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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추적
종교 차이로 기독교도 납치해 노예시장에 팔아…악명 높은 ‘트리폴리의 레오’
천년이나 유럽 약탈한 지중해 이슬람 해적
2019. 05. 17 by 김현민기자

 

유럽 기독교도들에겐 트리폴리의 레오’(Leo of Tripoli), 아랍의 이슬람 교도들에겐 굴람 주라파’(ghulām Zurāfa)라 불리는 해적이 있었다. 그는 비잔틴 제국령 소아시아(터키)에서 기독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사라센이 소아시아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아랍인들에게 붙잡혀 레바논의 트리폴리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해적이 되었다.

서기 9047월 그는 사라센 압바스 왕조의 지원을 받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54척의 배와 1만명의 인원을 끌어 모아 시리아 타르수스를 출발해 북상했다.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를 위해 충분하게 대비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하자, 그는 비잔틴 제국의 허를 찔렀다. 바로 비잔틴의 제2의 도시 테살로니카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갑작스런 사라센 해적의 침입에 테살로나카 주민들은 당황했다.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주둔하던 비잔틴 제국의 전함이 도착할 시간이 없었다. 729일 테살로니카의 성벽과 감시탑이 페허처럼 무너졌고, 해적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해적들은 1주일간 테살로니카를 약탈했다. 그곳 감옥에 갇혀 있던 이슬람 죄수 4,000명을 석방시키고, 비잔틴 전함 60척을 파괴해 버렸다. 비잔틴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했다. 도시는 공포와 충격에 빠졌고, 비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이 포로로 잡은 사람이 22,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부분이 노예로 부리기 좋은 젊은이들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테살로니카의 약탈’(Sack of Thessalonica)이라고 한다. 그때의 상황은 포로로 잡힌 존 카미니아테스(John Kaminiates)가 상세하게 기록해 아직도 전해진다.

해적들은 비잔틴 해군이 전열을 정비해 공격하기 전에 서둘러 테살로니카를 빠져 나가 타르수수로 돌아갔다.

사라센은 해적들의 약탈을 활용했다. 이슬람 해적들에겐 이교도들을 약탈하거나 죽이는 것이 허용되었다. 트리폴리의 레오는 이슬람으로 개종한후 과거 자신이 믿었던 기독교를 죄악시하고 약탈했다. 사라센 제국은 이들의 항해술과 선단을 이교도 공격에 활용했다.

그후 비잔틴 함대가 보복에 나서 그리스 해안도시 렘노스(Lemnos)에서 레오의 해적 선대를 격퇴했다. 그는 그곳에서 빠져 나와 도망쳤다고 한다. 그후 그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기 904년 테살로니카의 약탈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서기 904년 테살로니카의 약탈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서로마가 멸망하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이 세력을 떨치면서 지중해 곳곳에 이슬람 해적들이 설쳤다. 사라센은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에 이슬람 해적들의 약탈질을 방조했다. 오히려 교리를 들먹이며 이용했다고 하는 게 옳다. 지중해는 이슬람 해적의 바다가 되었다.

 

그리스 남쪽 크레타 섬은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의 이슬람 집단에 의해 점거되었다. 이들은 스페인을 장악한 이슬람 왕조가 교체되는 사이에 반란에 가담했다가 쫓겨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고, 이들이 거쳐를 찾아 헤메다가 크레타섬에 상륙한 것이다. 이들이 한 짓은 약탈이었다. 섬에 상륙한 이슬람 1만여명에겐 비잔틴 해안이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크레타 섬은 서기 820년대부터 150년간 이슬람 해적의 소굴이 되었다.

 

이슬람 해적이 기독교 세계를 처음 습격한 것은 서기 65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이슬람 배가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를 습격해 파괴하고 약탈했다. 해적들은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납치해 알렉산드리아 노예시장에 팔어버렸다.

