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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독일 분단⑤…프랑스, 자르란트 점령시도…드골과 아데나워, 화해로 전환
프랑스와 독일, 천년의 적대감 청산-영구화해
2021. 05. 15 by 김현민 기자

 

프랑스와 독일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서기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해 프랑크왕국이 분리되고, 동프랑크는 독일, 서프랑크는 프랑스의 원조가 된다. 이후 프랑스 왕국은 게르만족의 주류인 합스부르크 제국 또는 프로이센과 경쟁관계가 되었고,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서부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20세기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두 민족의 관계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독일 총리를 지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양국은 1천여년의 기간 동안에 무려 42회나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2차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프랑스는 또다시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프랑스인들은 게르만족이 영원히 재기할수 없도록 원칙을 고수했다.

하지만 20년쯤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감정 응어리도 사그라들었고, 두 나라 지도자들은 영원한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 염원이 현실화되면서 오늘날 EU라는 거대한 정치통합체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자르란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자르란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2차 대전 기간에 프랑스는 나치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고, 패전국 독일에 대해 전쟁 배상금으로 땅이든, 돈이든 받아내려 했다. 전후 프랑스가 노렸던 땅이 자르란트(Saarland)였다.

자르란트의 면적은 2,569km²로 룩셈부르크 정도이며, 서울의 4배에 해당한다. 인구가 100만명으로 독일에서 가장 작은 주다. 이 주는 독일의 서남방으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에 인접해 있다.

이 땅은 오랫동안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영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자르란트는 중세에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들이 작은 영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프랑스 왕의 직할령도 있었고, 독일계 바바리아 왕국(바이에른)의 영지도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 이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고, 루이 14세 때 프랑스가 한때 점령(1680-97)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라인강 좌측 지역이 프랑스에 합병되었으나,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1815년 파리조약에서 그 대부분이 프로이센에 넘어가고 남동부는 바이에른에 편입되었다.

이 지역은 풍부한 석탄 산지로, 산업 혁명 이후 석탄 및 철강 공업이 발달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프랑스는 이곳을 합병하려다 실패했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국제연맹이 감독하는 자치 지역으로 되었다. 그후 1935년 주민투표에서 91%의 지지로 다시 독일로 복귀했다.

 

2차대전 종전후 프랑스는 이 땅을 자치주로 만들어 공식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욕심을 냈다. 프랑스는 자르란트를 점령해 보호령(protectorate)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자 아무리 패전국이지만 독일 연방정부(서독)가 가만 있지 않았다. 1950년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자르란트의 반환을 촉구했다. 두 나라는 주민투표에 붙이기로 했다.

1955923일 자르란트에서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프랑스령 자치주로 남을 것인지에 찬성한 표가 32.29%, 반대표가 67.71%로 나타났다. 압도적 인구가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결국 자르란트는 독일에 복귀하게 된다. 195610월 프랑스와 서독은 자르란트를 독일에 귀속시키기로 협약을 맺었고, 이 땅은 195711일 독일연방공화국의 1개 주로 편입되었다.

 

ECSC 가맹국 /위키피디아
ECSC 가맹국 /위키피디아

 

독일과 프랑스의 자르란트 분쟁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CSCEEC, 오늘날 EU로 발전하게 된다.

ECSC 출범에 기여한 사람은 로베르 쉬망(Rober Schuman)이 프랑스 정치인이다. 쉬망은 1886년에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피에르 쉬망은 알사스-로렌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적이었다가 영토변화에 따라 독일 국적으로 바뀌었다. 쉬망도 독일 국적이었다가 1차 대전 이후 프랑스 국적으로 바꿨다. 이렇게 출생지와 국적이 바뀌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쉬망은 유럽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굳히게 되었다.

2차 대전후 쉬망은 두 차례 프랑스 총리를 역임했고, 드골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제3의 세력권을 확보했고, 1948년에는 외교부 장관이 된다.

195059일 프랑스 외교 장관이던 쉬망은 이른바 쉬망 선언(Schuman Declaration)을 발표했다. 내용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생산되는 철과 석탄을 하나의 조직에 의해 통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헛된 말을 쏟아낼 게 아니라,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프랑스는 평화를 희망한다. 우리의 생각에 유럽이 동의할 것이다. 독일의 루르와 자르, 프랑스의 산업 시설은 하나의 목표로 움직일 것이며, 유엔의 감시를 받을 것이다. 지금부터 유럽은 새로 태어날 것이다. 유럽은 굳게 단합할 것이다.”

쉬망은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었다. 철강과 석탄의 생산을 공동관리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이며, 평화적 발전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그는 간파했다.

 

 

1958년 유럽의회 첫회의에 참석하는 로베르 쉬망 /위키피디아
1958년 유럽의회 첫회의에 참석하는 로베르 쉬망 /위키피디아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즉각적으로 반겼다. 패전국이었던 독일로선 유럽의 무대에 복귀할 기회가 되었다. 쉬망의 제안에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호응했다. 영국은 이때 노동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국제기구의 초국가적 권력에 반대하며 가입을 포기했다.

쉬망의 제안에 의해 6개국으로 철과 석탄의 생산을 조절하는 기구가 1951년에 탄생했다. 이 조직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쉬망 선언 이후 프랑스는 독일 자르란트를 영토화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자르란트는 1955년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로 귀속될 것이 결정되었다. 철과 석탄의 화해는 원자력의 화해로 이어졌고, 1957년에 유럽경제공동체(EEC: 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결성되었다.

 

1963년 1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 협정 체결식 /위키피디아
1963년 1월, 프랑스와 독일의 엘리제 협정 체결식 /위키피디아

 

19589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은 서독의 노정객 아데나워 총리를 파리 교외의 자택으로 초대했다. 드골은 값비싼 포도주를 꺼내 아데나워를 접대하면서 두 나라의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자고 정중하게 제의했다. 아데나워는 그때까지만 해도 드골을 신뢰하지 않았다. 드골은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 민족주의자였다.

아데나워는 드골의 제안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후 4년간 두 정상은 15번을 만나고 100시간 이상 토론하고, 40통의 편지를 서로 보내며 두 나라의 협력문제를 논의하고 우정을 쌓았다.

드골이 서독에 화해 제스추어를 던진 것은 미국과 소련의 주도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는 독일을 끌어 안고 유럽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것을 구상했다. 아데나워도 서방과의 화해를 원했고, 프랑스를 통해 나치독일의 원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두 지도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19627, 드골과 아데나워는 파리 외곽 노트르담 성당에서 양국군대의 사열을 받았다. 두 사람은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노트르담 성당은 1차 대전 때 독일군이 무차별 포격을 가한 상징적 장소였다. 그 곳에서 두 정상은 두나라 국민 앞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영원한 화해를 선언했다.

그로부터 반년후인 1963122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의 정상은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역사적인 조약을 맺었다. 엘리제 조약(Élysée Treaty)의 골자는 두 나라가 영구히 화해한다는 것이었다. 조약 체결 당시에 드골의 나이는 72, 아데나워는 87세였다. 두 노정객들이 1천여년에 걸친 두 민족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기로 한 것이다.

 

악수하는 샤를 드골 프랑스대통령과 아데나워 독일 총리 (1961) /위키피디아
악수하는 샤를 드골 프랑스대통령과 아데나워 독일 총리 (1961) /위키피디아

 


<참고자료>

Wikipedia, FranceGermany relations

Wikipedia, 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Wikipedia, Saar Protectorate

Wikipedia, Robert Schuman

Wikipedia, Élysée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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