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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공산권 붕괴⑪…IMF 긴축정책 요구에 공화국 간 대립 격화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유고연방내 소수민족 반발
2021. 05. 06 by 김현민 기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선출된지 한달쯤 지난 1989628, 코소보 자치주 가지메스탄(Gazimestan)에서 대규모 군중집회가 열렸다. 집회는 세르비아 공화국 정부와 공산당이 주도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역의 세르비아인들이 참석했다. 심지어 미국, 캐나다, 호주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 교포들도 공산당의 초대를 받아 참석했다. 군중의 수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50만에서 200만까지 달랐다.

이날 행사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역사의 분기점이 된 1389년 코소보 전투 600주년을 기념한 자리였다. 장소는 전투가 벌어진 그 곳이었다.

세르비아 공산당 간부과 정부 요인들의 기념사가 이어지고, 마지막에 밀로셰비치가 등단했다.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나는 이 역사적인 코소보 벌판에서, 우리 세르비아인들이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고 공언합니다. 세르비아인들은 오히려 정치인들에 의해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 상태가 수십년 지속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손해를 보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르비아인들은 단결해야 합니다.”

밀로셰비치의 이날 연설은 코소보 독립을 위협하고, 공화국들의 연방탈퇴를 저지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1989년 6월 28일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연설 /위키피디아
1989년 6월 28일 밀로셰비치의 코소보 연설 /위키피디아

 

밀로셰비치는 요시프 티토 집권 시절에 개정된 1974년 헌법을 부정했다. 1974년 연방 헌법은 세르비아 내 코소보(Kosovo)와 보이보디나(Vojvodina)를 자치주로 승격하고, 두 자치주의 대통령을 6개 공화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연방 집단대통령제(Federal Presidency)에 참여하도록 규정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헌법 개정의 취지가 2개 주를 떼어내 세르비아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고 불만을 품었지만, 티토의 위세 앞에 수용해야 했다. 티토는 아버지가 크로아티아인, 어머니가 슬로베니아인인데,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정치인에 의해 공화국이 쪼개졌다는 주장에 빠져들었다.

연방내 최대 공화국인 세르비아 대통령의 주장은 다양한 인종이 자치권을 갖고 함께 살아가자는 티토주의의 포기였고, 세르비아인 주도로 연방을 끌고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밀로셰비치의 극단적 세르비아주의는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혁명이 진행되고 소련내 공화국들의 독립 움직임이 격화하는 시기에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그의 극단론은 유고 내전과 코소보 인종청소를 초래했고, 본인이 국제재판에 넘겨져 감옥에서 사망하는 비참한 말로로 귀결되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 그림(Adam Stefanović) /위키피디아
1389년 코소보 전투 그림(Adam Stefanović) /위키피디아

 

유고술라비아의 인종 및 종교분쟁은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389년 전투 이후 코소보는 500년 이상 오스만투르크의 영토가 된다. 오스만 제국은 코소보에 알바니아인계 회교도들을 이주시켰다.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유고 연방의 영토 전체를 집어삼켰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를 진출하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내줘야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었다.

1차 세계대전은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총격으로 촉발되어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차 대전후 세르비아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확대, 개편되었고, 유고 왕국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인을 억압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나치독일의 지원 하에 우스타샤 정권을 수립해 수십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이에 맞서 세르비아인들도 체트니크(Chetnik) 게릴라를 조직해 비세르비아인들에게 보복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공에 저항한 파르티산 세력들은 이런 인종적 증오를 해소하기로 약속하고, 1945년 정부 수립이후 티토주의로 구체화했다.

 

밀로셰비치 /위키피디아
밀로셰비치 /위키피디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정치구조는 처음에 23명의 집단대통령제로 출발했다. 6개 공화국에서 각 3, 세르비아 내 2개 자치주에서 각 2명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연방공산당 서기장(티토)으로 구성된 23명의 대통령(president)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가 연방의 주요 직책을 임명했고, 외교, 국방 등 주요정책을 결정했다. 티토는 종신직으로 위원회 의장이 되어 사망할 때가지 국가수반을 맡았다.

