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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독일 분단④…동독 민주화시위 좌절, 서독으로의 집단이주
동독의 민주화 봉기…탈주 막기 위해 장벽 설치
2021. 05. 14 by 김현민 기자

 

1949107일 소련 점령지에서 독일민주공화국(German Democratic Republic)이 수립되었다. 이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당한 사회주의통일당(Socialist Unity Party)의 일당독재에 의해 지배되었다. 지리적 편의상 동독(East Germany)이라 불리는 이 정권은 소련이라면 치를 떠는 독일인들에겐 인기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만든다는 기대만은 존재했다.

하지만 그 기대도 곧 무너졌다. 1950년부터 서독 경제는 기적을 보이며 고도 성장을 구가했다. 완전고용에 가까운 고용률은 거리의 실업자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때만 해도 동-서독 사이에 철조망이 없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으로 건너갔다. 1951년엔 16만명의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이주했고, 1952년에는 그 수가 182,000명으로 불어났다. 1953년초 넉달동안엔 122,000명이 서독으로 집단탈출했다. 서독 입장에선 자유 이주였지만, 동독정권 입장에선 불법적 월경이었다.

이처럼 대량의 동독 이탈자가 생긴 것은 경제력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동독 정권이 취한 급진적인 소련화 정책이 민심이반을 일으켰다.

사회주의통일당의 발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당서기장은 1952년 제2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승리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역설하며 계획경제와 농업집단화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지주의 토지몰수는 소련군 점령 초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행정당국은 나치 부역자와 전범자 소유의 토지를 몰수하고 대지주의 땅 가운데 100ha 이상 되는 토지를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3의 토지를 확보해 50만명의 소농과 난민, 임노동자에게 분배했다.

동독정권이 출범하면서 귀족(Junker) 토지를 시작으로 집단화가 추진되었다. 집단화는 농민의 토지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임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을 말한다.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융커들이 토지를 버리고 서독으로 탈주하는 바람에 75,000ha의 휴경지가 발생했다.

1952~1953년 겨울에 식량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공산정권이 중화학공업에 치중하는 바람에 생활필수품이 극도로 부족했다. 상점 진열대에는 물품이 비게 되고, 노동자들의 생활비는 치솟았다.

이런 와중에 울브리히트 정권은 사회주의 건설을 당기기 위해 근로자에게 노동할당량을 10%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임금을 고정시킨채 작업량을 늘리는 것은 노동수탈에 해당한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은 무너졌고, 노동자들은 물가인상에 노동량 증가로 30% 이상의 실질임금이 삭감당하는 상황에 처했다.

공산정권은 당서기장 울브리히트의 60세 생일인 1953630일에 맞춰 노동배가 운동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과격한 조치는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1952년말에 라이프치히, 드레스텐, 할레, 줄 등의 도시에선 산발적인 소요가 일어났다. 1953년이 시작되면서 공산정권에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공장노동자들의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거리의 벽에는 사회주의통일당을 비난하는 글귀가 등장했다.

 

동독의 행정구역 /위키피디아
동독의 행정구역 /위키피디아

 

195339, 소련을 30년 이상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다. 소련은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지도부 내부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발생했다. 초기 선두주자는 비밀경찰국장 출신의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였다. 그는 동독을 서독과 합병시켜 중립국화함으로써 동서냉전을 데탕트 국면으로 전환시켜 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을 것을 구상했다. 베리야와 손잡은 인물은 게오르기 말렌코프(Georgy Malenkov) 총리였는데, 말렌코프는 동독 울브리히트의 급진노선이 주민의 반발을 사 재앙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

베리야는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동독 정부에 개혁을 요구했다. 62일 말렌코프를 통해 동독에 하달된 모스크바의 새 지침은 농업집단화의 보류, 소기업에 대한 민간소유 허용, 중화학공업 위주에서 경공업 위주로 전환, 정치국 중심의 통제 완화, 기독교에 대한 억압 중단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새 지침에는 노동할당량 10% 증대에 대한 폐기 조치가 빠져 있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는 새 지침을 수용할지를 논의하다가 소련의 동독담당 최고위원 블라디미르 세묘노프(Vladimir Semyonov)의 재촉을 받고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동독 정권은 새 지침을 언론에 발표했다.

