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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독일 통일②…라이프치히 월요집회에서 출발, 베를린장벽 붕괴 원동력
동독 민주화 시위로 얻어진 독일 재통일
2021. 05. 20 by 김현민 기자

 

1980년 동독 작센주의 수도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 37세의 크리스티안 퓌러(Christian Führer) 목사가 부임했다. 1981년 퓌러 목사는 평화기도회’(peace prayers)를 조직하고, 1981920일부터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정기적으로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에선 세상의 모든 것이 자유롭게 토론되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토론했고,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서서 억압하는 자를 비난했다. 처음에는 루터파 교인 위주로 조직되었으나, 점차 비기독교도들도 기도회에 참여했다. 퓌러 목사는 신약성서 산상수훈의 구절을 강조하며 가난한 자,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며, 억압하는 자, 권좌에 있는 자의 권위는 끌어내려 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무신론를 믿는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기도회를 멸시했고,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렸다. 독일의 교회는 두 번의 무신론자와 싸웠다. 첫 번째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고, 두 번째는 동독 공산정권이었다.

니콜라스 교회의 작은 기도회는 독일 통일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창출했다. 젊은 목사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갖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외쳤다. 그들은 비폭력을 고수했다. 억압하는 자들이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그들은 평화를 노래했고, 기도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 /위키피디아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 /위키피디아

 

공산 치하 동독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게 토론할수 있는 공간은 교회였다. 교회는 반정부세력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집회장소를 제공했다. 인권운동가, 시민운동가, 환경보호론자, 평화주의자들이 기도회와 교회 출판의 보호막을 이용해 시사성 문제를 토론했고, 다양한 반정부 인쇄물을 제작, 배포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불온문서의 인쇄-배포를 막기 위해 교회들을 뒤졌다. 198711월에 슈타지는 동베를린 교외 시온 교회(Zion church)에 있는 도서관을 기습 수색했다. 반정부단체는 그곳에서 환경운동으로 위장해 반정부 유인물을 제작했는데, 슈타지가 수색하기 전에 관련 자료를 빼돌리면서 수색은 실패했다.

반정부 활동가들은 동독 정권이 독일공산당의 원조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가 나치에 살해당한 날을 기념해 매년 개최되는 행사를 이용해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했다. 룩셈부르크는 자유는 항상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반체제인사들은 1988117일 아침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나 시위 정보를 미리 입수한 슈타지는 주동자들을 사전에 체포, 시위를 무산시켰다. 160여 명이 체포되었고, 신속한 재판과 처벌이 뒤따랐다. 그중 50여 명은 서방으로 추방되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정권 수립 40주년 행사. 소련 고르바초, 동독 호네커 당서기장이 참석했다. /위키피디아
1989년 10월 7일, 동독정권 수립 40주년 행사. 소련 고르바초, 동독 호네커 당서기장이 참석했다. /위키피디아

 

1980년대 후반 동유럽에선 소련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개혁-개방 노선의 여파로 민주화 열기로 가득 찼다. 폴란드에선 자유노조 운동이 다시 일어났고, 헝가리에선 민주화 절차를 밟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시위에 대해 개별 정부가 해결하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른바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 Doctrine)으로 불리는 고르바쵸프의 불개입주의는 과거 동독 총파업(1953), 헝가리 민주화 시위(1956),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1968)과 같이 위성국에서 시위가 벌어지면 소련군을 파병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정권은 소련군의 지원 없이 민주화 세력과 대치해야 했다.

호네커는 폴란드-헝가리와 달리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고르바초프는 호네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8811월 동독 정권은 동독 지도부를 비판한 소련의 월간지 스푸니티크(Sputnik)의 배포를 금지하기도 했다.

동독인들의 탈주가 확산되었다. 공산권 국가인 헝가리는 동독인들의 월경을 묵시적으로 용인했고, 오스트리아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을 제거해 버렸다. 동독인들은 독일 내의 장벽을 넘지 않고 서독으로 갈수 있는 길이 열렸다. 수천명의 동독인들은 프라하 주재 서독대사관에 몰려가 입국 절차를 밟았다. 호네커 정권은 우방국이라 믿었던 헝가리의 조치에 실망해 국경통제를 강화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 경찰이 민주화 시위를 저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9년 10월 7일, 동독 경찰이 민주화 시위를 저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8994, 라이프치히 니콜라스 교회의 월요 집회자들은 동독 정권에 국경개방과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집회를 개최했다. 1,200명이 모였고, 이날 집회가 독일 재통일의 시발점이 되었다.

