 체코 시위를 유혈진압한 후, 그해 10월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적대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로 돌려 놓으려 한다면, 그 당사국은 물론 무든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통된 문제라고 선언했다.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이라 불리는 이 선언은 소련이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원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가지며, 반소비에트 시위가 벌어지면 직접 진압하겠다는 것이었다.

브레즈네프의 소련은 1970년대초에 베트남전에도 개입하고, 197912월엔 아프가니스탄 내전에도 군대를 투입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경제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성장은 둔화되었지만, 그나마 버틴 것은 바싼 국제유가 덕분이었다. 1973년 중동전 이후 제1, 2차 오일쇼크로 국제유가가 5배 이상 뛰어 오르는 바람에 풍부한 오일머니가 유입되었고, 그 돈으로 세수를 충당했다. 또 오일 머니 덕분에 힘있는 외교정책을 취할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 들어 국제유가가 폭락했다. 소련 경제는 내재적인 모순을 드러냈고,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참고자료>

Wikipedia, Nikita Khrushchev

Wikipedia, Leonid Brezhnev

Wikipedia, Prague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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