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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공산권 붕괴⑧…엘벡도르지의 민주화 투쟁, 바트믕흐 총서기 수용
몽골 공산정권의 결단…협상 통해 민주제 수용
2021. 05. 03 by 김현민 기자

 

몽골은 러시아혁명(1917) 4년후인 1921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화된 나라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골의 부족장들이 청조의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했고, 그후 러시아혁명기에 몽골 인민당이 러시아 백군과 중국정부의 개입을 배격하고 공산화에 성공했다. 몽골 인민당은 인민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몽골 공산정권은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 되었다. 몽골에는 소련군이 주둔했고, 스탈린 시기에는 목축업이 집단화되었다. 소련에 반대하는 정치인,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라마교 승려 등이 숙청되었다. 공산정권은 또 몽골 고유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 키릴문자를 도입함으로써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스탈린과 중국 장제스(蔣介石)가 외몽골은 독립시키되, 내몽골은 중국에 귀속하기로 합의해 몽골족의 통일 염원은 물건너 갔다. 이후 마오쩌둥의 중공(中共)은 외몽골의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몽골 공산정권은 친소련주의를 고수해 소련의 위성국 지위를 유지했다.

19848월에 26년간 집권한 융자깅 체뎅발(Yumjaagiin Tsedenbal)이 인민혁명당 총서기에서 물러나고 잠빙 바트믕흐(Jambyn Batmönkh)1인자로 올라섰다. 바트믕흐는 전임자에 비해 비교적 온건 노선을 견지했고,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지지를 받았다.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위키피디아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위키피디아

 

몽골의 개혁-개방 바람은 20대 청년인 차히아긴 엘벡도르지(Tsakhiagiin Elbegdorj)에서 출발한다. 1963년 생인 그는 모스크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키예프에서 언론학을 공부했으며, 그때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정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언론자유를 보장하는 글라스노스트와 시장개방을 강조하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88년에 귀국한 그는 울란오드(Ulaan Od)라는 신문사에 기자생활을 했다. 당시 인민혁명당의 노선에 거스르는 논조를 펴면 간첩혐의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을 모았다.

19891128, 울란바토르에서 제2차 전국청년예술가대회가 열렸다. 26살인 엘벡도르지는 청중들 앞에 나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 몽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때다. 청년들이 할 일은 말로만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우리가 힘을 보태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민주주의이고, 글라스노스트다. 우리는 이런 뜻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오랜 공산치하에 젖어온 몽골사회에서 그는 금기의 발언을 한 것이다. 대회 의장은 엘벡도르지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대회가 끝나고 그와 뜻을 함께 하는 두명의 동지가 찾아왔고, 이어 10명이 합세했다. 이들이 몽골민주혁명의 13인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다.

그가 다니던 신문사에선 더 이상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할 경우,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벡도르지는 몽골국립대학 강의실에서 비밀리에 동지들을 만나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에 관한 학습활동을 벌였다. 동시에 조직을 확대하고 반정부 전단을 제작해 거리에 내붙였다.

 

1990년 몽골의 단식농성 /위키피디아
1990년 몽골의 단식농성 /위키피디아

 

19891210일 아침, 그들은 수도울란바토르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최초의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엘벡도르지는 그 지리에서 몽골민주동맹의 창당을 선언했다. 이는 몽골 공산정권 68년만에 최초의 야당이다. 그들은 공산정부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채택하고,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러시아 키릴 문자를 폐지하고 고유 몽골문자를 사용할 것도 주장했다.

이 때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소련의 세계적인 체스선수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가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소련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몽골을 중국에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체스선수의 발언이 소련당국의 공식적 의견은 아니었지만, 몽골의 민족주의를 부채질하기엔 충분했다.

새해가 되어 199012, 민주동맹은 전단지를 배포하고 민주혁명을 요구했다. 바트믕흐 정부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자, 민주동맹은 보다 공격적인 요구를 했다.

114, 시위대 1,000명이 울란바토르 레닌박물관 앞에 집결했다. 121일에는 영하 30도의 날씨에도 시위대는 징기스칸을 표어로 한 깃발을 들고 시위했다. 징기스칸은 몽골에선 영웅이지만 러시아에선 침략자로 치를 떠는 대상이었다. 소련 치하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을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징기스칸 탄생 600주년이던 1962년에 인민혁명당 정치국원이 그를 언급했다가 소련에 의해 숙청당하기도 했다.