서독의 방송들은 라이프치히 집회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동독 정권은 1971년부터 인민들에게 서독 방송의 청취를 허용했다. 이는 불가피한 조치였다. 공산정권은 전파방해를 통해 서독방송을 막을 방법을 찾지 못했고, 음성적으로 확산되던 서독방송 시청을 차라리 허용하는 게 동독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서독의 방송을 통해 라이프치히 집회사실을 알게 된 동독 교회들은 동조 시위에 가세했다. 동독 정권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구상을 했다. 102일 베이징을 방문한 2인자 에곤 크렌츠(Egon Krenz)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중국 정부의 길을 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중국 공산정권은 그해 6월 텐안몬(天安門)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는데, 동독 정권은 중국식 방법을 따르겠다는 신호였다.

107일은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되는 날이었다. 이날 라이프치히 카를 마르크스 광장에는 소련의 고르바초프도 참석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의 행사 참여를 보류시켰다. 동독인들을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행사 참여자들은 고르바초프에게 고르비(고르바쵸프의 애칭), 우리를 도와 주세요라고 구호를 외쳤다. (고르바초프는 동독인들의 소망을 직접 들었다. 그는 동독 주둔 소련군에게 병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동독 지도부에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독 비밀경찰은 시위를 저지했다. 슈타지 요원들은 수백명의 시위자들을 구타하고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경찰의 폭력은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를 더 자극했다.

 

109,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는 무려 7만명이 운집했다. 동독 정권은 경찰 병력 8,000명을 배치했다. 퓌러 목사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두려웠다. 그들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어린이를 집에 두고 나왔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찾았다. 우리는 촛불과 기도만으로 평화롭게 행진했다. 선두가 경찰에 맞더라도, 우리는 행진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호네커 정권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정권이 인민의 힘(peaple’s power)를 두려워한 것이다. 만일 호네커 정권이 탱크와 총칼로 시위를 짓밟았다면 동독의 민주화는 베이징처럼 끝나고 말았을까. 동독은 중국과 달랐다. 중국은 엄청난 군대를 배치해 시위를 유혈 진압했지만, 동독 정권은 시위를 막을 힘이 없었다. 동독은 소련 탱크에 의존해 유지한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다.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시위 /위키피디아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시위 /위키피디아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 지도부에선 호네커의 강경대체로 인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견해가 대두했다. 일부 정치국원들은 호네커를 경질하기로 입장을 정리하고, 1017일 당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치국원들은 최근의 사태를 호네커의 잘못으로 뒤집어 씌웠다. 호네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지병으로 인해 사임한다고 밝혔고, 회의는 만장일치로 크렌츠를 신임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18년간 동독을 철권통치한 호네커 시대는 막을 내렸다. 당시 호네커는 77세였다.

 

크렌츠 정부가 들어선 이후 시위는 오히려 증폭되었다. 1023일에는 라이프치히 시위대는 30만명으로 불어났고, 다른 도시로 번져 나갔다. 동독인들은 월요일마다 시위를 벌였다.

동독의 시위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114, 수도 베를린에서 100만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민주화, 자유화를 요구했다. 동독 정부는 이를 막지 못했다.

119일과 10일 밤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독일 통일의 신호탄이 되었다. 독일인들의 재결합은 동독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결과였다. 동독의 자유화 운동은 독재자 호네커를 물러나게 했으며, 30년 가까이 그들을 갈라놓았던 분단의 벽을 붕괴시켰다. 동독인들의 민주화 운동은 폭력을 배제했기 때문에 평화 혁명’(Peaceful Revolution)이라 불린다.

 


<참고자료>

PBS, The Rev. Christian Fuhrer Extended Interview

Wikipedia, Monday demonstrations in East Germany

Wikipedia, Christian Führer

Wikipedia, Peacefu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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