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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붕괴
독일 통일③…제3국 경유 탈주 성공, 베를린 장벽도 허물어져
동독인들의 대탈주…헝가리, 국경을 열다
2021. 05. 21 by 김현민 기자

 

동독의 면적은 108,000으로, 대한민국보다 약간 넓었다. 인구는 1950184만명에서 1970171만명, 1990년엔 161만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자연증가분을 감안하더라도 1950년에서 1990년까지 200만명 이상의 인구가 줄었다. 그 이유는 동독 주민들이 대거 서독으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1949년 분단 이후 1990년 재통일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은 520만명을 헤아린다.

동독 정권은 1961년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 장벽을 친 이후 국방부 산하에 국경수비대를 별도로 조직해 주민의 이주를 막았다. 가장 많을 때 수비대 인원은 47,000명에 이르렀다.

국경에 장벽과 철조망을 친 이후에도 350만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탈출방법도 다양했다.

손쉬운 방법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을 통하는 길이었다. 동서독간 경계보다 이웃나라의 경계가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이다. 1961~1988년 사이에 7,000~8,000명의 동독인이 제3국을 경유해 서독으로 입국했다. 이웃 공산국가로 밀입국하려다 적발될 경우 감옥에 가거나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동서독 경계를 넘는 방법은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1979년에는 두 가족 8명이 대형풍선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 철조망을 끊고 탈출하는 사람도 있었고, 발트해를 45km나 헤엄쳐 서독 땅에 밟은 사람도 있었다. 동서독을 오가는 냉동 트럭을 타고 도주한 경우도 있었고, 지하터널을 뚫어 탈출하기도 했다.

동독 정권은 탈주자에 대해 발포명령을 내렸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동독당국은 발표하지 않았다. 통일후 동독의 비밀자료를 통해 조사한 결과로, 1,1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동독의 국경수비대 /위키피디아
동독의 국경수비대 /위키피디아

 

탈출주민에 대한 억압이 강화되자, 서독정부는 비밀리에 동독 정권에 몸값을 지불하고 정치범을 구출하는 정책을 취했다. 동독정권은 인질 장사를 했고, 서독정부는 부도덕한 정권에 돈을 지불한 셈이다. 두 정권 모두가 도덕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보석금 조건부 석방은 비밀리에 부쳤다. 독일 언론과 정치권도 민족의 내부문제란 이유로 이 사실에 침묵을 지켰으나, 통일 후에 그 규모와 수치가 드러났다.

동서독간 정치범 거래는 1962년부터 1989년까지 27년간 금액으로는 346,400만 마르크, 대상자는 동독 정치범 33,755명과 그 가족 25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인당 석방금액은 건별, 대상자별로 달랐는데, 초기엔 평균 4만 서독 마르크였다가 후기에는 10만 마르크로 올랐다고 한다. 서독 정권은 동독인들을 구제하는 인도적 차원에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고 하고, 동독은 반정부 인사 제거와 물자 획득이 목적이었다.

돈으로 인질을 산 첫 케이스는 1962년 크리스마스때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개신교 연합을 통해 동독 성직자 20명과 아동 20명을 구출한 것이었다. 동독에도 교회가 있었는데, 동서독 개신교가 연결고리가 되었고, 대금은 칼륨 비료로 치러졌다. 서방 진영의 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 규정을 피하기 위해 현물 거래를 한 것이다.

첫 거래가 성사되면서 동서독은 정치범 석방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접촉은 피하고, 개신교를 통해 거래가 이뤄졌다. 동서 냉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여서 동서독 모두가 이 거래를 쉬쉬하면서 진행했다. 교섭은 양측 변호사가 나섰고, 동독 측에선 볼프강 포겔(Wolfgang Vogel)이라는 변호사가 비밀경찰 슈타지(Stazi)를 대변해 협상을 벌였다.