몽골 민주화운동은 점차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반소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월과 2월에 민주화시위는 지방도시로 확대되었고, 민주동맹 이외에도 다양한 민주단체들이 조직되었다.

34, 민주동맹과 3개의 단체는 공동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엔 10만명이 모여 민주화를 외쳤다. 37일 울란바토르 슈흐바타르 광장 민주동맹 소속 10명은 공산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단식농성 참가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몰렸다.

 

잠빙 바트믕흐 /위키피디아
잠빙 바트믕흐 /위키피디아

 

사태가 갇잡을수 없이 확대되자, 인민혁명당내 강경파는 시위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며, 계엄령 선포를 바트뭉흐 총서기에게 요구했다. 바트뭉흐는 서명을 거부했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고했다.

남편이 집에서 제8차 전당대회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던 차에 전화가 걸려 왔어요. 몇마디 대화가 오가더니 남편은 우리 몇 안되는 몽골인들끼리 상대방의 코피를 터트릴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통을 던져 버렸어요.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지요. 평상시에 조용하던 분이 목청을 돋우며 일부 지도부가 나에게 서명을 요구하는데, 내가 다녀오리다고 말했어요. 그는 오른손에 넥타이를 쥐고 있으면서도 넥타이를 달라고 했어요. 그리곤 식사도, 차 한잔도 마시지 않고 휑하니 나가버렸어요.”

바트뭉흐는 그날(39) 저녁에 정치국 회의를 열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계엄령을 막았다. 그는 인민혁명당 정치국을 해체하고, 자신도 사임했다.

몽골의 민주혁명이 성공하는데는 바트뭉흐 총서기의 기여가 컸다는 평가가 많다. 그가 만일 강경파 요구대로 계염령 선포에 서명했다면 그해 베이징의 텐안몬(天安門) 사건처럼 대규모 유혈사태가 유발되었을 수도 있고, 민주화가 지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바트뭉흐의 고집으로 인민혁명당 지도부는 민주화단체들과 협상을 선택했다. 단식투쟁이 중단되었다. 공산정부와 민주세력은 협상 끝에 자유선거에 의한 총선 실시에 합의했다.

 

1990729일 몽골에서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었다. 집권 인민혁명당이 대후랄(Khural, 의회)에서 총 430석 가운데 358, 소후랄에서 50석 가운데 31석을 차지해 압승했다. 민주동맹은 민주당으로 개편해 선거에 참여했는데, 대후랄에서 17, 소후랄에서 13석을 얻는데 그쳤다.

첫선거에서 민주세력이 다수를 얻지 못한 것은 빠르게 전개된 민주화 운동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 크다. 몽골은 한반도보다 7배나 넓고 유목민들이 많아 수도의 민주화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몽골의 민주화는 대중의 의식이 깰 때까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총선후 인민혁명당의 다신 뱜바스렌(Dashiin Byambasüren)이 총리로 선출되었다. 인민혁명당은 다수당이었지만, 소수야당과 권력을 공유했다.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된 새 의회는 민주헌법을 채택하고, 양원제를 단원제로 개편했다.

신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1993년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 소속 푼살마긴 오치르바트(Punsalmaagiin Ochirbat)가 당선되었다.

민주세력이 집권한 것은 1996년이다. 민주당은 민주세력을 통합해 민주동맹연합을 결성하고, 총선에 참여했다. 1996년 총선에서 민주세력은 76석 가운데 50석을 얻었고, 인민혁명당은 25석을 얻어 여야가 교체되었다.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 엘벡도르지는 1998, 2004~2006년 두차례의 총리를 역임한 후 2009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몽골은 동양권 공산국 가운데 유일하게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도입한 나라다.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화바람이 밀려오자, 베이징에서 유혈사태가 나고, 평양에선 오히려 주체사상을 강화하며 공산주의자들이 오히려 권력을 강화했지만, 몽골에선 집권층에서 민주화요구를 수용해 타협에 의해 민주절차를 밟아 나갔던 것이다.

 


<참고자료>

Wikipedia, Mongolian Revolution of 1990

Wikipedia, Mongolian People's Republic

Wikipedia, Jambyn Batmönkh

Wikipedia, Tsakhiagiin Elbegdo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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