1974년 개정된 헌법에는 6개 공화국과 세르비아내 2개 자치주의 의회가 각 1명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연방공산당 서기장을 당연직으로 한 9명이 대통령 집단이 연방을 꾸려가도록 했다. 개정헌법은 2개 자치주를 세르비아와 동격으로 올려 놓은 것이다.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의 자치권을 확대한 이 헌법이 세르비아인들의 불만을 자극했고, 밀로셰비치로 하여금 반티토노선을 걷게 했다.

 

유고연방내 민족 갈등을 부채질 한 것은 경제위기였다. 경제위기도 티토의 잘못으로 돌려졌다.

티토의 등거리외교, 비동맹노선은 유고슬라비아를 소련에서 떼놓으려는 미국과 서유럽의 지지를 얻었다. 서방국가들은 티토의 시장주의 도입을 지지하며 차관을 대주었고, 티토는 서방자금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덕분에 1960~1980년 사이에 유고슬라비아는 연평균 6.1%의 고도성장을 달성했고, 유고인들은 서유럽에 못지 않는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의료혜택은 무료로 지원되었고, 군대의 무장수준은 소련의 침공을 막아낼 정도로 현대화되었다.

하지만 1970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경제는 침체의 늪에 허우적거리고 차관 상환 압박에 시달렸다. 티토가 사망한 1980년 무렵에 유고연방의 대외채무는 21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후에 공개된 대외비 문서에서 유고가 대외부채 상환압박을 이기지 못할 경우 소련의 영향권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1985년 소련이 먼저 개혁과 개방 노선을 펼치면서 유고 연방은 소련에 기댈수도 없게 되었다.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동유럽에 더 이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마당에 유고는 독자적으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드디어 IMF가 개입했다. IMF는 대외채무를 차환하면서 유고연방에 긴축재정을 요구했다. 긴축재정은 공공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축소되고, 물자부족에 물가는 상승했다. 노동자들은 1987~1988년에 연쇄적으로 파업을 일으켰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공화국들은 각자 도생의 입장으로 전환했다. 연방내 6개 공화국 중에 북부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했다. 두 공화국은 서유럽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방과의 개별적 무역을 차단한 연방정부의 규제조치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비해 세르비아 공화국은 연방의 대외채무 상환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보다 더 크게 부담할 것을 요구했다. 잘사는 공화국과 어려운 공화국 간의 이해충돌은 인종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재정긴축조치로 기업파산도 이어졌다. 파산기업에 대한 회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업인과 공산당 간부와의 유착관계가 드러났다. 인민대중은 경제위기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당간부들은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호화생활을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공산당에 대한 신뢰도 급강하했다.

일부에선 미국이 IMF를 앞세워 유고슬라비아에 충격요법을 가했고, 이에 따라 유고연방 내부의 갈등이 폭발해 해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근거가 없는 주장이긴 하지만, IMF의 긴축 요구가 연방내 공화국의 갈등을 격화시킨 것은 분명하다.

 

전통춤인 콜로(Kolo)를 추고 있는 유고인들 /위키피디아
전통춤인 콜로(Kolo)를 추고 있는 유고인들 /위키피디아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쵸프 공산당 서기장은 동유럽국가의 이탈을 허용했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연방해체를 단행했다. 권력의 최상부에서, 그리고 최대공화국인 러시아에서 위성국과 공화국의 이탈과 해체를 인정했기에 피바람이 불지 않았다. 하지만 유고연방에서는 달랐다. 집단대통령제를 주도하고, 최대 공화국의 지도자인 밀로셰비치는 공화국과 자치주의 이탈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 그 결과는 내전과 집단학살이었다. 유고 내전은 지도자의 잘못된 인식이 인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를 강요했는지를 교훈으로 남겼다.

 


<참고자료>

Wikipedia, Breakup of Yugoslavia

Wikipedia, Gazimestan speech

Wikipedia, Yugoslav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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