사회주의통일당 당원들은 새 지침에 당혹했지만, 노동자들은 작업할당량 증대 조치가 폐기되지 않은 사실에 분노했다. 노동자들은 동독정권이 모스크바에 질질 끌려다닌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고, 노동할당량 정상화를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 진입하는 소련군 탱크 /위키피디아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에 진입하는 소련군 탱크 /위키피디아

 

612일과 135,000명의 시위대가 브란덴부르크에서 집회를 열었다. 615일 동베를린 스탈린 거리에 노동자들이 작업할당량 축소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본격적인 시위는 616일 일어났다. 건설현장의 노동자 300명이 동베를린에서 파업을 벌이며 아침부터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시내를 누비며 총파업을 선동했다. 시위대는 내각 청사 앞에서 울브리히트 서기장의 답변을 요구했다. 서기장은 몸을 피하고 중공업 장관이 군중 앞에 섰으나, 야유에 묻혀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이날 시위 소식은 서독의 미국 방송에 전해졌고, 이 방송은 시위대에 접근해 파업소식을 낱낱이 소개했다.

동독 지도부는 시위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동할당량 10% 증대조치를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슈를 작업할당량에서 정치문제로 전환했고, 자유총선거 실시등을 주장했다. 시위가 걷잡을수 없이 확산되고, 내일(17)엔 전국적인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소련측 담당자 세묘노프는 소련군의 개입을 동독 지도부에 통보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베리야의 성급한 개혁조치로 인해 동독 사태가 확대되고 있다는 흐루쇼프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고, 소련은 황망하게 강경론으로 돌아섰다.

 

1953년 6월 17일 라이프치히 시내의 소련군 탱크 /위키피디아
1953년 6월 17일 라이프치히 시내의 소련군 탱크 /위키피디아

 

17일 아침 일찍부터 동베를린을 비롯해 동독 전역 주요도시에서 자유선거를 외치며 시위가 전개되었다. 베를린 외곽에 주둔하던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동베를린 시내로 진입했고, 동독의 인민경찰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소련의 지시로 동독 당국은 동베를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일부 충돌이 있었으나 시위는 대체로 신속하게 해산되었다.

소련군과 동독인민경찰은 28,000명이 배치되었고, 이틀간 시위참가수는 150만명에 달했다. 국소적인 충돌로 경찰 5명이 죽고, 시위대는 55~12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실종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흐루쇼프 등이 동독 시위의 책임을 베리야에게 돌리고, 그를 체포하고 실각시켰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강경파 울브리히트의 권좌는 유지되었다.

1953년 동독의 봉기는 1956년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보다 일찍 일어난, 동유럽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1963년 6월 26일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는 미국의 J.F. 케네디 대통령 /위키피디아
1963년 6월 26일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는 미국의 J.F. 케네디 대통령 /위키피디아

 

19536월의 봉기는 실패했지만, 동독 정권이 소련군 탱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이후 동독인들의 집단탈주가 이어졌다. 1961년까지 동베를린 인구수에 맞먹는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동독은 서독과의 경쟁에서 이길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집단탈주를 막는 대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 대책이란 다름 아닌 철조망이다.

1961813일 동독 병사들과 군사요원들이 동베를린을 둘러싸는 가시철조망과 참호를 설치했다. 곧이어 동독과 서독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졌다. 동독은 장벽에 초소를 설치해 서독으로 도망가는 사람에게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이로써 동독과 서독은 198911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때까지 국경 아닌 국경에 담벼락을 세우고 대치하게 된다.

 


<참고자료>

Wikipedia, East Germany

Wikipedia, History of East Germany

Wikipedia, East German uprising of 1953

Wikipedia, Republikflu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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