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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공산권 붕괴⑩…세르비아 민족주의 고양, 공화국과 자치주의 갈등 격화
티토 사망 후 뿔뿔히 흩어진 유고슬라비아 연방
2021. 05. 05 by 김현민 기자

 

이제 역사의 유물이 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의 6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였다. 세르비아공화국 내에는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2개 자치주로 구분되어 있어 연방은 사실상 8개의 권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민족은 대체로 슬라브계이지만, 세르비아족이 35%로 가장 많고 크로아티아족, 슬로베니아족, 알바니아족, 마케도니아족, 헝가리족 등 다양한 종족이 지역별로 혼재해 있었다. 종교는 그리스정교, 카톨릭, 신교, 이슬람으로 다양했고, 종족별로 독자적인 언어를 사용했다.

이 복잡한 인종과 종교, 언어의 구성체가 1945년 단일 연방 결성에 성공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역사성, 반파시스트 투쟁 과정의 단결력,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라는 영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혼합체는 융화되지 못했다. 공업이 발달한 북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족 중심의 연방에 묶이기보다 서유럽 국가와 교류를 하기 원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공화국과 자치주의 연방이탈을 저지하려 했다. 티토가 살아 있을 때엔 연방은 그나마 유지되었지만, 1980년 지도자가 사망한 이후 연방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결정적으로 1985년 소련 고르바쵸프의 개혁-개방 노선이 파급되고, 동유럽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유고연방 소속 공화국들은 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동유럽 국가의 민주화혁명(1989), 소련 해체(1991)에 이어 1991~1992년에 유고연방도 와해되고 만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공화국과 자치주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 공화국과 자치주 /위키피디아

 

유고연방의 시초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공에 맞서 1942년 요시프 티토가 조직한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인민해방전선이라는 파르티잔 조직이었다. 티토는 한때 80만명의 파르티잔을 거느리며 파시스트 침략군에 저항했다.

19431129, 티토는 보스니아의 야이체에서 이 지하 파르트잔 조직을 연방국가로 전환시킨다고 선언했다. 유고(Yugo)는 남()이란 뜻으로,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독립을 위해 영국과 소련을 끌어들였지만, 그 어느 진영에도 종속되지 않았다. 티토는 영국군의 지원을 얻기 위해 윈스턴 처칠 총리와 만나 과도정부 수립에 동의하는 한편, 영국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가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상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19453월 티토의 저항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해방시키고, 1126일 유고슬라비아 인민공화국연방 정부를 수립했다.

 

티토와 파르티잔 /위키피디아
티토와 파르티잔 /위키피디아

 

티토는 소련군의 지원으로 국내 파시스트세력을 제거한 이후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에서 탈퇴하고 반스탈린노선을 채택했다. 영국 등 서방의 간섭도 뿌리쳤다. 티토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요구하는 페타르 2(Petar II) 망명정부 국왕의 옹립을 거부하고, 공화국 체제를 정립했다.

티토는 6개 공화국에 인종간 화해를 관철시켰다. 2차 대전 기간에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우파 우스타샤 세력이 독일군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인을 30만명 이상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부 수립후 이에 대한 종족간 증오가 격화되는 것도 중재했다.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 이슬람의 종교적, 종파적 대립도 화해시켰다.

티토는 다민족 국가의 안정을 위해 중앙 집권적인 권력 강화보다는 개별 민족들의 상호 평등을 약속하고 6개 공화국과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등 2개 자치주에게 고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보장하는 민주적 중앙 집권화의 원칙을 천명했다.

아울러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 공산국과 달리 바르샤바 조약(WTO)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도 가입하지 않고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티토는 공산주의 이념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 자주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그의 노동자 자주관리 이론은 공산당이 시키는대로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산 경험에 근거한 지혜로써 직접 회사를 꾸리고, 회사의 살림살이에 참여하는 민주적 경영방식이다. 그의 사회주의 이념은 스탈린식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한 독자노선으로, 서방 지식인들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평가받기도 했다.

티토 집권시절에도 민족갈등이 발생했다. 1967년과 1972년 크로아티아에선 인종갈등이 있었고, 1968년과 1981년에 코소보에 저항운동이 발생했다. 티토는 이들의 저항을 제압하고 1974년에 공화국에 자율권을 보다 확대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개인의 절대적 권위를 바탕으로 하는 티토이즘은 그가 죽음으로써 위험에 빠졌다. 19805월 티토가 87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유고슬라비아에선 인종, 종교의 구분 없이 그를 애도했다. 하지만 그를 대체할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연방은 각 공화국 대표로 구성된 집단지도 체제에 의해 꾸려나갔다.

요시프 티토 /위키피디아
요시프 티토 /위키피디아

이때부터 각 공화국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연방에 위기가 찾아왔다. 경기가 후퇴하고, 다인종, 다종교, 다문화의 연방은 오히려 분열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1980년대초 오일쇼크 후유증으로 대외채무 상환능력이 위축되었고, IMF는 유고연방에 긴축재정을 요구했다.

가장 불만이 큰 공화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티아였다. 북부의 2개 공화국은 남부의 4개 공화국보다 잘 살았는데, 두 공화국은 연방의 경제적 규제 강화에 불만을 터트렸다. 슬로베니와 크로아티아는 유럽연합(EU)와 경제적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보았다. 세르비아내 자치주인 코소보의 경우도 세르비아인에 비해 20~40%의 낮은 소득수준으로 살았는데, 자신들이 힘들게 생사한 소출이 세르바아에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연방내 종주국 격인 세르비아인들도 불만이 많았다. 1986년에 세르비아 과학예술아카데미(SANU) 소속 작가와 역사학자 16명이 작성한 비망록은 세르비아인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았다. 비망록은 티토가 크로아티아인이기 때문에 유고연방 헌법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게 유리하게 만들었고, IMF가 요구한 긴축정책을 세르비아인이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티토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비망록은 또 코소보와 보이보디나(Vojvodina)의 자치권을 확대한 1974년 헌법이 세르비아에 족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6인의 비망록은 유출되어 언론에 공개되었다. 연방정부는 비망록이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고 한발 물러섰으나, 크로아티나와 슬로베니아는 연방 내 슬라브주의자들의 속셈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이 비망록이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격화시킨 단초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 비망록의 내용을 신뢰한 사람들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를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인종 구성 (1991)/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인종 구성 (1991)/위키피디아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코소보의 자치에 격하게 반대했다. 코소보에는 알바니아계 이슬람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고, 그리스정교의 세르비아인은 소수였다. 코소보인들은 우리는 유고슬라비아 사람이 아니라, 알바니아 사람이라고 주장해 세르비아인들을 분노케 했다.

밀로셰비치는 1984년 유고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 공산당서기장, 1986년에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코소보내 알바니아인에게 탄압받는 세르비아인들을 지지하며,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동포애와 단결을 주장한 티토주의를 부정했다. 그의 강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코소보 자치주는 물론 크로아타아와 슬로베니아 공화국의 강한 불만을 유발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서서히 분열의 길로 접어들고 마침내 내전으로 치닫게 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

Wikipedia, Josip Broz Tito

Wikipedia, SANU Memorand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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