서기 700년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와 판텔레리아 섬이 이슬람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북아프리카에 근거지를 둔 해적들인 것으로 파악된다. 북아프리카가 사라센에 접수되면서 해적 소굴이 된 것이다.

704년 튀니지 카이루안의 태수 무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 대해 지하드(성전)를 선포하고, 병사 1,000여명을 이끌고 시칠리아 남해안에 상륙해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성전을 선포했기 때문에 기독교도들을 죽이는 것이 허용되었다. 약탈은 살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후 해적질은 수시로 이어졌다. 지방관 격인 태수가 직접 약탈에 나서기도 하고, 해적화한 선원들이 돈벌이를 위해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 사적 집단이 기독교도들을 약탈을 할 경우 태수에게 5분의1을 세금조로 내고, 선주와 나눠먹는 방식이 관례였다고 한다.

 

1684년 알제리의 노예시장 그림 /위키피디아
1684년 알제리의 노예시장 그림 /위키피디아

 

이슬람 해적들의 주요 사업은 재물의 약탈보다는 기독교도들의 납치였다. 그들에게 기독교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교도를 잡아다 노예로 파는 게 주 목적이었다.

해적들은 주로 남자를 잡아 갔다. 남자들은 노 젓는 노예로 배치, 개종시켜 병사로 충원, 노예 시장에서 매매, 강제 노동 등에 활용될수 있다. 여자를 납치하면 노예시장으로 데려갔다. 이슬람 교도는 이교도와 성관계를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개종을 시키기 이전에 부인으로 삼을수 없었다.

수도원이 해적들의 좋은 타깃이 되었다. 수도원은 도시보다는 성 밖의 벽지에 많이 세워진데다 부유한 신도들의 재산 기부, 유언에 의한 증여 등으로 재산이 넉넉했기 때문에 훌륭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 창고에는 수확물도 넉넉히 쌓여 있었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기독교도들을 포로로 잡아 목욕장에 가두었다. 목욕장은 로마 시절에 대중 목욕탕이었지만, 중세 북아프리카에선 노예들의 수용소를 의미했다. 유럽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이 곳에 동물처럼 취급받으며 낮에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8세기부터 18세기까지 무려 1천년이나 존재한 북아프리카 목욕장은 일종의 사설 수용소였다. 관리인이 있어 노예들에게 식사를 주고, 노예들의 노동에 대한 댓가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때로는 노동이 필요한 곳에 노예를 팔아 돈을 챙겼다. 노예를 팔면 새로운 노예로 충원되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프랑스 해안이 이슬람 해적들의 약탈 대상이 되자, 유럽인들은 해안을 떠나 내륙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바닷가에 남은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 도시 구조를 미로처럼 만들어 버렸다. 해적들이 나타나면 헷갈리도록 하고, 자신들은 잘 도망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해안가에는 곳곳에 망루를 설치했다. 주민들이 교대로 보초를 서고, 멀리서 해적이 몰려오는 것을 보면 재빠르게 신호를 울려 도망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 망루를 사라센의 탑’(Saracen Tower)이라고 하며, 지금도 이탈리아 해안 곳곳에 유적지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 제노아의 사라센 탑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제노아의 사라센 탑 /위키피디아

 

유럽의 해안에도 이슬람 해적의 소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기 890년 프랑스 남부 생트로페(Saint-Tropez) 해안에 사라센 해적이 쳐들어 왔다. 그들은 그곳을 해적 소굴로 만들었고, 프랑스인들은 북쪽으로 도망가 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한 주교는 생트로페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20여명의 해적이 작은 배로 도착했다. 해적들은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사라센인들은 그곳을 자기네 땅이라고 외쳤다.”

20여명으로 시작된 생트로페의 해적들은주변에서 100여명의 동료를 불러 모아 집단화했다. 그들은 그곳을 거점으로 마르세이유, 액상프로방스, 이탈리아 북부까지 약탈 대상으로 삼았다. 생트로페는 그후 100년간 해적 소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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