석방 대상자는 서독측에서 제시했다. 서독측은 동독 검찰, 법원, 교회 등을 통해 정치범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서독 주민들의 개별적인 탄원을 받아들여 석방자 명단을 작성했다. 동독측은 정치범에 일반 형사범을 포함시켜 거래를 하려 했지만 서독측은 정치범에 한정해 엄선했다. 석방 심사는 1년 정도 걸렸고, 그 기간 동안에 정치범들은 동독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대금은 대부분 현물로 지불되었다. 동서독 간에는 경화(硬貨) 거래가 금지되었기 때문인데, 바나나에서부터 원유, 구리, 공업용 다이아먼드가 건네졌다.

동독은 이 자금으로 해외선전 사업과 비밀경찰 운영자금 또는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자금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서독이 몸값을 지불하고 탈출시킨 동독인 수 /위키피디아
서독이 몸값을 지불하고 탈출시킨 동독인 수 /위키피디아

 

1980년대 후반에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 추진과 동유럽 민주화운동을 틈타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이 시작되었다. 대다수는 헝가리로 몰려들었다.

헝가리는 폴란드에 이어 가장 빠른 속도로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첫 번째 조치는 철의 장막(Iron Curtain) 제거였다.

19892, 헝가리의 미클로시 네메트(Miklós Németh) 총리가 고르바초프에게 서방진영인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을 허물었다. 당시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철의 장막철거를 묵인했다. 헝가리는 소련의 허가를 얻어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가 만나는 라이카(Rajka)라는 국경마을의 철조망을 철거했다. 최초의 철의 장막철거였다.

 

철의 장막을 본격적으로 허문 것은 합스부르르크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 오토의 노력이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Otto von Habsburg)1차 대전후 폐위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맏아들이다. 그는 범유럽연맹(Paneuropean Union) 회장 자격으로 1989620일 헝가리 데브레첸 대학에서 헝가리 정치인들과 만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국경 근처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함께 피크닉(picnic) 행사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제안은 네메트 총리에게로 보고되었다. 네메트 총리는 3시간에 한해 국경을 개방하는 조건으로 두 나라 사람들의 피크닉을 허용했다. 장소는 국경도시 소프론(Sopron), 일시는 819일로 예정되었다. 헝가리에선 민주포럼 당원들이, 오스트리아에선 범유럽연맹회원들이 참가자들을 모집했다. 이 소식이 헝가리에 밀입국해 있던 동독인들에게도 알려졌다.

819일 오후 3,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는 두 나라 국경검문소의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틈에 동독인 20~30명이 검문소를 통과해 오스트리아 쪽으로 빠져나갔다.

헝가리 정부는 그후 소프론 검문소를 개방하고, 동독인의 국경 통과를 허용했다. 베를린 장벽이 닫혀 있던 시기에 동독인에겐 서독으로 넘어가는 작은 구멍을 발견한 것이다.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후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차량 행렬 /위키피디아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후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 차량 행렬 /위키피디아

 

서독 정부는 동독인들이 제3국을 경유해 대거 이탈하자 오스트리아 빈에 동독 이주민 센터를 설치하고 그들을 따듯하게 맞았다.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은 합스부르크가 동유럽 구석구석에 동독인들을 끌어들이려 전단을 배포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동독인 10만여명이 헝가리로 몰려들었다. 서독 정부는 부다페스트 대사관 정원에 대형 천막을 치고, 이주민들을 집합시켰다. 동독 정권은 헝가리에 자국민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헝가리는 거절했다. 1010일 헝가리 정부는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경계를 통해 건너가도록 허용했다. 수만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서독 정부는 헝가리 수도 프라하에 자유의 열차’(Flüchtlingszüge)를 보냈다. 이 열차는 동독 지역인 드레스덴을 경유해 프라하에 도착했다. 12,000명이 이 열차에 올라 탔다. 열차는 유유히 동독 역내를 지나 서독 바이에른주에 도착했다. 열차가 동독 지역을 지날 때 수많은 동독인들이 열차에 환호를 보냈다.

3국을 경유한 동독인들의 대탈주는 베를린 장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해 1110일 동독 정권은 베를린 장벽을 개방했다. 동독인들은 무너진 장벽을 넘어 곧바로 서독으로 건너갔다.

 


<참고자료>

Wikipedia, Republikflucht

Wikipedia, Trading of East German political prisoners

Wikipedia, Peaceful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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