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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결혼 사진이 유출되어 일본에서 소동…아내 가네코, 옥중에서 사망
아나키스트 박열과 일본인 아내의 러브스토리
2021. 04. 25 by 박차영 기자

 

박열(朴烈, 1902~1974)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천황과 황실요인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로 무정부주의자였다. 경북 문경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도 반공노선을 펼치며 우파 활동을 하다가 6·25 이후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였다.

 

박열 /국가보훈처
박열 /국가보훈처

무정부주의(anarchism)는 모든 정치조직ㆍ권력을 부정하는 사상과 운동이다. 아나키즘의 비판 대상은 국가권력뿐만 아니라 자본이나 종교 등에도 미치며, 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지배를 부정하고 의문에 붙이려는 사상 조류다. 동양에서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다.

근대 아나키즘 사상의 선두주자는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활약한 영국의 W.고드윈(William Godwin)이다. 프랑스의 P. J.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에 이어 러시아에서 M.A. 바쿠닌에 의해 아나키즘이 하나의 사상과 운동의 계보로 정리된다. 러시아 소설가 막심 고르키도 무정부주의자였다가 볼셰비키로 전환했다. 아나키즘 운동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1920년대 일제에 저항하는 지식인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으며, 박열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아나키즘은 폭력을 정당화한다. 국가는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제도이므로,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박열이 일본 황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전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박열은 19193·1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수학한 후 일본의 사회운동가와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김판국·김약수·조봉암·서상일 등 20여 명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해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22에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결별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고, 기관지로 흑도(黑濤불령선인(不逞鮮人현대사회 등을 발간했다. 1923년 아나키스트 비밀결사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박열은 1923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해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고 불령사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체포되었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왼쪽은 동아일보가 보도한 괴사진, 오른쪽은 영화 ‘박열’ 속 장면
왼쪽은 동아일보가 보도한 괴사진, 오른쪽은 영화 ‘박열’ 속 장면

 

박열과 일본인 아내 가네코와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2017)에서 둘이 옥중결혼하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실화다.

박열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에서 감옥에서 웨딩사진을 찍는다. 사진에는 교도소 내에서 후미코가 박열의 무릎에 앉아 비스듬이 책을 읽고 있고, 박열은 그런 그녀의 한쪽 가슴에 느긋하게 손을 얹어놓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은 야했다. 여유만만 그 자체였다.

이 사진은 외부로 유출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일본에선 그 사건을 괴사진 사건이라 칭했다. 이로 인해 일본 의회가 3일간 중지되는 파동이 벌어진다. 일본은 이 사진을 게제하지 못하도록 보도통제를 했다.

당시 일본 감옥에서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진이 흘러나가자 중의원(하원)에서 야당 의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비난의 핵심은 너무 야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진을 찍도록 간수들이 무엇을 했는지 하는 것이고, 박열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배려한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 담당판사가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사진은 복제되어 돌아다녔고, 일본 정부는 마침내 괴사진을 게재해도 좋다고 허용한다. 동아일보는 이 사진을 게재하면서 법정에서 태연하게 포옹한 박열 부부’, ‘감방에서 두 사람 동거라는 제목을 달았다.

 

박열 부부 /영화 사이트
박열 부부 /영화 사이트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한국이름은 박문자(朴文子).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도 못하고 학교도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19234월 박열과 함께 불령사에서 활동하다가 박열과 함께 연행당했다. 그녀도 천황을 살해하려 한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받았다. 그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됐으나,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유골은 박열의 형이 인수해 남편의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그녀가 죽어 박씨 문중의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출옥한 박열 선생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촬영한 사진 /국가보훈처
출옥한 박열 선생을 환영하는 동포들을 촬영한 사진 /국가보훈처

 

박열은 무기징역을 받아 일본 북쪽 홋카이도의 아키다(秋田)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에 일본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19451027일 그를 석방했다. 222개월의 긴 감옥살이를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나이는 44, 중년이 되었다.

박열이 도쿄로 돌아오자 재일조선인연맹 등 좌파조직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했지만 그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노선을 분명히 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사진=국가보훈처

 

해방후 박열은 이승만과 김구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커지는 바람에 선생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1945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선생은 김구의 반탁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의 아나키즘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를 받아들일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자 편지를 보내, 두 지도자의 화해를 촉구하였으나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열 /국가보훈처
박열 /국가보훈처

19465월 박열은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섰던 세 열사의 유해는 일본의 형무소에서 쓸쓸히 버려져 있었다. 박열은 세 열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모셔 왔다.

이어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했다.

194610월 박열은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아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하고, 초대단장으로 추대됐다. 초기 민단은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루었고, 반일, 반공을 기치로 삼았다.

이승만은 재일교포 사회에서 차지하는 박열의 위치를 고려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이승만은 194612월과 19474월 미국을 다녀오면서 귀로에 2차례에 걸쳐 선생을 만나 향후 진로를 상의했다. 박열은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대내외에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혔다. 이승만은 박열을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초빙한다는 이승만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고, 이승만 정부는 부패와 독주로 이어졌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전에 박열은 초대되어 귀국했다. 그는 고향(경북 문경)을 찾아 부인 부인 가네코의 묘소를 참배하고 친지들과 옛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재단법인 박열 장학회를 설립해 후학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으며, 이듬해 5월 영구귀국을 결심해 돌아와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또다른 운명의 여신이 다가왔다. 1950625일 북한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인민군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갔다.

북으로 간 이후 박열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다른 납북인사들의 소식과 함께 일부 전해질 뿐이다.

주목할 만한 일은 그가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그러던 중 박열은 1974117일 평양에서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해 2월 남한에서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의 생가 터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2012109일에 개관했으며, 기념관 옆쪽에는 2003년에 먼저 자리잡은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에 박열 아내 가네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포상했다.

 
2019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추도식 /박열의사기념관(문경)
2019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추도식 /박열의사기념관(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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